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012. 두 번째 토끼 (3)
* * *
“일리가 있어요.”
턱에 손을 얹고 있던 유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니걸이 읽어 내린 노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네 마리의 토끼에 대해 묘사하고 있었다.
제왕, 신사, 창부를 비롯해 마지막에 가서야 언급되는 네 번째 토끼까지.
다소 추상적이고 동화 풍으로 변형되어 있기는 했으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내용이었다.
가령 신사 토끼는 지난번 무뢰한이 격퇴한 그 형태를 말하는 것이겠지.
허공에서 가시를 만들어내 관통시킨다든지, 공간과 공간 사이를 끊거나 잇는 위험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짐작컨대 제왕이라고 하는 존재는…… 갈룸. 그녀는 스스로를 ‘짐’이라고 가리켰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가사에서와 비슷한 행동을 취했다.
노래가사에서 주로 언급되는 존재는 신사와 제왕이다.
신사는 지속적으로 극단적이거나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고 제왕은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대화는 마치…… 자신들의 적인 인간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다투는 모습처럼 보였다.
현실 세계의 신사와 제왕에게 대입하자면 말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두 분 모두 이 노래의 내용을 대강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래서 네 번째 형태는 어떻게 부활하느냐? 둘째, 정말로 갈룸이 선한 존재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납득시킬 것인가!”
“잠시만요, 첫 번째 사실은 그렇다치더라도 둘째는 비약이에요. 이 노래 가사를 보면 갈룸은 선한 존재가 맞지만, 노래 가사는 말 그대로 노래 가사일 뿐이에요.
현실의 갈룸이 이 가사 대로 행동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말했지만 이 가사의 출처는 관리국의 극비 정보 자료실입니다. 알아듣겠습니까? 데이터 안에서도 또 데이터, 그 안에 다시 감춰진 데이터였다구요? 의미가 없는 정보, 누구도 숨기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는 정보라는 게 아니구요, 어디까지나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나도 그 의견에는 동의야, 일단은.”
한월까지 그렇게 의사를 밝혔다.
바니걸은 잠시 으음,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아마 눈을 마주쳐서 이 상황을 그냥 관철시켜버릴지 아니면 말로 설득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이죽거리기 시작한 바니걸은 이렇게 말했다.
“믿어도 믿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사실 다른 이를 설득시킨다, 라는 것 자체가 웃길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고…….
이제 네 번째 형태의 부활에 대해서 얘기해볼까요? 아아, 이것도 마찬가지로 극비정보입니다만, 하젠야크트가 독일 대도시를 파괴했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알아요.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관련된 자료가 거의 다 사라졌죠.”
“아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대체 어떤 나쁜 파계종이 하젠야크트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이 세상에서 말소시킨 걸까요? 가슴이 아픕니다☆”
바니걸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어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독일이 무너진 이유는 그 네 번째 형태가 표면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뭐라구요?”
유가 깜짝 놀라며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바니걸은 아핫핫핫, 하는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 상황, 심각한 겁니다? 인천이고 서울이고 나발이고 다 무너져 버려요? 영국 꼴이 난다구요? 알아두시는 게 좋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한월이 잠시 손을 들었다.
바니걸이 눈짓으로 말해보세요, 하고 답했다
한월은 그렇게 했다.
“관련된 정보는 소실된 거 아니야?”
“물론입니다. 그래서 극비라는 겁니다! 길게 설명하기도 귀찮으니 어둠의 루트에서 얻어뒀다고 하죠.”
하지만 그 표현은 이상했다. 극비이니 뭐니 해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보는 소실되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다소간의 모순이 있는 방식으로 정보의 출처와 신빙성을 바니걸은 일축했다.
그리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으니 이제 예방주사를 어디에 어떻게 놓을지 결정할 시간입니다! 우선 제가 제안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갈룸을 죽인다!”
“반대.”
한월이 손을 들었다. 바니걸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치잇, 하고 혀만 차댔다.
이 부분에선 암시도 안 먹힌단 말이죠☆ 미소녀 지키는 순간 한정으로 무적이다 이겁니까?
바니걸은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한월과 유 모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못한 것일 수도 있고?
바니걸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여자아이는 다쳐도 상처입어선 안 돼! 라는 라이트노벨식 신념은 알고 있다구요? 그렇지만 한월 군, 상황은 심각합니다? 노래 가사를 보셔서 알겠지만 네 번째 형태는 그 형태가 제왕을 죽임으로써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그러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것만큼 확실한 방도가 없다구요?”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잖아. 의미가 없다고.”
“분명히 하죠, 부활은 곧 ‘존재’에 관한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갈룸의 능력입니다. 갈룸이 죽은 상태에서 그 능력은 발동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갈룸은 죽여도 다시 부활하지 않습니다. 무뢰한도 이런 목적으로 갈룸을 죽이려 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는 사실을 한월 군이 모르셨을 리도 없고 말이지요?”
