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012. 두 번째 토끼 (5)
* * *
“그.”
끼긱, 끼긱,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적으로…… 아니, 생물학적이었다. 살더미가 여러 갈래로 교차하며 마침내 짓뭉개지는 것 같은 소리가 사방을 뒤덮었다
끼기긱, 끼기긱, 사람의 뼈로 만든 낡은 시계가 수명을 다하고 부러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난자한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괴성이 있었다.
한월은 넋을 잃었다. 쓸어내듯 대검을 휘두르자 안개가 모조리 걷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신사복을 입은 토끼가 아니었다. 온몸에 가시가 처박힌, 마치 잘못 자라난 선인장 같은 파계종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가시는 본래 그 파계종의 것이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한월이 대검을 치켜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파계종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유였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한월은 잠시 넋을 잃었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딱 맞았어.”
“다행, 이네요.”
그 대답을 듣자마자 한월은 덜컥 주저앉았다.갑자기 긴장이 풀리니 두 다리로 버티고 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월은 대검을 짚은 채로 주저앉아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제가 묻고 싶어요. 아까 그 야한 옷 입은 여자한테 몇 마디를 들었는데, 그 이후로 생각이 안 나요. 눈을 떠 보니까 사방이 안개랑 가시로 가득하고. 어떻게어떻게 바로 방향을 돌려버렸지만.”
“뭐, 됐어, 일단은─” “아직.”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틀리고, 비틀린, 그러나 뚜렷한 목소리였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이미 쓰러졌던 신사는 다시 일어났다.
물론 그의 몸은 성치 않았다. 수류탄을 직격당한 것보다도 더 너덜너덜한 몸으로 일어선 것이다.
아니, 지금의 그 몸은 일어선다는 사건을 성립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관절을 잃어버린 다리 대신 팔이 바닥을 지탱했다.
한월이 다시 대검을 거머쥐었다. 그때, 신사도 수많은 가시를 준비했다. 아까보다 수는 줄어들었으나 단 하나 관통당해도 가볍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한월은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방향이 아니었다.
한월이 카페 바깥을 향해 달려 나갔다.
[행동지정: 순간가속]
그러나 모자랐다. 그것은 가속이지 시간의 정지도 무엇도 아니었다.
수많은 가시가 창문을 뚫고 나아갔다.
“우리는 반드시.”
아주 멀리까지, 어쩌면 수백 미터를 넘어서까지. 그리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길앞잡이 지정자들의 인도를 받아 현장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인간을 멸절한다.”
다시 뒤틀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방에서.
이번에도 기계적이지 않았다. 생물학적이었다.그 운율적인 소리에 신사는 탄복했다.
“아아.” 하고 진심으로 감탄하는 신사는 이윽고 쓰러져 먼지로 돌아갔다.
한월이 비명을 질렀다. 하늘로 비산하는 잿더미 속에서 한월은 달려나가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늦지 않았소.”
한월 앞에 선 것은 마녀였다. 마녀는 환한 웃음과 함께…… 한월의 시야를 터 주었다.
가시에 관통당한 것들은 모두 마네킹이었다. 아주 잘 만든 것들로, 사람의 살처럼 말랑말랑한 실리콘까지 달라붙어 제조된 것이었다.
한월이 깜짝 놀라 아래에 선 마녀를 내려다보았다.
마녀가 실컷 웃으며 자랑했다.
“짜잔, 신기술이오.”
“마베 꼬마!”
“더불어서, 선물.”
그렇게 말하며 마베 꼬마는 질질 끌고 있던 것을 내던져주었다.
눈을 감고 쓰러져 있는 예의 바니걸이었다. 이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생포한 것인지 한월은 금세 깨달았다. 디스펠을 쓴 것이겠지.
“메테오도 날렸소. 깔끔하게 기절했지.”
“앗, 그 주먹돌만 한 거 말이지?”
“주, 주먹돌이라니! 그건 어디까지나 작게 조절을 한 것이고, 이번에는 죽이는 게 의미가 없는 사안이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진짜 다행이다.”
한월은 다짜고짜 마베 꼬마를 끌어안았다. 반가움이 극에 달했을 때 간혹 한월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였다.
마베 꼬마는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아 이럴 때에는 자기 쪽에서 먼저 한월을 떨어뜨려놓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린 한월은 마베 꼬마를 살짝 떨어뜨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마베 꼬마는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지. 그런데 말이오, 한월 공……. 나 벌써…… 마법, 다섯 번이나 썼소……….”
“응?”
“워프는……… 거의…… 마흔 번……….”
풀썩.
다소 극적인 자세로 마베 꼬마는 쓰러졌다. 그러더니 그대로 한월의 가슴에 떨어졌다.
