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016. 뭔가 재연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5)
* * *
택시 안에서 사표 전송을 끝마쳤다. 휴먼굴림체로 작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소박하게나마 담아낸 진심을 원장이 알아차리길 제니퍼는 소리 없이 기도했다.
야간과 시외 할증을 더블로 받고 들뜬 택시 기사가 자꾸 주절거려서 분위기가 좀 망가지긴 했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61층 랑의 자택까지 찾아왔을 때, 현장은 교통정리가 벌써 끝난 분위기였다.
코트를 챙겨 입은 나진. 마찬가지로 사복 차림의 유. 꾸벅꾸벅 졸음을 견디고 있는 랑. 그리고 모르는 여자 둘까지.
두 사람의 독특한 공통점에 제니퍼는 잠시 멍하니 섰다. 가슴의 상태가? 연락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살인 용의자와 그 용의자의 추적조 대장이라는데, 그냥 소녀들이었다.
쭈뼛쭈뼛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제니퍼가 안녕하살법을 보냈다. 자세까지 제대로 취해서.
“아, 그래, 안녕하살법 받아치기.”
“인싸 드립인데 알아듣는 분이 한나진 씨밖에 없군요.”
알아들어도 일일이 받아줄 분위기도 아닌 것 같고. 여기 모인 여섯 사람의 계획은 제니퍼도 이동 도중에 들은 바 있다.
두 갈래로 갈라져서 움직인다고. 랑과 나진은 함께 움직이며 각각 다른 표결권자들을 설득하고 지키기로.
그러는 동안 유와 유영은 풍월검도 문중에서 정보를 빼내오기로.
“정보를 빼온다는 건, 다시 말해서 그겁니까?”
“그거 맞아. 화란이 범인이 아닌 것과 무관하게 사망자들은 풍월검도의 검술에 당해서 죽었어. 그러니 진짜 살인자는 풍월검도 내부에 있는 셈이고.”
“위장은 고려하지 않습니까?”
“풍월검도의 검술은 다른 지정능력자가 따라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받아친 것은 유영이었다.
제니퍼는 눈썹을 살며시 비틀며 생각했다.같은 존댓말 캐릭터라 컨셉이 겹치는군.동선을 따로 짜줬으면 좋겠다.
……다시 보니 별 생각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진짜 별 생각 아니었던 만큼, 그녀의 사소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진이 다음과 같이 제안했던 것이다.
“제니퍼는 여기 유유 시스터즈하고 같이 가줘.”
“그런 단체 결성한 적 없어요.”
그렇게 반발하면서도 앞으로 나서는 유. 유영도 제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예상했던 대목이다. 제니퍼의 지정능력은 팀 나진쓰가 아닌 팀 유유 시스터즈의 목적에 부합하니까.
구성원이 같은 존댓말과 상대적으로 어색한 제갈유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뭐 어쩌겠나. 봉급이 그렇게 센데. 나중에 선입금만 주장해두자.
그나저나 지금 출발할 기세다. 랑이 굳이 깨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사태가 워낙 긴급하니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아직 자기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인원이 하나 남아 있었다.
때마침 제니퍼의 배정도 끝났겠다, 화란이 어깨를 쫙 펴고 앞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나진이 간략하게 정리했다.
“아, 화란 씨는 여기 남는 걸로.”
“뭐시라?!”
쿠웅, 하고 충격 받은 화란.
하지만 나진은 잘못 말한 것도 잘못 들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부각하듯 손사래를 쳐가며 같은 지시를 반복했다.
“지정능력, 못 쓴다고 했죠?”
“가, 가르치는 건 할 수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대기하는 거죠. 저희는 어차피 서울권에서 움직일 예정이라서 틈틈이 찾아올 수 있어요.”
“그쪽들이 서울권이면 저희는 어딥니까?”
수상한 멘트를 놓치지 않고 제니퍼가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유영이 되돌려줬다.
“경남 하동, 지리산 중턱입니다.”
“선입금을 요구합니다.”
“봉급은 랑이 용돈 들어오는 다음 주 토요일에.”
“선입금.”
“……일단 절반만 먼저 내 통장에서 떼어 줄게.”
“오케이. 땡큐. 교통비는 별도입니다.”
나진은 토스를 켜서 통장 잔고를 잠깐 확인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리산 중턱은 선입금 대상이었다.
숨도 안 쉴 것처럼 정지해 있던 제니퍼는 진짜로 선입금을 선사받고 나서야 다시 활동에 들어갔다.
한편, 뜬금없는 선입금 주장을 이끌어낸 화란은…….
