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014. 두 마리의 자라 (6)
* * *
한월은 창문을 닫았다.
헬리콥터는 계속해서 따라붙고 있었다. 좀전의 거친 착륙으로 인해 랜딩기어가 다소 손상을 입었으나 저절로 떨어질 기색은 없었다.
한월은 늘 갖고 다니는 대검에 위압을 휘둘러 강검을 형성할 수 있다.
강검을 두른 대검으로 다시 검기를 쏘아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군용 헬리콥터조차 가뿐히 양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월은 지금 대검을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헬리콥터에 남아있는 위압은 희미했다.불안정하고 넘실거리는 유백색 위압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즉, 지금 헬리콥터에는 유가 없었다. 한월이 검기를 쏘아 보내면 그것은 나진을 그대로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한월은 유를 통해 나진에게 어떤 힘이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고등급 파계종이 입히는 피해조차 거의 무효화해서, 오로지 버티는 것만큼은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월은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나진이 상시 그 능력을 전개하고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한월은 나진이 바롱의 염동력을 견뎠을지라도 자신의 검기까지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월은 대검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리며 회전익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택시운전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내릴게요.”
운전사는 그간 모아놓은 숨을 터뜨리듯 후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러나 이곳은 아직 고속도로였으므로 당장 손님을 내려줄 수 없었다. 운전수는 최선을 다해 갓길로 차를 몰기 시작했고, 한월은 그러기도 전에 내릴 채비를 마쳤다.
“갓길로 안 가셔도 돼요. 얘만 들면 내릴 수 있으니까, 잠시만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행동이지만 한월에게는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그는 위압을 모아 방패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갈룸을 들고 내려야 한다는 것인데, 그녀까지 방패를 형성해주려면 자세를 잘 잡아야 했다.
한월은 갈룸을 안아 올리기 위해 손을 뻗었고─ 갈룸은 눈을 떴다.
“내리지 않을 것이니라.”
한월이 눈을 깜빡거렸다.
언제부터? 하고 물으려던 찰나에 갈룸은 스스로 말해줬다.
“그대가 포기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아.”
한월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한월은 지금 투항을 하기 위해 내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정 반대다. 아까 재인이 뛰어내릴 때 저쪽에서는 조종사가 따라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 이후에는 아마 유가 조종했을 것이다. 가정 사정으로 헬기까지 몰아봐야 했다느니 하는 얘기를 자주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헬기 안에는 나진밖에 없다. 그는 군대를 나온 일도 없고 헬기와 인연이 닿았을 가능성도 적다.
따라서 지금 헬기는 외부에서 무선으로 조종되고 있거나, 혹은 세팅된 경로 그대로 따라오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한월은 예상된 경로 바깥으로 벗어나야 했다. 헬리콥터의 정확한 속력이야 모른다.
그러나 가속하는 갈룸을 안고 달리더라도 한월은 자동차보다는 느리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해볼 때까지 해보자는 의미에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한월은 내릴 태세를 갖추었다.
“그래. 그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 포기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갈룸은 단단히, 시트에 엉덩이를 박고 앉았다.
“짐은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갈룸, 우리끼리 투닥거릴 때가 아니야.”
“왜 짐과 그대가 우리 안에 속한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를 살리려고 하니까.”
“짐은 살길 바라지 않으니라!”
갈룸이 소리쳤다.
“삶을 구하고자 짐승처럼 목숨을 이어나갔을 것이었다면 그대에게서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을 갖고 짐 자신으로서 살고자 짐 스스로를 잘라내려고 했다!”
“널 잘라내지 않더라도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어.”
“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냐?”
갈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베를린이 완전히 무너졌다.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우는 것은 희망을 품고 갈망하는 것인데, 희망도 갈망도 짐이 짐의 수족과 더불어 앗아갔으니 어떤 아이도 울지 않았다.
전쟁터와 살육의 현장에 짐이 있었고, 수족들이 따라 다녔다! 네 마리의 토끼가 광란을 벌이고 어린아이는 울음을 잊어버리는데 왜 네놈이 나를 지켜준다느니 살게 해준다느니 지껄이는 것이냐!
용서는 네깟 놈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한바탕 말을 토해낸 갈룸이 헥헥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몸 안쪽이 뜨거워져 죽어버릴 것 같았다.
갈룸은 지금의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갈룸은 슬픔이나 비탄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었으나 경험으로 알아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래서 갈룸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하나 알지 못했다.
아무리 분노하고 실증내고, 슬퍼해서 이성을 잃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하나 알 수 있을 터였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거나 핏대가 부풀어오르거나, 입술이 찢어지듯 아프거나…… 그래서 갈룸은 한월이 자신의 눈가에 손가락을 대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한월이 물었다.
“그런데 왜 네가 울고 있는 거냐고.”
한월이 물었다.
