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15살, 사춘기
* * *
자고 일어나니 침대에 아일라가 없다. 항상 아침밥 준비가 다 되어갈 때 즈음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데 어디로 간 걸까.
“삐진 것 때문인가.”
편지라도 남겨놓고 가면 어디 탈이 나나. 혼자서 돌아다닌 적도 별로 없는 녀석이라 이제 아이도 아닌데 괜히 걱정된다.
말 정도는 하고 가라고 혼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평소와 달리 텅 빈 식탁에서 홀로 밥을 먹었다.
*
"어머, 오늘은 혼자시네요?"
여느 때와 같이 악마의 아이를 정화하기 위해 이자벨라를 따라 나왔는데, 아일라 없이 애런 혼자 온 것을 보고 이자벨라가 말했다.
“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은지 일어나니까 방에 없더라고요.”
“이런… 확실히 어제는 화난 것처럼 보였죠.”
이자벨라는 아일라의 반응이 귀여워서 놀렸지만 조금은 자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어제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났을 테니까.
“아, 모리스 님. 오늘 악마의 아이 정화는 부탁드려도 될까요?”
요즈음은 거의 애런과 아일라가 악마의 아이를 상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성기사들은 동행하고 있다. 성녀의 호위가 이유인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악마의 아이의 처리는 원래 성기사의 몫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 안 나온 아일라 때문에 그럽니까?”
“네… 아무래도 제가 화나게 해버린 모양이라서요.”
“알겠습니다. 오늘 생기는 악마의 아이는 저희가 맡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이자벨라는 성기사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애런에게 다가온다.
“자, 그럼 오늘은 화난 아일라 님을 달래기 위해 선물을 사는 데 쓰도록 하죠.”
“네? 아일라는 제가 달래면 되는데요.”
애런의 말에 이자벨라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저도 잘못했으니까 똑바로 화를 풀어줘야겠죠. 그리고 어차피 제 동생 선물을 사러 갈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모노크롬에 선물을 살만한 곳이 있나요?”
“당연히 있죠. 아직 이 모노크롬을 다 안 돌아보셨군요?”
“이 넓은 곳을 어떻게 다 돌아봐요.”
모노크롬의 규모는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도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마법으로 10배 이상의 규모가 숨겨져 있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작은 나라라고 봐도 될 정도의 규모이기에 이곳을 다 돌아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저는 성녀니까 얼굴을 한 번씩 비춰야 하기 때문에 다 돌아봤어요.”
이자벨라는 바쁘게 돌아다녔던 자신이 10살이었을 적을 떠올린다. 아직 모노크롬에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성녀라는 이유로 모노크롬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천사에 대한 믿음을 널리 퍼뜨리는 것.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은 지긋지긋하게 해왔던 성녀의 책무이기에 싫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귀찮은 일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덕에 모노크롬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으니, 이럴 때는 그런 일들도 언젠가 쓸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한테는 사과했다고 하셨죠?”
“네, 착해서 이해해주더라고요.”
동생이 자신을 위해 죽는 미래를 봐서 헤어지기 전에 정을 떼놓으려고 했던 이자벨라는 애런의 말을 듣고 다시 동생을 보러 갔었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이자벨라의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부족한 설명에도 동생은 언니를 이해해주었다.
“한 번 만나면 좋을 텐데요.”
“아쉽게도 동생이 그럴 처지가 안 돼서요. 대신 애런 님과 아일라 님에 대해서 얘기를 해줬더니 동생도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런가요?”
애런과 이자벨라가 걸음을 옮기자 중년의 성기사, 모리스가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애런, 오늘 성녀님의 호위는 맡기마!”
애런은 손을 흔들어서 답해준다.
“꽤 친해진 모양이네요.”
“그렇죠. 5년이나 계속 얼굴을 봤으니까요.”
“음~ 계획대로네요.”
“뭐가요?”
