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014. 두 마리의 자라 (4)
* * *
재인이 손짓하자 허공에 떠 있던 두 자루의 총이 사라졌다.
무기 대신 책을 거머쥔 재인이 앞서 나가는 검은 택시 쪽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차량의 보닛 위에 막 중학교에 입학했을 만한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재인은 그 아이를 여러 번 보아왔다.
첫 번째는 유에게 카카오톡으로 ‘동생의 사진’이라고 전송받은 이미지에서였고, 두 번째는 영국에서 벌어진 소요를 정리하고 기자들 앞에서 벌인 회견에서.
재인은 다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읽어 내렸다.
“표준형M7대검표준형M7대검표준형M7대검.”
세 자루의 검은 단도가 허공에 떠올랐다가 재빠르게 날아갔다.
물론, 재인에게 유의 동생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랬다간 유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를 한월에게는 실망을 안길 테니까.
단도는 어린아이의 코앞에서 정지할 예정이었다.
그러면 유의 동생은 이곳이 이미 전장으로 변모했음을, 어설픈 의지로 이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깨달을 터였다.
그녀는 물러날 터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랑의 주먹이 반기듯이 칼날에게 다가왔다.
재인은 당황해, 손을 뻗어 “천막!” 하고 소리쳤다.칼날이 어린아이의 주먹에 정말로 박혀버리기 전에 천으로 감싸 정지시킬 요량이었다.
그러나 물질의 생성은 이미 날아간 칼날보다 빠를 수 없었다.
마침내, 주먹은 칼날을 마주했고.
칼날을 붙잡았다.
직후 발판으로 작용하던 흰색 택시가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점점 고도를 낮춰 오는 헬기에 지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과 두 택시 사이의 거리는 몇 분의 일로 좁혀졌다.
재인과 랑은 이제 서로 목소리로 대화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또한, 눈으로 분간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있는 지경이었다.
랑의 손에 정체불명의 기계장치가 부착돼 있었다.
재인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린아이에게는 위압이 거의 없었다.제 언니와는 다르게도 동생의 지정능력 적성도는 평균적인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그 기계장치에 한해서 두드러지는 위압이 느껴졌다.
높은 C등급, 아니, 양팔의 위압을 모두 합하면 아주 낮은 B등급에 준할지도 모른다.
재인은 차분하게 말했다.
“내려가렴.”
랑은 잡아챈 단검을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에 집어던지고 물었다.
“내려가?”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란다.”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히 이곳만큼은 아니야.”
“그래서 내려갔으면 좋겠다?”
“네 힘이라면 뛰어내려도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랑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어디에 있을지는 내가 정해. 저 헬기에 올라탄 것도 올라탄 그대로 뛰어내린 것도 내가 결정했어. 누구도 나한테 명령할 수 없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너를 지정능력자로 대할 수밖에 없단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싸우겠지. 서로 옳다고 생각하는 걸 위해서.”
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옳다고 생각하는 걸 위해서라면.”
그 말과 동시에 다시 차와 차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재인은 다시 책을 펼쳤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소녀는 책을 읽어나갔다.
“K4고속유탄발사기K400세열수류탄K400세열수류탄.”
부르는 그대로의 물건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들이 모두 날아들기 직전, 돌연 랑은 양손을 번쩍 들었다.
랑은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깐! 역시 그냥 뛰어내릴래!”
그리고 랑은 재인에게 뛰어들었다.
“아줌마랑 같이!”
이윽고 세열수류탄이 폭발했다.
그러나 그 물질의 본질은 위압. 흩어졌던 수류탄의 파편이 도로 뭉쳐 일제히 건틀릿에 날아들었다.오른손에 채여 있던 건틀릿이 삽시간이 망가졌다.
그러나 랑의 계획은 틀어지지 않았다.
랑은 남은 왼손으로 다른 한 개의 수류탄과 유탄발사기를 쳐냈다.고속도로를 지나치는 텅 빈 풍경이 이번에도 두 개의 무기를 삼켜버렸다.
이윽고 재인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져가고, 그러기 직전 랑의 건틀릿이 재인의 몸을 잡아챘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건틀릿은 재인을 하늘 위로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랑은 건틀릿을 앞세워 바닥과 충돌했다.
왼손의 건틀릿 역시 산산조각이 났다.
랑은 천천히 일어섰다.
“아줌마는 나하고 있어줘야 해.”
재인 역시, 매트리스를 만들어내 그 위에 착지하고는 가볍게 일어섰다.
“멍청한…….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한월이는 지지 않아!”
그러자 랑은 받아쳤다.
“이기고 싶지도 않아!”
랑은 소리쳤다.
“애초에 말이지, 나는 갈룸이니 뭐니 관심도 없어. 그 녀석이 죽든 살든 혹은 걔를 죽이겠다느니 어쩌니 하는 놈팽이가 이기건 지건 내 마음이 찢어지는 일 따위 없어! 마음 한편으로는 그냥 깨끗하게 져버려서 그 한월이라는 지정능력자가 알아서 다 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러면 그 놈팽이는 마음에 상처를 입을 테니까, 또 자기가 괜히 나섰다면서 자학하고는 틀어박힐 테니까! 그딴 꼴 따위는 조금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이곳에 있는 거야!”
재인은 몇 걸음을 물러섰다. 페이지를 넘겨가던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그 모습을 붉어진 얼굴로 지켜보던 랑은 호흡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아줌마도 그런 거잖아? 옳으니 틀리니 하는 것보다는 그냥,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아서.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맞아.”
“그래, 그러면 드디어 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거야.”
“그으래? 하지만 그 싸움이 정말로 동등하다고 생각하니? 네게는 무기가 없잖아.”
