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94화 (94/112)

〈 94화 〉 016. 뭔가 재연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 *

이상한 기분이다.

한월이와 다투고, 그 과정에서 갈룸이 죽었다. 이후 나와 유, 그리고 랑이 팀을 결성했다.막 서류를 넣고 우리들의 거처(랑 소유의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밥을 차려먹는다.

이름 미정의 팀 발족식을 축하하며 유가 제안한 삼겹살 파티. 언제나처럼 랑이 무릎 위에 올라와서 쌈을 대신 싸 달라고 하고, 혼자 좀 먹으라고 내려놓고, 다시 올라오고 무한 반복.

결국 포기해서 올려놓고 먹으려는데.

이상한 기분이다.

쌈을 싸던 손길이 천천히 느려졌다.

“공익, 왜 그래?”

“나 미친 소리 좀 해도 될까.”

“자주 했잖아.”

랑이 뱃살을 쿡쿡 찌르며 놀려먹는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꿀밤으로 응징했을 텐데 그럴 생각이 안 든다.

여전히 이상한 기분이야. 뭐라고 하면 좋을까.

뭔가, 뭔가…….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결말까지 다 봤는데,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고 있는 듯한 기분?”

“오빠 감기 덜 나았어요?”

“아냐. 내 말 들어봐. 며칠 전까지 19년도 겨울이었는데 지금 막 21년도 여름이고,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뭐지? 이 기시감?”

이것도 파계종의 영향인가?

파계종?

파계종이라는 말도 왜 이렇게 낯설지? 뭐지? 이 수습할 수 없는 고유명사는? 자기과시?

?

자기과시라는 드립은 왜 이렇게 낡은 느낌이지? 신선해야 하는데?

게다가 이런저런 떡밥들도 자세히 기억 안 나고, 뭔가 막 탑에 올랐다가 내려왔다가 이것저것 하다가 다 안 되서 지금 이 현장에 돌아왔다는 절망적인 기분이다.

대체 이 감각들은 뭐지?

아무것도 납득하지 못한 채로 허우적거리는데 랑이 쌈을 재촉한다.

그래, 얘 밥은 먹여야지. 계속 입 안에 쌈을 골인시키면서 중간중간 나도 하나씩 먹는다.

삼겹살은 맛있다. 맛있어.

멍한 기분이지만. 아무튼.

“그래서요?”

공기밥을 반 정도 비운 유가 운을 뗐다.

“우리 이제부터 뭐하죠?”

“그러게.”

B등급 2명에 현직 재벌 총수 후계자도 있겠다, 조합은 신선하고 강력한데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유의 증언을 통해 관리국에 모종의 내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게 됐지만 정말 거기까지. 이미 정부쪽에서 떨어져 나왔으니 이 이상의 정보는 없다.

“랑아, 무슨 소식 없어?”

“런던 사건 뒷수습이 바빠서 관리국 개입 안 하기로 결정했어.”

그렇단 말이지.

아니 뭐, 일이 없으면 나도 좋고 랑이도 좋고 유도 좋다.

좋다지만, 진짜로 일이 없어서 없는 것과 몰라서 그냥 손 놓고 얼 타는 것은 다르다.우리가 여기서 삼겹살 까먹는 동안에도 한월이를 비롯한 기타 세력들이 물밑 작업에 들어간 게 뻔하다.

근데 그 작업이라는 것도 아주 소름끼치는 작업일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편지 때문이라고오오.

뭔데. 왜 위에 쓴 내용들 박박 지우고 보낸 건데. 왜 용지 안 갈고 알아보지만 못하게 만들어서 단문으로 축약한 뒤에 보낸 건데.왜 이런 무서운 협박을 내던진 건데! 한월이 너 진짜!

……라고 해봤자 못 이긴다.

나도 이래저래 성장하고 있지만 한월이 속도는 못 따라간다.다음에 맞붙으면 저번처럼 그저 버티는 전략조차 안 먹힐지 모른다.

“아, 일단 지정자들 의뢰 수주 사이트에 공고는 띄워 놨어요. B등급 둘에 물주가 하나 붙어 있다고 했으니까 금방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유는 텔레비전을 켠다. 소식통이 줄어들면서 생긴 버릇이다.

그래봤자 뭐, 밑에서 움직이는 인간들이 티를 내는 일은 거의 없어서 뉴스에 보도되는 사안들 중에는 관리국의 내분을 설명해줄 만한 소재가 없었다.

없었는데…….

