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무법지대
* * *
벨라의 성은 겉만 화려하지 않았다. 성 내부도 빨간 루비, 블루 사파이어, 에메랄드, 페리도트, 다이아몬드, 자수정… 등 여러 보석으로 꾸며진 장식장들과 화려한 보검들, 과시하듯 쌓아둔 금괴들. 어쨌든 애런이 본 건물 중에 가장 돈을 많이 쓴 것은 확실했다.
하다 하다 내부에 있는 슬리퍼마저도 비싸 보이는 것들이다. 이 정도의 사치를 부릴 만큼의 돈이 있으면서 왜 편하게 살지 않고 아직도 의뢰를 받고 다니는 건지 애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탁. 쌍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자 모형. 아니, 살아있는 사자가 얌전히 앉아서 벨라를 올려다본다. 벨라는 사자들을 쓰다듬어주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무 데나 앉아.”
그 말에 애런은 푹신해 보이는 가죽 소파에 앉았다. 벨라의 뒤편으로는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은 지금과는 달리 프릴이 달린 드레스를 입은 어린 벨라가 그려져 있는데, 인상도 지금보다 순해 보였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어? 아, 누나가 좀 이뻐서 눈이 가기는 하지.”
“오징… 아니, 평범한데요.”
반말했다가 이마에 맞았던 딱밤을 떠올리고는 급하게 말을 바꿨다. 벨라는 자신이 평범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입에 파이프로 빨아들인 연기를 뻐끔 내뱉었다.
“너 생긴 것만큼 눈이 높구나? 내가 평범하다고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야.”
벨라는 살면서 질리도록 들었던 외모에 대한 칭찬이 아닌 처음 듣는 평가에 피식 웃었다. 애런은 오징어라고 한 걸 못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돈을 벌 기회가 있다고 해서 따라오기는 했는데. 어떤 기회인가요?”
“그래, 그야말로 부자가 될 기회지.”
그렇게 말하면서 벨라는 금화로 가득 찬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안에서 들리는 소리나 내려놓을 때 들린 무직한 소리로 보아 애런의 품 속에 있는 금화 개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 같았다.
“금화 1000닢.”
확인해보라는 듯 묵직한 주머니를 애런에게 던져준다. 애런은 대충 느껴지는 무게로 확인하고는 굳이 세보지는 않았다.
“그건 선금이야. 만약 내가 개인적으로 맡기는 의뢰를 완수한다면 보수로 금화 1000닢을 더 줄게.”
“대체 어떤 일이길래 이만한 거금을 준다는 거죠?”
애런은 솔깃해하면서도 위험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금의 몸은 그렇게 강하지 않으니까 혹시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갈 생각이다. 거기다 금화 1000닢도 거의 다 모였으니, 도로시 암살 의뢰에 대한 것도 급하지 않다.
“오르도 왕국에 있는 귀족의 암살.”
애런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돈을 주면서 굳이 애런에게 맡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암살이라면 분명 벨라가 더 잘할 텐데.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 내가 암살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 귀족을 죽일 수가 없거든.”
벨라는 갑자기 상의를 벗더니 돌아서 등 뒤에 있는 문신을 보여준다. 날카로운 것으로 찢어진 듯한 흉터가 가득 남은 등에는 검은 원이 그려져 있다. 그 안에는 빼곡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리고 파랗게 칠해진 꽃 모양의 문신이 그걸 덮듯 새겨져 있었다.
“이건 내게 내려진 저주야. 이 저주 때문에 나는 그 인간의 주변에 가지도 못해.”
“그러니 대신 죽여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그렇지.”
벨라는 다시 옷을 입고 짜증 난다는 듯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친다. 쾅!! 화려하게 보석으로 장식이 되어있던 탁자는 두 동강이 나버리며 털썩 주저앉는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욕을 하면서 의자에 털썩 앉는다.
“이것만 보면 화가 나서 말이야.”
