〈 28화 〉 말셀러스 저택
* * *
애런은 철창 안에 서로의 몸이 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들의 어깨에는 악마의 아이임을 나타내는 역십자가의 흉터가 있었다.
“배, 배고파…”
“끄아아악!!”
갑자기 한 남성이 배고프다고 말함과 동시에 지하실에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리가 들린 곳을 보니 사람들이 창살에 달라붙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비명은 남성의 목소리에서 여성의 목소리의 것으로 바뀌었고, 그다음에는 노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창살에 몰린 사람들 때문에 가장 바깥 쪽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깔려 밟히고 숨을 쉬지 못해서 죽어갔다.
애런은 철창 안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10대가 아닌 성인이 악마의 아이가 되어있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마왕에 가까워져 가는 남성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야, 내 몸에 너를 봉인해놨는데도 네가 부활할 수도 있는 거냐?”
[글쎄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 확신을 가지고 대답을 할 수는 없겠다.]
“쯧.”
혀를 한번 차고는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는 남자를 정화하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 하지만 그 기도는 천사에게 닿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왜 또 지랄인데.”
아일라를 지키기 위해서 잠깐 생겼던 믿음은 이미 사라졌고, 신성 마법을 사용할 정도로 신앙심이 있지 않은 애런으로는 악마의 아이를 정화할 만한 불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애런은 한숨을 쉬고는 검을 꺼내 들었다. 정화의 불로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의 고통으로 죽이는 것만이 애런이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스르르. 마기가 검을 감싸고 은빛이었던 날이 검게 물들어간다. 채앵!! 가볍게 휘두른 검은 많은 사람이 두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던 철창을 너무나도 쉽게 베어버렸다. 반으로 갈라진 철창은 사람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끼익 소리를 내며 휘어버린다.
“사, 살았다!”
휘어진 틈으로 사람들이 기어 나왔다. 하지만 철장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런이 휘두른 검에 밖으로 기어 나오던 사람의 목이 툭 떨어졌다.
밖으로 나오려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몸을 덜덜 떨면서 자신들을 잡아먹는 남성과 애런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죽는다. 잡아먹혀 죽을 것인가, 검에 목을 베여 죽을 것인가. 죽음의 양자택일에 사람들의 눈빛은 빛이 없는 지하실보다도 더 어두워져 갔다.
“적어도 나한테 죽는 편이 덜 고통스러울 텐데.”
그들에게 그런 배려는 필요 없었다. 그들은 그저 살아서 이 지하실을 탈출하고 싶을 뿐이었기에 애런을 쳐다보는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크워어어어!!”
그때였다. 사람들을 잡아먹던 남자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사람의 형태를 잃고, 점점 고깃덩어리에 가까워져 갔다.
[마기에 몸이 버티지 못한 거다. 아마 악마의 아이로 적합하지 않은 자들이 된 탓에 저렇게 되는 것일 테지.]
“그러냐.”
[저건 부활의 그릇으로 사용하지도 못한다. 마왕은 되지 못하고 그저 마기를 내뿜는 고깃덩어리가 되겠지.]
“...”
애런은 마왕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말셀러스가 왜, 어떻게 악마의 아이를 지하실에 가둬둔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일단 악마의 아이는 전부 죽이고… 말셀러스도 죽이러 간다.”
그리고 죽이기 전에 여기에 갇힌 자들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애런은 지하실에 갇힌 사람들의 목을 하나씩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말셀러스에게 팔려 온 노예들이었겠지만, 악마의 아이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잠깐 멈춰봐라.]
애런이 지하실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나가려는 찰나 마왕이 말했다. 지하실을 가득 채운 피 냄새에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던 애런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들에게 있는 내 힘을 흡수하겠다. 그럼 조금 더 강해질 수 있겠지.]
“누가. 네가? 아니면 내가?”
[둘 다.]
봉인되어있다고는 하나 마왕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꼽다. 하지만 마왕의 힘은 곧 애런의 힘이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걸 막지는 않았다.
“빨리 끝내.”
애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지하실에 쓰러져있는 악마의 아이들의 시체에서 마기가 스르르 흘러나와 지하실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듯 자연스럽게 애런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후우…”
처음 마기를 흡수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마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의 고통은 느껴졌다.
“끝났냐?”
[그래, 여기 있던 내 힘의 파편들은 다 흡수한 것 같군.]
그 말에 애런은 눈을 감고 몸에 흐르는 마기에 집중한다.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총량보다 많이 흡수했는지 약간 속이 메스껍고, 마기가 몸을 빠져나가려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심장에 손을 갖다 대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마기를 억눌렀다.
“이제 남은 건 말셀러스를 죽이고 들키지 않게 탈출하는 건가.”
지하실에 잠깐 있다가 나왔는데도 나뭇잎을 뚫고 오는 약한 햇빛에도 눈이 찌푸려졌다.
애런은 뺏어 입은 경비원의 옷에 피가 묻은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는 자연스럽게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에 정원에서 만난 경비원들은 애런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자들은 달랐다.
“멈춰라.”
이때까지 봐왔던 자들과는 옷차림부터 달랐다. 경비원들이 입고 있는 푸른 옷과는 달리 그들은 붉은 털옷을 입고 있었다. 애런은 자신보다 키가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에 있는 많은 흉터를 보아하니 아마 이들이 벨라가 말했던 용병 같아 보였다.
