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89화 (89/112)

〈 89화 〉 014. 두 마리의 자라 (7)

* * *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헬리콥터는 택시와 속도를 맞추어 나란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유의 지시에 따르자면, 나는 이제부터 조종간을 앞으로 꺾은 뒤 고도 레버를 조작해 지면을 헬기 자체로 내리쳐야 한다.

자기지정을 발동해 추락의 피해를 막아내고 한월이 달리기 이전에 갈룸을 죽인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고속도로는 한산했지만 드문드문 이 사태와 무관한 차량들이 스쳐 지나가곤 했다.

언제 어느 타이밍에 그것들이 튀어나오고, 만일 튀어나오면 어떻게 피해를 최소화할지 알기는 어렵다. 나는 유와 달리 헬리콥터 기술자가 아니었다.

파계종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다.뉴스에는 통계로 나타나지만, 현장에서는 피나 내장으로 나타난다.

도로를 질주하는 택시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파계종이 파계종인지, 아니면 조만간 지상을 내리꽂으며 도로를 박살 낼 헬기가 파계종인지 알 수 없었다.

만일 둘 다 파계종이라 해도 어느 쪽이 더 큰 파계종인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오늘 저녁 무렵에 내 휴대폰으로 한월이와 통화를 나누었다.

번호는 다시 내게 있고,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이대로 그냥 말없이 헬리콥터를 내리꽂고 갈룸을 죽이거나.

대화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거나.

길게 고민할 사안은 아니었다. 나는 조종간을 붙잡았다.

유가 가르쳐준 ‘완벽하게 추락하는 방법’을 실행할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그대로 막무가내로 조종간을 내리 꽂기 직전, 세계를 뒤덮은 바람 사이로 거짓말같이 전화벨이 울렸다.

***

­형, 저예요.

­의도를 모르겠네

­네?

­아니, 그냥. 이해가 안 가서. 나였다면 그냥 빨리 튀어나오려고 했을 텐데. 뭐, 혼자 나올 수 있는 신세가 아니라지만 갈룸이야 네가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잖아. 너는 그냥…… 목표대로 하면 되는 거라고

­감정적이신데요.

­어, 지금 좀 감정적이야.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게 어떻게 안 된다. 내가 지금,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면 내가 너를 설득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돼. 너는 아주 통제를 벗어난 것 같애. 내가 예상을 할 수가 없어. 예상이 안 되는데 어떻게 설득을 하냐.

­아하하…….

­전화는 왜 했냐?

­이것저것이요.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고.

­얼른 해. 시간 없다.

­아, 네. 그러면 뭐지, 그, 갈룸 말인데요, 죽고 싶지 않대요.

­뭐라고?

­본인이 죽고 싶지 않대요. 살고 싶다고…… 그렇지만 자기 어깨 위에 쌓인 짐들이 너무 무겁고, 그걸 전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죽는 걸로 갚고 싶었다고 그렇게 바랐나봐요.

­그게 무슨 개같은…… 아니, 됐어. 갈룸 좀 바꿔줘.

­너, 이거 어린애 구워삶아서 네 편의대로 끌고 가는 거야.

­그건 형이 하시던 일이잖아요. 어린애가 죽으러가겠다는데 우리한테 이득이 되니까 그렇게 하자고 하시는 거라고요.

­이득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아이 말이 합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야! 그 아이는 하젠야크트의 일종이야! 내가 개인적으로 그 아이를 탓할 마음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함께 사람들을 죽인 파계종이 죽어 없어지는 게 옳은 일이야! 넌 그 사람들을 설득해낼 수 있어? 모두 납득시킬 수 있어?

­노력해야죠. 잘못했다고 고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고, 그래서 내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할 거예요.

­노력만으로 모든 게 되지는 않잖아! 지금도 그래! 네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너희 팀은 갈라졌고, 우리는 이렇게 싸우고 있어! 싸우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싸우게 됐어! 어쩌면 노력했기 때문에 싸운 걸지도 모르고!

­알아요. 모든 걸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런 남들의 사정 때문에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죽게 두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이건 제 바람이고, 소원이니까.

­미치겠네.

­용서해 주세요.

­진짜로 살고 싶대?

­네.

­아니, 무슨, 그러면 이거 하나만 좀 전해줘.

­말씀하세요. 어차피 수화기 너머로 대강 들리니까…….

­그래? 그러면 뭐냐, 나 참 무슨 영상편지 같네. 아무튼 들린다니까. 야, 네가 진짜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네가 바라는 네 모습으로서 살아가고 싶다면 할 수 있는 걸 다 해.

