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016. 뭔가 재연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2)
* * *
차부터 따랐다.
인간으로 둔갑한 파계종 같은 것이었다면 차라리 속이 편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태유영은 당사자가 확실했다.
풍기는 위압의 강도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B등급, 고등급 파계종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 거유. 아니 왜 자꾸 거유야.
시선을 억지로 위로 돌린다.
유영이 방긋 웃는다. 마시던 찻물만큼이나 동양적이고 산뜻한 미소였다.
유도 미인이고 랑이도 미인(예정)이지만, 이쪽은 미녀였다. 글자 하나의 차이로 간신히 가둬둘 수 있는 우아한 자태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다도를 선보이고 있었다.
대접할 수 있었던 차가 내것이 아니라 랑이네 것이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적은요?”
“언니를, 아니 선화란을 쫓고 있습니다.”
그러…… 시겠죠. 뉴스에서도 그러고 계셨으니. 내 말은, 살인자라는 선화란을 찾는 데 왜 우리를 물고 늘어지냐는 것이다.
아니 뭐, 사건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만약 태유영이 먼저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우리끼리 탐색을 좀 벌였을 테지만.
그렇다고 태유영이 생방송중인 뉴스에서 나를 호명하고 인천까지 쫓아오길 기대한 것은 아니다.
유는 몰라도 나와 랑이는 멘탈이 유약해서 일이 급하게 돌아가면 좀, 뭐랄까…….
호로록. 다시 한 모금 차를 들이키는 유영.
다 마시면 말할 기색이었다. 얌전히 기다려주자.
그렇게 느긋한 한 모금 후.
“관리국 내부의 분열은 알고 계시리라 짐작합니다.”
“대강만 알아요. 여기 있는 전원이 힙스터라고 해야 되나. 관리국하고 커넥션이 다 끊어져서.”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도 호로록 한 모금.
………하려는데, 랑이 차를 빼앗았다.
“그만 쳐 마셔.”
돌직구.
“랑, 손님한테 그러면 못 써.”
말리는 언니.
“얘 때문에 공익이 엄마한테 혼났어.”
흥칫뿡.
싸우는 자매를 말리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다.
물론 재수 없어서 찻잔은 안 돌려줬다.
이 아파트가 보안은 철저하다지만 기자들의 집요함은 그것의 두어 배는 된다.
조만간 플래쉬 터뜨리면서 몰려들 텐데, 다도를 즐기다가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총수 예정자님께는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긴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기에 불가피 돌발 행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럼 됐어.”
누가 봐도 총수 예정자로 불러준 게 흡족한 것이다. 뭐, 진정 됐으니 아무 상관없나. 나만큼이나 자기 동생 기분을 잘 파악하는 유도 한숨만 살짝 얹었다.
“관리국 분열과 저희의 필요성이 무슨 관계인가요?”
“관리국과 완전히 무관하면서 영향력 있는, 마지막으로 선한 동기를 지닌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저희밖에 없나요.”
내가 농담처럼 툭 물으니, 유영은 비통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마치 사방팔방이 적군에 둘러 싸였는데, 지켜야 할 왕은 주색에 빠져 있고 식량은 다 떨어진 판국의 명장이 보일 법한 얼굴이었다.
근심과 무게감, 약간의 피곤함. 유영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기라도 했는지 꼿꼿하던 자세를 조금 느슨히 고쳐 앉았다.
“아시다시피 B등급 이상의 지정능력자는 어지간하면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일하거나 정부 산하의 팀에서 업무를 배정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 관리국 내분에 무관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영향력은…….”
나는 무릎에 앉은 랑을 내려 보았다.
뭐, 굳이 굴러다니는 돈덩어리가 아니어도 유는 유명 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검증된 인력이고.
근데 나는 뭐지. 나는 덤인가. 그런가.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덤인가.
“마지막으로 선한 동기를 지닌 한나진 씨가 계셨습니다.”
“아, 예. 그 부분은 약간 논쟁의 여지가 있네요.”
나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요 근래 지금까지의 인생에는 결코 없었던 수준으로 박진감 넘치는 사건들에 휘말리곤 했지만, 모든 게 선한 동기에서 비롯돼 선한 결말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갈룸 사건만 해도 나는…… 죽일 것을 죽이고 끝내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그것이 타인에게 선한 동기라고 비쳐졌을지는 모른다. 혹은 선한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받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당사자가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의 시선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영은 내게 과분한 기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돌려보낸다고 돌아가지 않겠지.
아니, 못하겠지.
이 여자는 사회 전체에서는 그럭저럭 인정받는 B등급 지정능력자이지만, 관리국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도를 열심히 배워 자세가 바르고 목소리가 낭랑할 뿐, 궁지에 몰린 것은 분명하다.
“저희가 필요한 이유는?”
“선화란은 관리국을 양분한 두 세력 중, 강경파의 거두 청풍명월 어르신을 죽였습니다. 해서 관리국 안에서는 파계종과 타협해야 한다는 화친파가 지나치게 강성해졌습니다.”
유영은 무릎 꿇은 채로 엉덩이를 살짝 틀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희는 저희의 일을 저희 안에서 해결하고자 했으나, 내부의 분열은 적과 아군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했습니다. 누가 선화란을 충동질했으며 또 누가 선화란을 돕고 적대하는지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합니다.
모든 사안에서 자유로운 시선을 가진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잠깐 정지.”
내가 손을 하나 들었다.
“사안에서 자유롭길 원한다는데 그쪽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강경파 편을 들고 계시거든요. 일단 강경파 수장인 우리 스승님이 죽었다,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화친파가 대두한 게 문제이다, 까지.”
“그렇습니다.”