“죽여야 하는 귀족이 누구인가요?”
“말셀러스 드 디바. 내 아버지였던 사람인데, 내가 아는 건 옛날 이름이고 지금 이름은 뭔지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가요.”
아버지와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저주를 걸어놓은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별로 보기 좋지는 않았다.
“말셀러스는 오르도 왕국에 잡아먹힌 나라의 귀족이었어. 옛날부터 탐욕스러운 돼지라고 생각하며 창피하게 생각했지만, 오르도 왕국이 쳐들어왔던 날 했던 짓은 더 가관이었지.”
벨라는 담배 연기를 한 번 들이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자신이 살던 나라를 배신하고 오르도 왕국의 병사들을 안으로 들였던 거야. 그 병사들로 나라는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오르도 왕국의 일부가 되었지. 나는 조국을 팔아버린 그 인간에게 화가 나서 죽이려고 했었지만 실패했어.”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요?”
“그때는 어렸을 때니까 내가 힘이 없었지. 원래는 나를 죽이려던 것을 어머니가 막아서 이런 저주를 거는 조건으로 밖으로 내다 버린 거야. 나중에 들었는데 어머니는 결국 그놈한테 맞아 죽었다더라.”
벨라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화를 억눌렀다.
“어쨌든 나는 그 일을 잊지 않고 그놈을 죽일 날만을 기다려왔어. 그런데 내가 직접 죽이지는 못하니까 대신 죽여줄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무법지대에 있는 녀석들은 그놈을 암살할 정도의 실력이 안 되니까, 그게 가능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지.”
“저 정도면 가능하다는 얘기인가요?”
“가능하지. 그 녀석을 호위하는 녀석들의 수준은 기차에 탔던 녀석들이랑 별 다를 바가 없는 허접한 놈들뿐이고 그놈도 그냥 살진 돼지야.”
그 정도라면 꽤 쉽게 금화 2000닢을 버는 셈이다. 애런은 괜찮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거야?”
“네, 이 정도라면 해도 괜찮겠네요.”
애런은 받았던 주머니를 다시 벨라에게 던져준다.
"금화 1000닢. 확실하게 드렸어요."
"그래, 도로시 마이어 암살 건은 안 받을게."
이자벨라의 동생인 도로시의 목숨이 노려지는 것은 막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벨라는 애런에게 종이봉투를 하나 던져준다.
“이건?”
“오르도 왕국에 들어갈 때 보여줄 신분증이랑 말셀러스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정보, 그리고 기타 유의해야 할 정보가 들어 있는 봉투야. 가기 전에 확인해봐.”
“네.”
애런은 갈색의 종이봉투를 돌돌 말아서 품속에 넣는다. 벨라는 애런의 어깨 위에 매달려 있는 여우를 빤히 쳐다봤다.
“그 여우 살아있는 거 맞냐?”
아까 전부터 미동도 하지 않고 몸을 쭉 편 상태로 있는 여우. 사실 애런도 이상하리만큼 얌전하게 있다고 생각했다.
건드리려고 손을 올리자 앞발로 애런의 손을 막았다.
“살아있네요.”
“어… 그래. 안 움직이길래 인형인 줄 알았다. 걔도 좀 갖고 싶네. 팔 생각은 없냐?”
“끼잉.”
여우가 거절하듯 울었다.
*
숙소로 돌아온 애런은 벨라에게 받은 종이봉투부터 열어봤다.
“신분증… 애런.”
이름도 같다, 얼굴도 똑같다 하지만 다른 부분이 딱 하나가 있다. 그것은 나이.
현재 15살인 애런은 공식적으로는 앙겔로크라티카의 모노크롬에 있어야 하는 나이인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예외는 없으며 있다 하더라도 들키면 죄가 된다.
마왕이 부활할지도 모르는 악마의 아이가 될 수도 있으니 당연한 것이다. 갑자기 한창 가족과 같이 지내야 할 아이들을 부모와 떨어뜨리게 만든 마왕이 짜증 나서 몸 안에 봉인되어있는 마왕에게 짜증을 낸다.