­여기까지?

­아니, 더. 그 있잖아, 노력을 하는 것도 좋고 나는 살길 바라는 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네 편을 못 들어준다. 나는 네가 저지르는 모든 걸 허용하지는 않아. 네가 정말 떳떳하게 살고 싶다면, 떳떳하게 너를 죽이러 오는 나에게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할 거다. 자, 여기까지.

­잔혹하시네요.

­반응은 어때?

­어깨를 움츠렸어요. 제 눈치를 보고 있고요.

­그 이상은?

­그 이상은 없도록 제가 말려야죠. 제가 곁에 있다고 안심시켜주고, 누가 널 죽이러 찾아오더라도 내가 함께 막아주겠다고 말해주고.

­멋지네. 나도 너처럼 멋있는 놈이 되고 싶었다.

­키는 형이 더 크시잖아요.

­인마, 남자는 170만 넘기면 그때부터는 얼굴이야.

­아하하…….

­웃지 말고.

­네.

­…….

­…….

­…….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뭐가?

­싸우실 거예요?

­그러려고 노력 중이야.

­헬기를 내리 꽂으시려는 거죠?

­어, 일단은. 그게 내가 너흴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본인이 아신다니 다행이지만, 이제부터 택시에서 함부로 나올 생각은 하지 마라. 문 열리는 순간 바로 추락해버린다.

­당연하죠. 저희끼리야 달려서 도망치면 된다지만, 뒤따라오던 차들은 제가 방패를 만들지 못하면…… 끔찍할 테니까요.

­이 지점에서는 너하고 내가 코드가 맞아서 다행이다. 나였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택시 타고 오지 않았을 테지만.

­아하하.

­그래서 여기까지냐?

­네?

­여쭤보고 싶은 거 있다며.

­아.

­대강 짐작이 가는데, 얼른 물어봐. 어차피 서울까지 가려면 좀 남았잖아?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그러면, 네.

­응.

­제가 형에게 뭔가, 잘못을 저질렀나요?

­아니.

­엇, 너무 빨리 부정하시는데.

­그렇지만 그런 일이 없잖아. 너는 말이지, 좋은 녀석이었어. 길앞잡이들 하나하나 챙겨주는 고등급은 없었는데 네 덕분에 목숨을 건진 횟수만 대여섯이 넘어서고. 특별히 뭐 서로 싸운 일도 없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네가 잘못한 건 없고.

­그렇다면 대체 왜──

­다만.

­…….

­다만 원망하는 일이라면 있어.

­원망.

­그래, 원망.

­들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들을 수 있지. 왜냐하면 듣지 못하면 알지 못할 테니까. 기억에도 없는 일이라면 들려주지 않을 수가 없어.

­네.

­내 여자친구가 죽었다.

­…….

­1년 반 정도 전의 일이야. 내가 막 길앞잡이 노릇을 처음 시작할 때 일이고, 사실 시기만 겹친다 뿐이지 길앞잡이로서 활동한 것과는 별 관련도 없어. 걔는 서울 살았거든. 너도 알지만 내가 대학을 서울에서 다녔잖아? 같은 대학에서 만난 여자였는데, 응, 이것도 사실 특별한 게 없어. 진짜 평범한 여자였어. 특별한 힘이 있는 것도 특출나게 유복하거나 암울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중견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신 샐러리맨에 어머니는 학습지 돌리는 부업을 하시는 전업주부. 여자친구 당사자는 좀 많이 웃는 버릇을 빼면 뭐랄까, 다른 특징이 없네.

­네.

­어떤 건지 알겠지? 나는 그러니까, 흔한 사람인 거야. 파계종과 인류의 사투극 속에서 서사를 결정짓는 중요인물이 아니었던 거라고. 우리는 그냥 사태가 터지면 도망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래서 각자 하나씩 했어.

­하나씩.

­그래, 하나씩. 평범하게 도망치고 평범하게 죽었다. 네가 그 날 자체를 기억할까? A등급 파계종이 부천 쪽에 나타나서 부평까지 사선으로 내려오던 날 있잖아. 그날 너희 팀이 그 파계종을 막으러 나갔는데, 막상 그 근방에서 데이트를 하던 나와 내 여자친구 앞에 C등급 파계종이 몇 십 마리씩이나 나타났어. 기억해?

­죄송해요. 모르겠어요.

­괜찮아. 나도 바롱이나 겨우 기억하고 다니지, D등급 잡은 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다니진 않았어.

­……말씀하세요.