“경비원이 저택에는 왜 들어가려는 거지?”
“... 지하실에서 노예들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용병들은 애런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코웃음을 쳤다.
“그거야 늘 있던 일이잖아. 나중에 고기 덩어리가 된 녀석들이나 수거해 와.”
“그래? 다른 곳에 안 가면 어쩔 수 없고.”
애런은 마기를 담은 주먹으로 오른쪽에 서 있던 용병의 명치를 가격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기습에 용병은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너 뭐야!”
그 상태로 빙그르르 몸을 한 바퀴 돌려서 옆에 있던 용병의 머리를 발로 찬다. 퍼억! 용병은 날아가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기절했다.
“별거 아니네.”
애런은 쓰러진 용병들이 보이지 않게 치워놓고, 고급스러운 저택의 문을 두 손으로 열고 들어갔다.
“...”
넓은 저택에는 경비병과 용병으로 가득했던 밖과는 달리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없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다른 무언가는 저택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듯이 불길한 기운을 뿜어댔다.
“마기.”
악마의 아이와는 다른 마족이 뿜어내는 순수한 마기였다. 마기는 저택 안의 모든 것에 흔적을 남겼으며 잠식해서 가구나 벽을 천천히 녹여가고 있었다.
녹는 속도로 보아 애런이 저택에 온 것을 확인하고 마기를 뿜어댄 것 같았다. 대체 어떤 마족이 왜 애런에게 그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택 전체를 갉아먹고 있는 높은 수준의 마기가 저택에 있는 마족이 강한 마족임을 알게 해주었다.
“자신 있다 이거야?”
애런은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마기로 검은 갑옷을 만들어내 몸을 감쌌다. 어느 정도로 강한 마족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듯 마기는 저택 깊숙한 방에서 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애런은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마기를 따라 이동했다.
저택 복도 끝에 있는 방. 애런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방 안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있는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의 남성이 있다. 옆에는 한쪽 뿔이 반 정도 부러져있고 정장을 입고 있는 남성 악마가 무릎을 꿇고 있다.
"마왕님을 뵙습니다."
"마왕?"
애런은 자신을 마왕이라고 부른 악마에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악마는 분위기를 읽더니 땅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쾅! 쾅! 악마는 몇 번이고 땅에 머리를 박는다. 그것 정도로 고위 마족으로 보이는 이 악마에게 상처는 생기지 않지만, 애런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머리를 박을 것 같았다.
"그만하고 너 뭐야? 왜 나보고 머리 박냐?"
애런의 말에 머리를 박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한다.
"교만의 마왕 파이몬 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기 위한 이름 없는 사자입니다."
"교만의 마왕?"
"네, 그리고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교만의 마왕님은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실..?"
애런의 질문에 악마는 고개만 슬쩍 들어서 애런을 올려다보았다.
"오랜 시간 마족의 침공을 단신으로 막으며 인간계를 수호하던 용사의 죽음. 그리고 그 용사가 환생한 사실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내가 죽은 걸 알고 환생한 것까지도 알고 있다고?'
애런은 손으로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마족을 막고 있던 용사가 죽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마족이 인간계로 침공하지 않는 것인지, 왜 환생한 용사를 죽이지 않고 얘기를 해주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 내가 죽기 직전.'
그때 애런의 뇌리에는 전생의 죽기 전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백발에 양 같은 뿔을 가진 악마가 죽기 전 애런을 내려다봤었다.
'그 악마와 관련이 있는 건가? 아니, 어쩌면 그 악마가 마왕일 가능성도 있겠어.'
"마왕의 말을 전하려고 온 사자라고 했지. 어떤 내용이지?"
"네, 교만의 마왕 파이몬 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전에 말했던 대로 제가 마왕이 되었으니 순순히 저에게 협력하십시오. 그리고 환생한 용사에게 세계의 섭리에 관해 설명하시고, 협력을 구하십시오."
"..."
교만의 마왕 파이몬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애런이 전생 용사인 것도, 몸속에 마왕을 봉인하고 있다는 사실도.
"용사, 나는 인간의 적이 아니다. 그리고 네 적도 아니지. 그건 내가 천사로부터 너를 해방한 거로 증명이 가능할 테다."
"천사로부터 나를 해방해?"
애런은 그 말에 표정을 구했다. 구하기는 뭘 구했다는 말인지. 천사 놈들이 사람을 험하게 굴리기는 했지만, 마족처럼 죽이지는 않았다.
인간을 죽이기만 하는 마왕이 그런 소리를 해봤자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를 믿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힘이 부족하다. 전생처럼 마왕을 손쉽게 죽이고, 마족의 침공을 막았던 너의 힘이 필요하다. 나중에 만난다면 나와 뜻이 같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무슨 소리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마왕, 네게 설명을 들으면 좀 이해할 수 있겠냐?"
애런은 가슴을 두드리며 봉인되어있는 마왕에게 물었다.
[파이몬이 아는 것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만, 어느 정도 네게 이해 시켜 줄 수는 있겠지.]
"그러냐? 그럼 말해."
[그래, 알려주마. 악마와 천사는 알고 있지만, 인간만 모르는 세계의 섭리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