이자벨라의 말에 애런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애런 님과 저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공통점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깐 고민을 하는 애런.
“동생을 아낀다는 점인가요..?”
“네, 맞아요. 동생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갑자기 그건 왜요?”
“얼마나 좋아하려나요?”
애런은 갑자기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보니까 대답은 한다.
“뭐, 동생을 위해서라면 죽어줄 수 있는 정도겠네요.”
“그런가요? 그럼 동생을 위해서 5년간 친해진… 자신을 자식처럼 아껴주는 사람도 죽일 수 있나요?”
이자벨라의 말에 애런은 눈살을 찌푸린다.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 미안하긴 하겠지만 죽일 수 있겠죠.”
“다행이네요. 그런 일이 생기면 망설임 없이 죽이도록 해요. 동생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네…”
5년 동안 자주 들어왔던 얘기다.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얘기를 할 때마다 진지했기 때문에 애런은 흘려들은 적은 없다.
“이제 도착했네요.”
옷과 장신구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있는 사람들은 돈이 많아 보이는 소수의 귀족뿐이다.
“모노크롬에 있는 식당이나 학교는 무료잖아요? 하지만 이 거리는 아니거든요.”
“돈을 내야 하나요?”
모노크롬에 와서 돈을 받은 적은 없기에 수중에 가진 돈이 없다.
“네, 이곳은 귀족의 자제들이 요청해서 만든 귀족들을 위한 거리니까요. 대부분이 비영리로 운영되는 모노크롬의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군요. 근데 저는 돈이 하나도 없는데요.”
“제가 사드릴게요. 저 나름 돈 많거든요.”
이자벨라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자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난다.
“어디 보자… 금화 10닢 정도면 충분할까요?”
“10닢이요? 아니, 그만큼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금화 1닢만 해도 평범한 가정이 한 달 동안 부족함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거금을 아무렇지 않게 애런의 손에 쥐여주는 이자벨라.
“어차피 이 거리에서 쓰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해요. 말했잖아요? 귀족을 위한 거리라고.”
대체 귀족들은 얼마나 사치스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애런은 이자벨라가 쥐여준 금화를 받았다.
“남으면 돌려드릴게요.”
“그냥 다 쓰세요. 아일라 님한테 줄 선물이잖아요? 이왕이면 좋은 거로 사줘요.”
“으음… 감사합니다.”
거금을 받아 불편한 애런과 달리 이자벨라는 아무렇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성녀님은 왜 이렇게 돈이 많으신가요?”
“이거요? 기도해주고 받는 돈이에요. 저도 개인적으로 쓸 돈 정도는 벌어야죠.”
“허어…”
전생에 용사 시절에 애런은 돈을 벌기 위해서 남들과 똑같이 일하며 고생하며 벌었는데, 성녀는 기도를 한 번 해주고 꽤 많은 돈을 받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제 동생한테 줄 선물도 애런 님이 하나 사주면 좋겠어요. 저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받으면 좋아할 것 같네요.”
“네, 그러죠.”
이자벨라와 거리를 걷는 애런은 상상 이상으로 비싼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기서 뭐라도 사볼까요?”
이자벨라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목걸이나 팔찌, 반지 같은 액세서리를 파는 곳이었다.
“음~ 이런 선물 사는 건 언제나 해도 고민된단 말이죠.”
가게에 놓인 액세서리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는 이자벨라. 그와 달리 애런은 가격을 보며 이런 걸 사도 되는 건가 고민을 했다.
“좀 골라봐요. 아, 혹시 돈이 부족했나요?”
“아니, 아니요.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그렇게 말하고 장신구들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러는 도중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 빛을 띠고 있는 보석이 박힌 반지.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전생의 애런이 마계로 가는 길에 있는 용의 협곡에서 발견한 마석으로 만들었던 반지였다.
저 반지 하나를 팔고 여생에서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물론 대부분은 숲에 박혀 지냈기에 쓸 일이 없었던 것도 한몫하긴 했지만.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세요?”