받아든 한월은 뛰쳐나오는 유에게 민망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음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가시에 뚫린 마네킹들을 발견한 유는 함께 헛웃음을 흘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또 잠들었죠?”
“응, 잠들었어.”
새근새근, 마베 꼬마는 달콤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마카롱 먹고 싶소…….”
“응?”
“마카롱──.”
“아, 깼구나?”
“마카로옹──마카롱. 아니면, 브리오슈우──.”
“덜 깼네.”
“오빠, 보고만 있지 말고 제대로 깨워요. 한시가 급하다구요.”
“그, 그러려던 참이었어! 너도 들었지? 얼른 일어나. 얼른, 얼른.”
“앗! 드, 등 만지지 마시오!”
“얼른.”
“이, 일어나고 있소! 등은 약하다니까, 꺄핫?!”
“으앗.”
“오빠! 사심 담겼죠, 지금!”
“아, 아니…… 딱히 그런 의도로는…….”
“어휴, 내가 못 살아! 재인 언니가 있어야 된다니까!”
“지, 지금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 그보다 얼른 저 바니걸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으음, 무슨 말이오?”
“그게 그러니까, 네가 데려온 그 바니걸 일단은 가둬놨어. 걔도 깨어나긴 했는데 완력은 그냥 사람하고 똑같아서 말이지…… 문을 잠가놓으니까 나오지는 못하고 있고.”
“앗,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 음란한 옷을 입은 여자의 정보를 캐내라는 것이지요, 한월 공?”
“응. 음란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맞아. 여기, 필요한 질문 목록.”
“엣헴, 그런 일이라면 내가 맡겨 두시오. 흠흠, 좋아. 드디어 제대로 한 건 하겠군.”
“알면 얼른 가서 일해, 마베 꼬마.”
“유 양은 하여간에 파계종만 관련되면 급해진다니까. 기다리는 법을 배우시는 게 좋을 거요. 아직 영창을 입에 담지 않았단 말이오! 그러니까…… 피보다 붉은 자여, 어둠보다 검은 자여── 아코?! 왜 때리는 것이오!”
“영창이 무슨 필요가 있어!”
“필요 있소!”
“살면서 영창 같은 거 하는 지정능력자 본 적이 없거든?!”
“이, 이걸 해야 폼이 난단 말이오! 그리고 영창과는 별개로 준비시간은 원래부터 필요한 것인데── 아얏! 꺄악! 한월 공! 살려주시오! 유 양이 부당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지 않소!”
“아하하……….”
***
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마베 꼬마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바니걸이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문은 닫혔다. 닫히는 속도를 보건대 바깥에서 염동력으로 확 닫아 젖힌 것 같았다.
바니걸은 흠칫 마베 꼬마를 노려보았다.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벌써 깨닫고 있었다. 바니걸은 슬슬 방향을 전환해 자결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갈룸의 능력 덕분에 그녀는 죽으면 몇 시간 뒤에 부활한다. 죽은 동안에는 어쨌거나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으며 죽은 장소에서 그대로 부활한다는 게 흠이지.
암만 그래도 지금의 고비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월 측도 바보는 아니어서 자해할 만한 기구는 모조리 빼둔 상태였다.
벽에 머리를 박아 죽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아이디어가 나오던 찰나에 마베 꼬마가 들이닥친 것이다.
바니걸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바니걸은 다짜고짜 마베 꼬마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그녀에게 위압 정도를 제외한 전투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불어 상대방은 정신지배가 들지 않는 상대이므로 바니걸에게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만큼 스스로가 죽을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바니걸은 그 확률에 기댔다.
[행동지정: 마법: 그대로 멈춰라!Arrête!]
“아, 망할.”
허공에서 하얀 끈이 나타나 바니걸의 온몸을 묶어버렸다.
처음 깨어났을 때 온몸을 결박하고 있었던 문구용 끈보다도 훨씬 질기고 튼튼한 것이었다.
“거 지정능력 일곱 번인가 쓰면 쓰러지는 타입 아닙니까?”
“잘 아시는군. 엄밀히 말하자면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마법이오. 대부분의 마법이 그렇지만.”
마베 꼬마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과연 바니걸은 관리국에서 정보를 빼낸 것이 맞는 듯했다. 마베 꼬마가 쓸 수 있는 마법의 횟수는 상당한 기밀에 속했다.
“그럼 아껴 쓰셔야지. 언제 뒤통수 맞을 줄 알고.”
“그대에게 맞을 것 같지는 않소.”
“아, 진짜! 그쪽 몇 살입니까?!”
“한국에서는 14살이오.”