­방금 새로 들어온 소식입니다.

­지정능력 관리국이 계파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분리 선언을 했습니다. 정부기관이었던 관리국이 준정부기관으로 변경되는 등의 밀실회동이 펼쳐진 가운데 여야 지도부 모두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주장만을 일관적으로 내세웠습니다.

“어, 진짜 뭐 벌어지는 거 아냐?”

“으악 미치겠네요.”

베개를 껴안은 채 소파에 누운 유가 허벅다리로 쿠션만 팡팡 내리쳤다.

우리 둘이야 이러고 있다지만 랑은 긴급하게 울리는 휴대폰을 들고 안방으로 달려가 버렸다.

분명 엄마 전화였다. 기업 관련인가.

내가 개입할 사안은 아닌데…….

­한편 기존 관리국의 지도부에 속하던 A등급 지정능력자 ‘선화란’이 같은 소속의 S등급 지정능력자 ‘청풍명월’을 살해했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계파 갈등으로 인한 불만이 폭발한 것은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저쪽도 난리가 아니네요.”

“그러게.”

선화란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지만 청풍명월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다.

지정능력을 기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한의학자 출신의 지정능력자로, 많은 지정능력자들의 스승이기도 했다.

지정능력 이름 앞에 ‘풍월검도:’ 라는 분류명이 붙으면 전부 저 사람의 제자이거나 제자의 제자이다.

­한편 선화란은 청풍명월의 직계제자로서 이름을 알리기도 했는데요.

“제자가 스승을 죽였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마찬가지로 청풍명월의 제자였던 A등급 지정능력자 ‘태유영’은 이번 사건 이후 도주한 채 발견되지 않는 선화란에 대해 관리국 차원의 지명수배를 요청했습니다.

“그래도 금방 잡히겠네요. 관리국이 갈라졌어도 살인마를 내버려 둘 정도로 맹탕은 아니고요.”

“그러겠지?”

그 정도의 일인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고, 시시콜콜한 대화나 오가는 사이.

­또한 태유영은 머즐드독스에 대한 지원을 요청함과 동시에,

시간이.

곧 정지할 것처럼 느려졌다가.

­B등급 지정능력자 한나진이 속한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지정능력자 팀에 도움을 구할 것을 천명했습니다.

벌컥.

문을 연 랑.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소파에 있던 나와 유를 발견. 곧바로 허겁지겁 내게 달려든다.

달려드는 건 좋은데, 발이 걸려서 내 품까지 다이브해버리고 말았다.

아픈 것에 예민한 녀석이라 평소 같았으면 칭얼거렸을 텐데, 랑은 입을 꾹 다물고 휴대폰만 내밀었다.

고개를 억지로 끌어당기니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랑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다가, 할 수 있는 한 직관적으로 정리했다.

“엄마가 공익 바꾸래. 우리 큰일 났어.”

***

세상에는 내가 싫어하는 일들이 있고 좋아하는 일들이 있다.

좋아하는 일부터 생각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일부터 말하자면 1순위는 랑이하고 티키타카하는 거고, 2순위는 부풀린 랑의 볼을 꾹 눌러서 바람을 빼내는 것이며 3순위는 랑이를 어부바……….

그만.

본제로 돌아와 싫어하는 일들을 나열하겠다.

1순위는 머즐드독스 현직 총수 제갈무 씨와 대화하는 것이고, 2순위는 랑이네 어머님과 대화하는 것이고, 3순위는 랑이 경호직을 맡고 있는 내가 최고위 상사와 대화하는 것이다.

오늘은 좋아하는 일들을 많이 했으니 싫어하는 일도 할 시간이다.

이건 의무방어전이다. 의무방어전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아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도 없지만 밤에 후회의 이불킥은 날리지 않는 정도는 된다.

랑이네 어머님은 기업인이라서 남한테 지시를 내릴 때, 혹은 뭔가를 물어서 빼낼 때 먹이를 노리는 수리부엉이의 발길처럼 직관적이고 혼을 쏙 빼놓는 어법을 구사한다.

가령, “태유영은 우리 나진 씨가 어떻게 알까?” 혹은 “우리 딸내미들 관리국 고래등 사이에 고래밥 꼴 되고 있네?” 아니면 “새우 씨는 뭐하고 있을까아?”

흐아학. 새우 죽어욧.

근데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

진짜 몰라요.

아까도 말했지만 태유영의 스승이라는 청풍명월은 안다.