“희망하고 갈망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거라며. 바라는 게 있으니까,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을 흘리는 거잖아. 왜 남들이 울지 못하는 건 알면서 너 스스로가 우는 건 모르는 거야?”
“이건, 이건…… 아니다!”
갈룸이 한월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자신의 작은 손으로 눈물을 모조리 닦아냈다.
그러나 닦아내는 만큼 다시 다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게 몸인가. 갈룸은 몸이라는 것이 갑갑해 미칠 것 같았다.
갈룸은 말했다.
“이건, 다르다. 짐의 눈물과 너희 눈물은 다른 것이다. 설령 같다고 해도 이것은 짐이 살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면 왜 눈물을 흘리는 건데?”
그 말에 갈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그녀가 한월에게 맞서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고, 그 방법을 통해 쌓은 죄를 청산하고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려 할 때마다 갈룸은 지독한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갈룸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두렵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혼자서 해낼 수 없는 일 앞에 무릎 꿇고 싶다고 생각하며 다른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룸은 그딴 것을 바라지 않았다.
갈룸은 몸을 가진 자신이 무엇을 소망한다고 해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영혼 안쪽으로부터는 다른 것을 바라고 싶었다.
몸으로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이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갈룸이 망설이는 동안, 한월은 대검을 붙잡았다.
“내가 가르쳐줄게.”
그때, 한월의 검에 검은 위압이 휘감겼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달랐다. 갈룸은 한월이 지정능력을 쓰는 모습도 다른 파계종과 전투하는 모습도 몇 번이나 보았지만 지금과는 달랐다.
그간 검은 위압이 휘감겼다느니, 뒤덮였다느니 하는 것은 전부 지정능력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만의 육감 같은 것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있어 한월의 검에 변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 무엇인가가 휘감기고 있었다.
마치 물을 받아 싹트는 검은색 식물이 한월의 검날 끝에서부터 자라나 천천히 도신을 부여잡는 것 같았다.
덩굴은 삽시간에 완전히 성장했고, 이어서 검의 모든 부분을 뒤덮었다.
갈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말했잖아. 가르쳐준다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한월은 작은 웃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갈룸에게 새카맣게 변한 대검을 보여줬다.
“이게 네 바람이야.”
“짐의 바람이라고?”
“내 검은 말이지, 다른 사람이 꿈을 꿀 때 강해져.”
한월은 천천히, 노래하듯 이어나갔다.
“내가 나아가려는 길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다, 지금 웃고 떠드는 이 장소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다……. 그런 소망들. 좀 터무니없고 억척스럽더라도 그 소망에 기회를 주자는 게 이 검의 생각인 것 같아.”
그 말에 갈룸은 더더욱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갈룸은 대답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그들에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살아남길 바라는 건? 정말로 그 마음은 없어?”
“그것은 과욕이다. 짐이 살아남아버리면, 짐은 누구에게도 가치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단 말이다!”
한월은 갈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모든 게 네 욕심대로 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그런 건 불가능해!’라고 외칠 수밖에 없겠지. 네가 부채의식을 짊어지고 있는 것도, 그래서 모든 걸 다 손에 넣는 게 이기적이고 끔찍한 짓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전부 이해해.
그래서 어느 하나를 내려놓길 바라고, 그 내려놓는 것이 너 자신이 되었다는 것도 이해해.”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내가 모두 이루어줄게.”
갈룸의 손을 붙잡아 그 새끼손가락을 걸어 맹세한 것이다.
“네 가치를 잃지 않게 해줄게. 다른 사람들 앞에 자랑스럽게 서 있을 수 있게 해줄게. 고개 돌리지 않고, 당당하게.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손을 맞잡고 싸워야 해. 이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말했다.
“나가자.”
말하고 또 말했다.
“나가서 맞서 싸우자.”
갈룸의 심장이 곧 터질듯 요동쳤다.
이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자신은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그것이 너무 두려워서 지금껏 이를 악물고 견디고만 있었다고.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손을 뻗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이미 뻗어온 손을 그저 맞잡고 싶었다.
그러나 갈룸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갈룸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파계종으로서 많은 사람을 상처 입혔다.
그녀가 그때는 아직 그녀 하나로서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그녀가 업고 가야 할 잘못이었다.
그런 자신을 똑똑히 아는 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서가 모든 사람들의 몫이니만큼, 갈룸은 다른 누군가에게서도 용서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갈룸은 이번에도 한월의 손을 맞잡지도, 도와달라고 소리치지도 못하고 그저.
그저 울었다.
눈물을 쏟고 자신 안의 모든 것을 터뜨리듯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한 방울로 시작된 눈물이 바다를 부르듯 끝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한월이 그녀를 천천히 일으켜 세워줬다. 나가서 맞서 싸우자고.
그 거짓말 같은 호의에 갈룸은 몸을 맡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