이자벨라는 뒷짐을 지고 애런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반지를 본다.
“저런 반지가 취향인가 봐요? 아일라 님이 끼면 어울리겠는데요.”
“그래요?”
하지만 전생에 애런은 저 반지를 금화 2000닢 정도에 팔았었다. 지금 가진 돈으로 살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가격표를 보니 고작 금화 7닢이었다.
물론 7닢이 적은 돈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 가치보다는 한참 낮은 가격임은 틀림없다.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다시 봐도 전생에 애런이 만든 반지가 틀림없었다.
가치를 못 알아보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전생의 애런은 눈도 남달랐고 물건의 가치를 잘 판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걸 사려고 했던 상대는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마법사 한 명뿐이었다. 어떤 이유로 마법사가 반지를 도둑맞았거나 잃어버렸거나 해서 가치를 못 알아보는 자가 헐값에 파는 것일 수도 있다.
“저는 이걸로 살게요.”
애런은 더 망설이지 않고 그 반지를 샀다. 이 정도 마석에 마법을 부여하면 꽤 괜찮은 아티팩트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 녀석이 이미 부여해놨으려나?’
전생에 이 반지를 팔았던 마법사가 생각난다. 유일하게 이 반지의 가치를 알아봤던 마법사. 꽤 실력이 좋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걸 사고는 기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좋은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어서 기뻐했던 걸 테니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으음…”
이자벨라는 아직도 가게를 빙글빙글 돌며 고민을 하고 있다. 애런은 그동안 이자벨라의 동생에게 줄 선물도 남은 돈으로 샀다.
‘결국 깔끔하게 다 써버렸네.’
금화 10닢이면 남을 줄 알았는데, 귀족을 위한 가게의 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애런 님, 와서 좀 도와줘요. 고민이 돼서 못 고르겠어요.”
“네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이자벨라가 미리 봐둔 액세서리 중 애런이 봤을 때 괜찮아 보이는 것을 고르고 가게를 나온다.
“오늘 주신 금화 10닢 고마워요.”
이자벨라의 방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애런이 말했다.
“후후, 저야 말로요.”
애런이 없었다면 고민을 하느라 하루종일 그 가게에 있었을 텐데 덕분에 빨리 골랐다.
“그보다 성녀님은 생각보다 저랑 취향이 비슷하시네요. 그 때문에 저도 조금 고민했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자벨라가 도와달라기에 애런도 골라둔 액세서리를 봤는데 그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서로의 동생에게 무엇이 더 어울릴까 고민하다 겨우 골랐다.
“어쨌든 오늘 제 억지에 어울려줘서 고마워요.”
“아뇨, 매일 아일라랑 다니느라 이럴 기회는 없었잖아요.”
항상 아일라가 붙어 다녔기에 깜짝 선물을 줄 기회는 없었다. 같이 고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놀래켜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긴 하죠. 이건 아까 제가 골랐던 선물이에요.”
“네, 이제 가볼게요.”
이자벨라가 고른 아일라의 선물이 든 상자를 받고 애런은 깜짝 놀랄 아일라를 생각하며 웃으며 돌아간다.
“애런이 준 선물… 하여튼 은근히 센스가 좋다니까요.”
이자벨라도 애런이 골라준 도로시에게 줄 선물을 보며 웃는다. 이자벨라가 가진 펙토랄레와 비슷한 것을 선물해주면 동생도 좋아하지 않겠냐고 해서 고른 펙토랄레다.
“내가 준 선물은 좋아하려나?”
아일라에게 줄 사과의 선물. 밤 하늘과 같이 어두운 아일라의 머리카락에 어울릴 것이라 생각한 별 모양의 머리핀. 거기다 사과의 의미로 편지도 써서 넣었다.
내일은 애런 만이 아니라 아일라도 같이 하기를 바라며 이자벨라는 방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