“그럼 중립을 찾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영. 뭔가 내 생각과 다르게 당당하다.
“조만간 더없이 거대한 규모의 파계지점이 발생할 겁니다. 파계지점 너머의 여왕으로부터 받은 전신이니 확실합니다.”
“파계종이 우리에게 접촉을 했다?”
“소통이 가능한 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안다. 바롱도 하젠야크트도 인간과 동등한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 맞붙으면서 서로 떠들기까지 했으니 저쪽에서 이쪽으로 전신을 보내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가능한 것과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파계종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다. 나한테만 그랬던 게 아니고 외부에 공개된 지능이 있는 고위 파계종들이 다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경고하고 전신을 보냈다는 건 그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제안된 협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조만간 나타날 최대 규모의 파계지점에 맞서 싸우다 죽을 것. 이 제안을 따르는 자들은 강경파입니다.”
협박이군.
어쩌면 통보.
“화친파는?”
“적도를 기준으로 지구의 절반을 파계종들이 차지하며 인류는 극지방 인근으로 물러날 것. 이 제안을 따르는 자들은 화친파입니다.”
화친파가 잘못했네.
그런데 잘못은 잘못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것보다는 왜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 따지는 것에 의미가 있다. 지구의 절반을 타노스한다는 미친 의견에 어째서 동조하고 있는지, 어떤 논리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인지 나는 들어야만 했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듣게 되었다.
유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생했던 가장 큰 파계지점은 유럽에서 있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그 파계지점의 결과로서 유럽은 완전히 쇠퇴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유럽보다 더 단련돼 있으나 피해에서 완전히 빗겨나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두려움이, 그 공포가 모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납득했다.
모든 납득이, 모든 이해가 타당하고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일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공포가 눈앞에 들이닥치면 그딴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공포를 논할 때 진정 중요한 것은 그 공포로부터 달아날 일말의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 뿐. 그 공포에 자신을, 그리고 자신보다 중요한 것을 놓아버리고 파계종으로부터 도망쳤던 것은 나 자신의 역사이다.
그러니 지구의 절반을 내어주는 한이 있어도 살아남길 바란다는 욕망을 나는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하지 않는다.
“저희는 중립자들을 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두려움에 맞서 이미 죽은 자들을 추도하고, 앞서 나갈 자들을 응원하며, 뒤따름을 자청할 새로운 영웅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먼저 선화란의 배후세력을 알아야 합니다. 그녀를 죽이지 않되 잡아들일 자들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 거예요?”
나한테 몰아주기냐.
……그게 아니라, 유 본인이 화친파의 의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거겠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금 엇나간 질문을 던졌다.
“한월이는 어떻게 했을까?”
“그 오빠가 지금 무슨 소용이에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유는 열없는 한숨을 토한다.
“당연히 도와줬죠. 저 언니 예쁘잖아요. 그 오빠는 미소녀면 일단 다 돕고 스타트야.”
툴툴거리는 유. 그렇지만 저건 왜곡이다. 한월은 미소녀를 돕는 게 아니라 돕다 보면 전부 미소녀인 것이다.
와중에 그 미소녀도 끼어든다.
“지정자 ‘쇄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희와 함께 파계종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하셨습니다. 아울러 새카만 칼날들의 팀원 전원이 잠정적으로 팀장 쇄도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멋있는 선택이다. 지구의 절반을 내어주고 토굴 속에 고개를 처박은 채 사느니 영웅으로 죽을 각오를 짊어진다는 것이지.
그 당연한 선택을 위해서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할까. 나는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헤아리지 못하는 채로, 생각한다.
지금 유영의 편에 서면, 우리는 앞으로 열릴 파계지점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된다.
반대로 중립으로 남는다면 끝까지 중립이다. 우리는 화친파처럼 파계종에게 지구의 절반을 내놓았다는 책임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절반뿐인 세계에서 우리는 어쩌면 행복할지 모른다.
거짓말이다.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피했다는 절망감을 마주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하지 않았다는 무력감에 몸부림칠 것이다.
죽는 것은 한 순간의 고통일 텐데, 그렇다면 살아서 죽어가는 것은 영원의 고통이다.
나는 그 고통의 결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두려워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알았어요.”
후회할 선택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무덤가에 바친 꽃에 약속했다.
“그쪽 편 설게요. 뭐부터 하면 돼요?”
그 말을 듣자마자 유영이 밝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고, 자기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그 광경을 현장에서 목격한 랑이 갑자기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묵살되었다.
“저는 단독으로 선화란의 배후를 추적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동조세력으로 추정되는 자들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후자의 업무를 맡아 나눠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략적인 정리 문서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전화번호 부탁드립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유영. 아직 누가 팀장인지 혹은 대표인지 못 정해서 셋이 전부 줬다.
감사하게 받아든 유영은 손까지 흔들며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지정능력으로 감추어둔 듯한 칼날이 허리춤에서 달빛을 받아 무색으로 반짝거렸다.
“당분간 바쁘겠네요.”
“일도 많겠고.”
“나는 항상 많았어.”
다소 처진 분위기의 랑. 어쩔 수 없이 손까지 붙잡아줬다.
산책이라도 하면서 더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도 서류가 제법 많다. 몇 시간은 더 투자해서 내용들을 파악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바빠질 테니까.
……라고 생각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돌아오자마자 업무 하나가 줄긴 했다.
우리 업무 말고.
“참 나, 이제 오면 어떡해요?”
유영의 업무가.
거실 중앙의 탁상에 앉아, 유영보다 더 큰 가슴의 소녀가 유영에게서 빼앗았던 차를 대신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방바닥에 흐물흐물하게 녹아든 것처럼 편안히, 반쯤 누워 우리를 보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선화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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