“누명을 제가 썼는데 여기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게 말이 돼요?!”
“말이 되네요.”
“두고 봐요! 저 혼자 뭐라도 하고 다닐 테니까!”
“제니퍼 씨, 입금 끝났으니까 이 친구 다중화면으로 상시 감시 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화란은 제니퍼의 지정능력을 보고 나서야 탈출경로가 차단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어쩔 수 없이 유영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유영은 살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언니, 미안해요, 따위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게 귀에 들어오랴.
대체로 왁자지껄 웃는 분위기였지만 제니퍼는 미묘한 불안을 감지할 수 있었다.주로 화란에게서.
다중화면도 막아내지 못하는 걸 보면 지정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확실한데, 그런 사태는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저건 말 그대로 멘탈이 작살났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나진에게 대입해보자면 그가 보는 앞에서 랑이 죽어버린다거나, 뭐 그런 식.
차라리 대놓고 아픈 티를 내면 모르겠는데, 겉으로는 밝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니 속은 더없이 썩어 문드러졌겠지. 제니퍼는 화란의 감시를 최우선에 두자고 내심 다짐했다.
그녀를 관리할 것으로 보이는 나진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두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저희는 풍월검도에 방문하는 목적이 뭡니까?”
“명목상으로는 화란을 찾고 강경파 입장을 공고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해야 되나, 수련생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는데. 맞죠?”
나진이 유영에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는 둘의 문답은 형식상으로만 보면 별 것 아닌 평서체 대화문으로 보였는데, 실상을 까발리자면 그렇지 않았다.
그걸 이미 알고 있을 유가 한숨을 푹 쉬었고, 곧 비슷하게 한탄할 운명인 제니퍼도 뻔한 대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 굳이 물어보았다.
“수련생으로 들어간다 함은, 그건 다시 말해서 저희가.”
“예.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풍월검도를 배우게 됩니다.”
출발 직전, 제니퍼는 남은 절반의 선입금을 요구했다.
다행히 랑의 12번째 통장에 200만 원 정도가 남아 있었고.
***
차량 출발로부터 30분 뒤, 랑은 뻗었다. 완전히 뻗었다.
쿨쿨 코까지 굴면서 주무시고 계신다. 보통 깊게 잠든 사람에게 누가 업어 가도 모른다고 하는데, 얘는 본인이 누굴 업어도 모를 것이다.그 정도로 한번 잠들면 깊게 잠드는 것이다.
목적지는 서울. 활동 지역과는 무관하게 결정권자들은 다 서울에 몰려 있으니까.
다만 관리국장은 세종시에 있어서 일단 통화로 쇼부를 봤다.
여기서 하나 슬픈 이야기를 꺼내들자면, 먼저 전화 걸어서 한나진 명의로 관리국장 급하게 바꿔달라니까 바로 욕먹고 전화가 끊겼다.
반면 비몽사몽한 랑이 직통 코드로 연락 거니까 곧바로 나를 알아보더란 거지.
알아본 게 아니고 재빨리 자료 찾은 게 분명하다만.돈이 무섭다 정말.
아니, 뭐, 불평불만은 이쯤 해두고.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살인극 벌어지는 건 본인도 잘 보고 있어요. 방비도 높여 놨고요.]
[머즐드독스 차기 총수께서 걱정해주시는 건 참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아 이거 원, 내가 98년도에 LA에 있을 무렵 제갈랑 양의 어머님과 맺었던 인연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데…….]
중략.
[……그런 고로, 정부인사로서 다른 입장을 내비치는 건 뭐랄까, 쪼금 곤란해요. 알고 있겠지만 초상연구원장도 그런 식으로 나가리가 됐고요? 그래서 강경파를 지원해달라! 하셔도 내가 할 말이 없다 이거죠! 저의 스탠스를 한나진 씨가 제갈랑 양에게 적절히 잘 전달해줄 거라고 믿어요!]
행정부 자리를 꿀꺽했어도 그 본질은 정치꾼. 그들 특유의 빙빙 돌려 말하기를 30분 가까이 겪은 탓에 대화 도중 머릿속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통화가 끝나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라는 전언의 겸양어법이었고.
우리가 연락할 수 있는 정치인이 여기까지라는 사실이 새삼 다행스러웠다.
……다행인가?
다행이라고 쳐두자. 다행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국무총리와 수경 사령관쯤 되면 암만 재벌 2세여도 어리다고 무시할 깜냥은 될 것 아닌가.
초상연구원장은 말이 안 통한다니까 자동 생략이고.
그러니 이제 본격적으로 면대면 대화에 나서야 하는데.