“흐어어어아?! 내가 그 수에 10의 다섯 승을 곱해야 할 정도로 살았거든?! 어?! 이거 안 풀어?!”
“승이 뭐요?”
“하, 돌아버리겠네.”
마베 꼬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고로 말하는데 그녀는 프랑스에서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월에게는 수학의 재능이 없었고……. 유가 제곱을 알려주긴 했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므로 그냥 까먹었다.
“어쨌거나 그대는 우리의 중요한 자산이오.”
“이제는 사람을 자산으로 취급합니까?!”
“사람이라니, 말조심하시오.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을 거요. 그대들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 뻔했는지 아시오?”
“아으아, 그래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래서 뭐 어쩔 겁니까?”
“글쎄,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호오오, 호오오오! 그렇군요. 그렇죠. 맞습니다. 이제부터 제 팔다리를 묶어놓고 고문이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겠죠! 아아앗, 그런데 이걸 어쩌나? 미안합니다. 유감스럽지만 고문 같은 건 안 먹힙니다. 저는 말이죠, 당신들 방식으로 말하자면 정신을 조작하는 파계종입니다. 고통을 차단한다든지 하는 건 간단하단 말이죠?”
“흠, 그러면 성고문도 버틸 수 있소?”
“14살이 못하는 말이 없지 않습니까아아! 게다가 저 지금 14살에게 성고문 당할 위기에 처한 겁니까?! 그런 겁니까아아?!”
“무슨 소리요? 당연히 한월 공이 해야지, 성고문인데.”
“이상한 포지션까지 덧씌웠어?!”
“흥.”
마베 꼬마는 코웃음을 치고는 줄에 묶인 채 주저앉아 있는 바니걸을 내려 보았다.
“농담이오. 한월 공이 성고문 같은 단어를 알기나 할까 의문이군.”
“헛, 뭡니까아, 나까지 히로인 대열에 동참시키는 건가 의심했지 않습니까. 흠흠, 핫핫, 아무튼! 그럼 결국! 저를 함락시킬 수단은 없다는 것이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분명 함락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게 맞겠군.”
“그럼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대가를 치른다느니 뭐라느니 잘도 지껄인 주제에?”
바니걸이 질렸다는 투로 그렇게 묻자 마베 꼬마는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써보시오.”
“흐응?”
“다시 써보란 말이오, 그 정신지배 능력.”
“무슨 개소리입니까?”
“그대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지정능력을 짧은 시간동안 여러번 쓸 수 없소.”
마베 꼬마는 드물게도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광범위한 능력의 대가 같은 것이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핑계를 대고 팀에 짐짝이 될 수는 없소.
지정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 상태에서라도…… 그대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소.그러니 그대를 연습상대로 삼겠다는 것이오. 그게 내가 그대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대의 형벌인 것 같군.”
“뭡니까아, 의외로 연약한 형벌이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연습상대가 되어준다는 전제 하에, 이것으로 형벌을 대신하겠다는 것이오.”
“이해가 안 되는군.”
바니걸은 투덜거렸다.
“당신, 실수라도 저지르면 바로 조종당하는 겁니다? 미리 경고해서 좋을 것도 없지만 워낙 뻔한 주의사항이라서 그냥 말해두는 겁니다. 조종당하는 거라구요?”
“그런 위험성은…… 상관없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성장해 한월 공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흐응.”
바니걸은 미간을 좁혔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신지배 능력을 쓰는 것은 별다른 리스크가 있는 일이 아니다.수십 번을 이어서 쓰면 나가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능력을 남발할 필요조차 없다. 상대방은 어차피 한 명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눈앞의 마녀가 디스펠에 실패할 경우 바니걸이 얻게 되는 이득은 상당하다.
그녀는 당장 저 마녀를 조종해 이곳에서 탈출하는 데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 필요한 정답 따위, 길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꼭 후회할 선택을 하지요. 뭐어, 좋습니다☆”
바니걸은 눈을 크게 뜨고 마베 꼬마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어서 원래도 붉었던 그 눈동자가 무수한 흠집과 함께 밝게 빛났다.
바니걸은 가득 찬 비웃음을 내뱉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으세요. 이거, 명령입니다☆”
직후, 바니걸의 신체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더니 아까부터 주저앉아 있었던 바니걸은 안간힘을 다하며 온몸을 비틀어댔다.
이윽고는 마베 꼬마를 향해 꿇어앉아버렸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마베 꼬마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탄식을 흘렸다.
“어지간히 잘 속는 친구로군.”
마녀는 말했다.
“마법 반사(Réflexion magique)가 마녀의 세 번째 기본 소양이라는 것도 모른다는 말이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