바니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어차피 변명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부활이니 뭐니. 아무튼 그쪽은 반대라고 칩시다. 그럼 다른 쪽은? 제갈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리둥절해 있던 유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는 당연히 찬성이에요.”
“아아, 상식파가 하나 있었다니! 기쁘고 또 기쁩니다!”
“잠시만, 반대한다고는 했지만…… 그 방안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건 아니야.”
“흐응?”
“그게, 우린 솔직히 네가 왜 우리를 돕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확신을 못하겠다고.”
“연기력이 모자라시군요. 말을 돌려서 제 정신을 분산시킨 뒤, 어느 정도 따라주는 척하다가 막판에 갈룸을 보자마자 ‘난 이 아이를 꼭 지켜주겠어!’ 같은 말씀을 내뱉으며 제 뒤통수를 때릴 미래가 눈에 훤하군요.”
“그, 그게.”
“어휴, 오빠…….”
한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유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있을 때 실컷 음모를 꾸며놓긴 했지만 나쁜 짓(=남을 속이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어색하게 행동하는 한월 특유의 버릇이 튀어나온 것이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가 이제 차라리 한월을 설득시키는 쪽으로 돌아서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때, 바니걸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뭐, 상관없습니다. 비협조적인 사람도 협조적으로 만드는 것이 제 특기입니다. 그러니 한월 군은 갈룸을 만나고 나서 의사를 결정하셔도 좋습니다!”
“어어, 진심이야?”
“진심입니다☆”
“그렇지만 아까 혼자서 만났을 때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아, 굳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따져보자면, 지금은 제갈유 양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요?”
한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랄까. 단순한 직감이었지만 어쩌면 이 여자 속이 새카만 것은 아닐까 한월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낮에 처음으로 만났을 때 바니걸은 결코 갈룸에 관해서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한월이 그녀를 죽이겠다고 확신하지 않는 이상, 바니걸은 갈룸이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은 걸까?
“글쎄요. 그런 건 둘째치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월 군?”
“응?”
“잠시 나가 계셔주겠습니까?”
“나가 달라니?”
“뭐, 별 거 아닙니다! 여기 계신 제갈유 양과 단둘이, 여자들만의 대화를 좀 나눌까 하고.”
그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
“여자끼리의 대화라니……. 갑자기 무슨?”
마침 바니걸이 주문한 카페라떼가 나왔다. 테이크아웃으로. 바니걸은 그것을 받아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면서 그녀는 유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홀짝, 라떼만 한 모금을 맛보았다.
“으윽, 쓰군요. 라떼 들어가면 단 거 아닙니까?”
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달콤한 거라면 카라멜 마끼아또 라든가…….”
그때, 붉은 눈동자와 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제갈유 양.”
“네?”
“솔직히 제갈유 양이 함께 와준 것, 고맙게 생각합니다.”
“예? 아뇨, 뭘 이런 걸 갖고. 그냥 어쩌다가 오게 된 건데요.”
“아뇨아뇨아뇨, 저는 솔직히 무슨 일이 있어도 재인 양이 와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인 히로인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간단합니다. 첫째는, 제갈유 양은 정말로 훌륭하게 시간을 끌어주셨다는 겁니다.”
바니걸은 흐붓하게 웃어 보였다.
“그야, 재인 양은 너무 고분고분하지요. 한월 군과 죽이 너무 잘 맞아서 질질 끄는 게 어렵다, 이런 겁니다. 다시 말해 원하는 타이밍을 맞추기도 어렵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보십시오, 제갈유 양은 충분히 시간을 끌어 주셨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저기, 이상한 말씀을 하실 거라면…….”
“앉으십시오☆”
일어나려던 유의 몸이 정지했다. 갑자기 유는 계속 앉아있고 싶다는 어마어마한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그 충동이 아주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 앉아 있어야 한다. 유는 일단 앉아 있기로 했다.
“자, 이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바니걸은 말했다.
“노래 가사라든지, 이건 서비스 차원입니다. 이제 별로 필요는 없지요. 왜냐하면, 제갈유 양은 재인 양과 달리 손쉽게 ‘지배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도대체?”
“계획이 변경됐다는 것이지요. 자세한 건 이제부터 알게 될 겁니다. 그래요, 우선 시작해보죠. 고맙게도 덕분에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까요. 다소 갑작스럽고, 장소도 제가 바라던 곳이 아니긴 합니다만은, 좋습니다. 귀여운 제갈유 양?”
바니걸은 명령했다.
“박한월 군을 죽이세요.”
그때였다. 투명하던 카페 창문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그 너머는 우주의 심연이나 암흑에 뒤덮인 성운, 별과 별 사이의 무엇도 없는 공허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진실이었다. 맞닿아 있지 않던 전혀 다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다룰 줄 아는 토끼는, 신사는 나타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예의바르게 여섯 갈래로 입을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닫았다.
하젠야크트는, 신사 로베르트는 말했다.
“‘쇄도를 죽여라’인가? 그 명령은 내가 마무리하지.”
두 마리의 토끼는 어리석은 자라를 향해 말했다.
“‘우리와 함께’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