그 전에 휴게소 잠깐.
화란 생각이 나서 제니퍼에게 연락을 돌렸다. 수신음 떨어지자마자 그 너머로 유가 소리 지르는 게 들린다.
그것보다 조금 더 멀리서 유영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목소리도.유영이 버스표를 제대로 못 끊어서 30분 지연 됐댄다. 쟤 혹시 첩자 아닌가.
[첩자 시키기에는 많이 순박하고 모자랍니다.]
“유영 씨한테 안 들리는 거 맞지……?”
[분석 결과 들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떨어졌습니다.]
“아, 예.”
유영 씨 괴롭히는 건 여기까지 해두자. 유가 알아서 잘 괴롭힐 것 같고.
중요한 건 화란이다. 프라이버시 무효화의 감시 능력자가 계신 덕분에, 와이파이 없이도 어디서나 화란의 용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언급된 화란은…….
[당연히 잡니다.]
하긴, 새벽 2시인데.
[금방 자더군요. 5분만에 논렘수면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아니, 그런 분석은 아무래도 좋고.”
[그리고 자면서 울었습니다.]
…….
[알고 계시겠지만, 감청은 제 능력 바깥의 일입니다. 잠꼬대 내용은 모릅니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아.”
마음만 상하고. 듣는 쪽이든 무의식 중에 주절거린 쪽이든.
내가 조금 멍 때리는 사이 제니퍼가 이어나갔다.
[아까 말씀드려야 했는데 잊었습니다. 본인도 멘탈 성장으로 자기지정을 대오각성했으니 잘 아시겠지만, 지정능력의 변화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몰리고 몰린 끝에 최후에 가서야 약간의 변화가 생길뿐입니다. 하지만 선화란 씨는 그 강력하던 지정능력을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라고.
제니퍼는 대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져댔다.
그래서 나는 정해진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걸로 서로 상쾌해졌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제니퍼가 다른 화제를 언급할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관리국장은 뭐랍니까?]
“부정적이야.”
[정치인들은 원래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여자, 감시 감청 지정능력자 협회인지 뭔지에 소속돼 있댔지.
원래부터 재벌 2세 메이드 노릇을 하고 있던 걸 보면 이쪽 계통에 연줄이 깔려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아껴 뒀다가 나중에 써먹자.
[정부 인사들도 빠지고, 대장이 죽어서 상황 수습 안 된 변경의 늑대들도 빠지고, 결국 누구 찾아가는 겁니까?]
“나머지 전부. 동남의 수호자들하고, 지정능력자 연합, 거기에 더해서 삼성…… 인데, 삼성은 랑이 엄마 거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은 앞에 두 개만.”
[그럼 박한월 군도 만나겠군요.]
앞으로 들을 일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표결권 소유자가 둘이나 죽어버리면서 수도권 주요 팀들 전부 협회에 소집됐습니다. 박한월 군이 본인 팀 대장이니 협회 본사에 있을 거고요.]
“뭐, 생각은 해뒀어.”
딱 생각만 했다가 너무 골치 아파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대체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협회 내부의 의견 종합에 분명 새카만 칼날들이 강하게 영향을 미칠 텐데 그렇다면 한월을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뭐, 마주치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무시무시한 협박 편지를 받았단 말이다.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문장을 떠올리니 등골이 저절로 오싹해진다.
나 진짜 한월이 대검에 회 뜨이는 거 아니야?
“일단…… 내일의 고민은 내일로…….”
[진짜 내일 쯤이겠습니다만.]
“제니퍼 해밀턴 씨, 왜 자꾸 시비세요.”
[걱정돼서 그럽니다. 굳이 협회 말고도 난관이 많을 게 뻔하거든요.]
“무슨 말이야?”
[초상연구원장이 또라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아실 겁니다.]
“근데.”
[그런 초상연구원장이 커피라면…… 동남의 수호자들 대표자는 티오피입니다.]
“그거, 진짜 낡은 드립이거든.”
[저 입국할 때만 해도 최신 유행이었는데…….]
그쪽 입국 시기가 자꾸 윤곽을 드러내고 있네요.
그런 거 관심없고.
“또라이라니 어떤 식으로?”
[뭐, 보시면 압니다.]
아니 뭐, 고등급 지정능력자 중에 또라이가 한 둘인 것도 아니고…… 라고 생각한 것은 세상을 좁게 보았던 나의 오산이었고.
비로소 내가 바롱보다 미친 성품을 지닌 인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이것으로부터 조금 먼 미래의 이야기.
……2시간 후의 이야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