“마왕이 구차하게 말이야. 죽음을 받아들였어야지.”
[그걸 환생한 네 놈이 말하는 것이냐?]
“나는 내가 환생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잖아. 누가 환생시킨 거라니까?”
물론 환생은 하고 싶었다. 다시 태어나 평범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인생은 뭐란 말인가.
몸에는 마왕이 봉인되어있고 악마의 아이라는 역십자가의 흉터가 어깨에 나 있다. 이미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튼, 마왕 탓이었다.
“너 때문에 평범하게 살려고 했던 내 계획이 망가졌다고.”
[허… 그걸 왜 내 탓을 하나? 나를 네 몸에 봉인한 것도 네 선택이었다. 거기다 억울하군. 누가 보면 내가 인간들에게 내가 부활하는 저주를 건 것으로 알겠다. 실제로 저주를 건 것은 내가 아닌데 말이다.]
“쯧…”
애런은 괜히 쓸데없는 말싸움으로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시했다. 그리고 말셀러스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건물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를 꺼내서 한 번 훑어본다.
오르도 왕국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강의 근처에 말셀러스의 저택이 있다. 꽤 넓은 땅을 자신만 이용하고 있어서 건물은 많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적다.
“마법으로 방어막이 쳐져 있어서 등록된 자가 아니라면 침입하자마자 들킨다고?”
말셀러스 저택의 위에 반구 형태의 막이 그려져 있다. 추가로 방어막 마법을 유지하기 위한 마법진이 있을 거라고 적혀있으나, 정확한 위치까지는 모르는 듯하였다.
추가로 말셀러스의 승인 없이는 마음대로 마법진 밖으로 나가지도 못 한다고 한다. 저택이면서 모노크롬처럼 사람들을 가둬두려는 것에서 수상함이 느껴졌다.
“뭔가가 있다… 안에서 도망치면 안 될 무언가가.”
신경이 쓰이지만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애런은 그리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유의할 점이 적힌 종이를 꺼냈다.
[말셀러스 암살 시 오르도 왕국에서 유의해야 할 점.
1순위로 경계해야 할 것은 오르도 왕국 내부를 지키는 경찰이다.
특히 검은 경찰복을 입은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경찰 소속 대테러 부대로 테러리스트를 제압하는 것에 능하다.
2순위로 경계해야 할 것은 말셀러스의 저택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다. 그 중에는 용병도 섞여 있겠다만 네 실력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제압이 가능할 것이다.
3순위는 말셀레스인데 지금은 살진 돼지가 되어서 별 위협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직 군인이었다.
그리고 저택에는 밖으로 도망칠 수 있는 지하 통로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그런 것도 고려해라.]
내용을 보아하니 빠르게 말셀러스만 죽이고 도망치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애런 본인에게 문제가 있었다.
“오르도 왕국에서 마기를 흘리지 않고 행동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들키지 않고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애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는 모습을 감추더라도 존재를 눈치채도록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애런은 마기를 다루는 수련을 하면서 마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억누르는 것도 전보다 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마기를 억누르는 것에만 집중하였을 때나 잘하는 것이지, 격렬한 전투 상황이 길어진다면 그 집중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수련을 할 뿐이다. 격렬한 전투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마기를 억누르는 것. 이 무법지대의 대부분의 범죄자는 애런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만 지금은 마침 좋은 상대가 있지 않은가.
“내일 다시 성에 가서 상대를 부탁해야겠네.”
현재의 애런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죽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실력자, 벨라 드 디바. 혼자서 수련을 하는 것보다 강자와 실전처럼 싸우면서 하는 것이 경험도 되고 실력도 빠르게 늘어난다.
애런은 전생에는 노력이라는 것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사는 것이 시시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들처럼 노력을 해야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은 과정으로 느껴졌고, 전생의 몸이 편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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