“그쪽한테도 무기는 없어. 책이 있을 뿐. 그 책이 있으면 무기가 쏟아질 테지만, 나한테도 비슷한 게 있어.”
“비슷한 것? 그럼 너한테는 뭐가 있단 말이니?”
“공장.”
그 말과 함께 랑이 한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하늘로부터 응답하듯, 큐브가 날아왔다. 큐브는 이전의 건틀릿과 마찬가지로 랑의 팔에 닿아 자동적으로 조립됐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한쪽 손에도 큐브가 날아왔다.
다시 양손에 건틀릿을 장착한 랑은 재인을 쏘아보았다.
“이 정도면 동등하겠어?”
“아니, 한참이나 모자라단다. B등급에 간신히 닿을락말락하는 저등급 지정능력자가 하나 발목을 잡아챌 뿐이지.”
재인은 코웃음과 함께 책을 읽어나갔다.
“표준형M7대검표준형M7대검표준형M7대검표준형M7대검표준형M7대검──”
그러던 중 돌연, 재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하늘 위로부터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다른 건틀릿인가, 하고 “파병수출용방탄방패.” 허공에 녹갈색 방패를 띄웠다.
그러나 틀렸다. 내려오는 것은 애초부터 재인의 머리 위에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재인의 등 뒤에 내려와, 그대로.
“거 미안합니다만.”
사과했다.
“저등급 두 명인 걸로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재인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검은 슈트를 입은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인은 그 모습을 알고 있었다. 영국에서 불법적인 자경단원으로 활동하다가 폭주해, 이윽고는 어떤 기업가의 총수 후계자에게 제압되었다는 “흉물, 은 아닙니다.”
슈트의 바이저가 벗겨지며 그 안의 얼굴을 드러냈다.
분명 체포된 흉물도 그녀를 부리던 머즐드독스의 지사장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재인이 사적으로 아는 얼굴이었다. 다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있을 뿐,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재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 누구인가요?”
“아, 그거 어려운 질문이군요. 이쪽은 그쪽과 다르게 더블 히로인 체제라서 말이지요.”
흉물 슈트 안의 누군가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동시에 방패가 아래로 내려와 주먹을 막아냈다. 슈트 안의 여자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꺅, 사실 처음 입어보는 건데!”
유쾌하지 못하게 인상을 쓴 여자는 방금 전까지의 리액션이 전부 농담이었다는 것처럼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재인의 어깨 너머, 랑에게 목례했다.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아가씨.”
“별로 필요 없었어.”
“본인이 부르셨으면서.”
금발의 여자는 방긋 웃으며 재인에게 조금 늦게나마 대답해주었다.
“가급적이면 제니퍼라고 불러주시길.”
***
한월 공! 재인 양이 차에서 떨어졌소.
한월도 보았다.
한월은 랑을 공격하지 않았다. 랑은 분명 한월이 타고 있는 검은 택시에 올라탔고, 그런 랑을 공격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한월은 대검까지 휘두르지 않더라도 위압만을 이용해 랑에게 상처 입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말하는데, 한월은 랑을 공격하지 않았다.
다치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 아이는 유의 동생이었고, 한월에게는 랑이 재인의 설득에 따라 얌전히 내려가 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났다. 한월은 대검을 쥐었다.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위압이 공간 자체에 영향을 주어 클럽의 램프가 박동 치듯 주변 모든 것을 떨려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뒤 차량의 마베 꼬마 또한 느꼈을 터였다.
한월 공, 전면전으로 나서면 분명 누군가는 다치게 되오.
“이미 한 명이 다쳤어. 어쩌면 두 명일지도 모르고. 피할 수 없는 건 피하지 않아.”
그렇다면 차라리 내게 맡겨주시오.
“너한테?”
유성을 떨구겠소.
마베 꼬마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성을?”
응, 유성을. 헬기에 떨구는 거요. 유 양이 있으므로 떨어진다고 해도 염동력으로 피해를 막아낼 수 있을 테고…… 그 뒤에는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할 테니까.
“제대로 조준할 수 있어?”
물론이오.
한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헬기 안에는 많아야 둘 혹은 세 사람 정도가 타고 있을 것이고, 그 정도 무게라면 유 혼자서 가볍게 커버할 수 있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유성이 헬기를 성공적으로 떨어뜨리고도 모자라 그곳에 타고 있는 유의 신체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기절하거나 심지어는 죽는다면?
헬기 안의 사람들은 몰살당할 것이 당연하며, 유가 살아남건 살아남지 못하건 관계는 최악의 경우로 치닫을 것이다.
한월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제대로 해야 해.”
자신 있소.
“그리고 신중하게. 만일 실패하면, 몇 발 더 못 쏘잖아, 너. 체력도 다 회복되지 않았고.”
쓸모없는 걱정을.
한월은 웃음기가 섞인 대답을 듣고도, 다시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래, 떨어뜨려. 안전하게.”
물론이오.
이후 수화기 너머에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가 뒤섞였다.
한월이 뒤쪽 창문을 돌아보니 마베 꼬마는 조종을 위해 창문 바깥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있었다.
한월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린 뒤 눈을 감아버렸다.
어떤 식으로 기도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불투명한 기도가 미처 한 문장이라도 읊기 전에…….
못 하겠군.
투두두두두, 프로펠러의 소음이 한월의 앞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다시 뒤로 스쳐지나갔다.
한월이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헬기가 있었다.
헬기는 도로 한 가운데에 그대로 정박했다. 앞에 가던 한월의 택시와 뒤 따라 가던 마베 꼬마의 택시를 완전히 분리하고.
한월이 대검을 쥔 채 창문 바깥으로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헬기가 다시 날아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