­그래, 뭐야, 어디까지 했지? 아, 그렇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어떻게, 그때 클로도 없었지만 겨우 맞서 싸우려고 했어. 일단 나도 미약하게나마 지정능력이 있으니까. 목숨을 걸면 D등급 한 마리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시절이었지. 그렇지만 너무 무서웠던 거야. C등급 수십 마리가, 아마 스치고 지나가도 내 머리통을 날려버릴 수 있을 텐데, 그것들이 잔뜩 나타나서. 신고를 해도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어. A등급은 A등급을 막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D등급은 C등급에게서 도망쳤고. 그뿐이야.

­그렇다는 건.

­지금 너를 탓하고 있는 내가 우습다는 거지.

­아뇨, 우습다고는…….

­아니, 우스워.

­……….

­그렇잖아. 말 그대로 네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너는 네가 바라는 걸 했을 뿐이야. 멋진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너는 늘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길 바랐으니까, 많은 사람들을 위해 A등급 파계종과 맞서 싸워야만 했지. 모든 장면에 영웅이 등장할 수는 없고, 내 장면은 편집됐을 뿐이야.

­저는.

­저는, 하고 말하지 마. 나는, 하고 말해.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것 없어.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너를 낮추지 말고 허리를 꼿꼿이 펴서 나한테 따져줘. 대체 왜 지랄이야, 하고. 네가 쫄보라서 여자친구까지 버리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는데 시민들을 살린 나한테는 왜 지랄이야, 하고. 제발 그렇게 좀 물어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원망하는 걸 따져졌으면 좋겠어. 만일 한번이라도 네가 나를 따져주면, 그러면 나는 비로소…… 너를 왜 원망할 수 있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것 같거든. 따져줄 수 있겠어?

­따지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정 바라신다면 물어드리는 건 할 수 있어요. 형, 왜 저를 원망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네가 모두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지껄였으니까.

­……….

­이런 소릴 지껄이는 게 웃긴 일이라는 거 알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두 가지로 좁히고 살아왔어! 살기 위해 도망친 나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아니면 전부 잊어버리거나! 네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다른 누군가를 증오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있었어.

그래. 스스로를 다독였다고. 이건 남의 탓이 아니라 저절로 벌어진 일이야, 라면서ㅡ 빗물이 아래로 떨어지고 나뭇잎이 가을에 붉어지는 것처럼 알아서 흘러갈 일이었다고. 세상에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고, 누군가는 불행해져 다른 이의 행복을 돋보이게 해줘야만 한다고.

그런데 너는 뭐라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야, 나를 좀 봐. 나를 좀 보라고! 만일에라도 말이지, 만일에라도 네가 정말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다른 모든 이에게 그 바람을 인정받길 원한다면, 그래서 결국 이뤄낼 수 있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불행에 떨어진 어떤 사람들을 대신해 내가 너를 원망해줄게.

­형, 제 말이 형에게 상처를 입혔어요. 죄송해요. 사과할게요. 그 부분은 제가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 그러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원망한다는 건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기다리는 거니까. 널 막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바보 같다. 슬슬 보이냐?

­네? 보인다뇨?

­창문 바깥 말이야.

­아뇨, 지금 차가 갑자기 엄청 흔들려서요. 잠시만요. 무슨? 어?

­헬기, 보이냐고.

­보였…… 어요. 지금, 도로 바깥에 있었던 것 같은데. 추락해서.

­그래. 추락시켰다. 도로 바깥에.

­형?

­생각을 해보니까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네가 뭘 하든지 내가 무슨 상관이냐. 원망할 뿐인 내가. 헬기로 도로를 내리 꽂는다느니 하는 그런 미친 작전 하고 벌이고 싶은 마음 싹 사라졌고, 이제 여기까지 하련다. 네가 살린다고 했으니까 갈룸 꼭 살려라.

­좀 갑작스러워서, 고맙다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고맙기는, 무슨. 아무튼 슬슬 갈룸 안고 뛰시지 그래? 벌써 뛰고 있냐?

­아뇨, 이제 나가려고요. 형, 여자친구 분에 관해서는 제가 나중에 제대로 사과드릴게요.

갈룸도 최선을 다해서 지킬 수 있도록 할 거구요. 죄송하고 또 고마워요.

­아냐, 뭘. 그런데 뭐냐, 다시 말하는 거지만 난 진짜 네 의도를 모르겠다. 순수한 건지 아니면 따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네?

“이걸 믿어주나 싶어서.”

클로가 차체의 상단부를 파고 들었다.

강철을 찢어발기며, 바람이 사방을 휘몰아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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