근데 이건 내가 그 사람을 유명인의 하나로서 안다는 뜻이지 그 사람이 나의 존재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죽었다고 하니 앞으로도 알 일은 없을 것이다. 딱 그 정도의 관계(이게 관계라고 불릴 만하다면)였다.

그렇다 보니 지명도가 더 떨어지는 그 제자들이야 알 턱이 있겠냐고.

일단 우리나라에 태 씨가 있다는 게 레전드다.

내 감상은 그것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전해도 랑이 어머님은 믿어줄 기미가 없다.

아무래도 랑이가 사업 보고를 받는 데 전념하는 동안 군수업체로서 관리국의 고래싸움에 혹등고래로서 참전한 사람은 이분인 것 같은데, 아마 태유영의 돌발발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와중에 내 휴대폰은 ‘뉴스에 네 이름이 왜 나와’라는 동기, 선배 후배 동창 기타 등등의 문자가 쏟아지고 있다.

나 진짜 유명인인가 이제. 미치겠네. 얼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답장을 써줘야 하는데 전화 상대가 랑이 어머님이다.

톡 치다가 말이라도 헛 나오면 어후.

결국 모른다는 답변과 죄송하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며 전화부터 종료.

무릎에 앉아서 숨죽이고 대화 내용을 듣고 있던 랑은 자기 휴대폰을 받아들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꺼지지 않는 진동 모드는 그냥 두기로 했다.

그대로 유에게 접근.

유는 벌써부터 태유영을 검색하고 있다.

“A등급이라서 정보가 꽤 있네요.”

“그나마 다행이네. 근데 너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냐.”

“한월 오빠하고 한 3개월 정도 같이 팀 해봐요. 이건 지금 아무 사태도 아니에요.”

그렇지. 그쪽에서 벌어지는 사건 스케일들은 길앞잡이 생활하면서 곁에서 지켜본 내가 제일 잘 알지.

근데 한월이는 진짜 이러고 어떻게 살았지. 뉴스에 이름 한번 스쳐지나가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새카만 칼날들 팀은 거의 일주일 주기로 신문 대면에 실렸다.역시 지정능력은 멘탈인가.

이쪽이 멘탈 걱정을 하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태유영의 신상을 하나하나 읊기 시작하는 유.

이제 스물 하나, 여자, 알려진 대로 청풍명월의 제자이자 풍월검도에 속하는 지정능력을 거의 마스터.

착실하게 A등급까지 올리긴 했지만 개별적인 팀은 움직이지 않고 관리국에서 지시한 현장업무에만 출동. 기타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거유네.

이건 차마 입으로 말 못하겠다. 브리핑하는 유 또한 어째서인지 언급을 피하고 있다.

하지만 거유이다. 한 사람을 설명하는 데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거유이다. 엄청 크다.

나도 남의 가슴 얘기를 줄줄 이어나가고 싶지는 않지만 이 사람을 알아보려면 역시 가슴이 답이구나 싶을 정도로 커다랗다.

동양인이 저 사이즈가 되나? 폴트, 아니 제니퍼 씨가 완패하는데?

잠시 유의 눈치를 확인. 랑의 눈치도 확인.

아앗…….

아앗 아앗……….

역시 내가 먼저 말하지는 말자.

“어쨌거나 접선은 올 거예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건 위치도 파악했다는 뜻이겠죠.”

“그건 그렇겠지.”

A등급 지정능력자들 중에 허술한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멘탈도 막강하고 실력도 출중한데 머리까지 빠르게 돌아가니까 파계종과의 싸움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니 태유영의 행동은 돌발적인 행동이되, 무분별한 행동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해석하고 또 대응하냐는 건데…….”

태유영의 목적은 우리 쪽에서도 해석할 자원이 있다.

다만 그에 대한 방침은 미정이다. 우리들은 특별히 선의 세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의 세력도 아니라서, 문제없이 도와줄 만한 사람은 적당한 보상만 받아두고 도와주고 싶다.

그런 팀이다.

“근데 그거, 좀 어려운 일이겠네요.”

“무슨 말이야?”

“이거, 기사 시간 좀 보세요. 발표난 지 두어 시간 됐거든요. 관리국 본부가 서울에 있고, 그러니까 거기서 근무하는 지정능력자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생활할 건데, 지금 우리가 인천이니까 시간상으로 보면 정말 알맞게도…….”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고오급 아파트 특유의 홈컨트롤러 현관 카메라에는 그 거유 소녀가 서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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