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012. 두 번째 토끼
* * *
누군가가 조용히 노래했다.
한 토끼는 신사, 다른 토끼는 창부, 또 다른 토끼는 제왕, 마지막 토끼는, 글쎄요?
그들이 무엇이건 그들은 평화롭게 살아갔습니다
그 평화는 언제까지고 이어졌습니다. 또한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신사가 이렇게 청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제왕이시여, 온 세상을 허공에 꿰다 매달아버리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설 수 있는 곳을 넓히십시오.”
***
소년은, 한월은 재인의 퇴원을 만류했다.
부러진 뼈가 붙기는 했지만 활동하는 데에는 제약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인은 주치의의 처방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해버렸다.한월이 먼저 나아서 싸우고 있는데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게 재인의 설명이었다.
한월은 자신은 회복을 가속시키는 지정능력 덕택에 금세 나아버릴 뿐이라며, 반면 재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언제나처럼 알려주었다.
그러자 재인은 언제나처럼 한월의 말을 무시하고 그와 함께 싸우겠다고 나섰다.
호의는 고마웠지만 한월은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자신 때문에 재인이 다치는 것만 같았다.또한 자신 때문에 자꾸만 낫지도 않은 몸으로 퇴원하는 것 같았다.
두 느낌은 아마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간과정을 몇 개 생략해 말하자면 재인은 한월이 그녀를 구해주기 때문에 수시로 다치게 되었다.
동시에 한월이 갈룸이라는 정체불명의 소녀를 데려왔기 때문에 재인은 퇴원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갈룸은 이미 멋대로 한월의 곁에서 사라졌다. 감쪽같이 없어져서 추적조차 불가능하다.
그녀는 ‘존재’에 관한 파계능력을 사용하는데, 그것을 통해 자신의 흔적이나 위압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았다.
온종일 갈룸이 사라진 인근을 뒤지고 다니던 한월도 오늘 아침이 밝아오며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다만 지정능력 관리국에 알릴뿐이었다. 사과와 함께.
“그건, 어떻게 할 거야?”
재인이 그렇게 물어왔다. 사라진 갈룸에 대해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정말로 찾길 포기하겠냐는 것이지.
한월은 한숨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신고는 해뒀지만, 계속 찾긴 찾을 거야.”
“그렇지만 한월이 네가 나설 필요는…….”
“죽겠다고 했어, 그 녀석. 죽여 달라고. 그런 말을 입에 담는 녀석을 홀로 둘 수는 없어.”
한월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렇게 말하고는, 이어나갔다.
“게다가 관리국에서 이미 추적에 들어갔어. 그 사람들은 너도 알겠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않아. 사실 봐줄 필요도 없고. 내가 늦으면 그 아이는 죽어. 그렇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한월아, 어차피 자기가 죽여 달라고 했잖아.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그 아이에게는 결과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해.”
“무슨 말인지는 알아.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그렇지만, 본인이 그렇게 바란다면 우리가 말릴 수는…….”
“너도 그런 소리를 했어.”
한월은 뒤를 돌아보며, 입고 있던 패딩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제 살 가치도 필요도 없으니까 죽는 게 낫다고. 우는 얼굴로 네가 그랬잖아.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고…… 그런 거야. 마베 꼬마부터 시작해서 다들 아무렇지 않게 죽겠다느니 뭐라느니 하지만 실상 그런 걸 바라는 녀석은 없어. 혼자서 울고 감당할 필요는 없다고.”
“응…….”
재인은 힘겹게, 그러나 기꺼이 미소를 지으며 한월에게 다가갔다.
재인은 한월의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그렇지만 틀렸어. 한월이 네가 늦으면 끝나는 게 아닌걸. 우리야. 어디든 내가 함께 갈 거니까.”
“그, 그런가?”
재인의 말이 낯간지러워서 한월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재인은 가끔 이렇게 감정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탓 같았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는 연애 소설을 줄창 읽고 있어서 어떤 내용이냐고 물어보니 얼굴을 확 붉히며 ‘아,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야.’하고 얼버무렸지.
그때 읽은 책들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한월은 재인이 손을 끌어당긴 위치, 즉 가슴 근처가 눈에 들어왔다.
한월이 얼굴을 확 붉히자 재인도 알아차리고는 손을 떼어놓았다.
재인은 잠깐 손가락을 비비 꼬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 그런데 한월아. 앞으로의 방침 같은 건 정해졌어?”
“방침?”
“어딜 위주로 찾아본다든가, 누구에게 도움을 구한다든가……. 내가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돕고 싶어.”
“글……쎄? 일단은 마베 꼬마한테 말을 해두긴 했는데.”
“유는?”
“그 녀석은 일단 보류. 유는 워낙 넓게 보잖아. 어쩌면 갈룸을 없애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아마 부탁하면 반드시 도와주겠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일에 억지로 말려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
“찾을 위치는?”
“집 주변은 다 찾아봤지만 없었고…… 그건 전혀 감이 안 잡혀. 일단은 친한 지정능력자들한테 위압의 형태는 다 설명해놨는데, 위압을 감추는 것도 할 줄 아는 데다가 지정자마다 위압을 느끼는 방식이 달라서…… 아하하.”
“흐음, 그러면 힌트는 없는 거네.”
“아, 그건 아니야.”
한월은 재인의 어깨를 툭 짚으며 말했다.
재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가가 있어?”
“으음, 없지는 않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게, 뭐냐, 좀 복잡하거든. 일단 오늘 점심 즈음에 저쪽 길거리에서 이상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때 재인의 눈이 또 가늘어졌다. 한월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하하 웃어보였다. 어색하게.
그러거나 말거나 재인의 눈은 여전히 가늘었다. 여기서 문제는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한월은 어째서인지 여러 사건에서 여자와 자주 엮이는 편이다.
재인부터 시작해서 마베 꼬마나 유까지. 사건의 중심부터 해결과정 중간중간에 여러 여성이 말려드는 게 재인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다른 여자랑 있는 게 기분 나빠! 라고 말할 명분은 없다.
아무튼?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여러 여자와 엮이는 것은.
다소 티나게 짝사랑하는 하나의 소녀로서…… 결코 마음이 가볍지 못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여자?”
“그게 말이지…….”
여전히 어색하게 웃는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바니걸 복장이라고 하면 알아들어?”
***
갈룸을 찾는 것은 아침에 포기했다.
그래도 어디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돌아다니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한월은 거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는 점심 무렵이었고 한월은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마베 꼬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소개한 정체불명의 소녀가 사실은 파계종이라는 것과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 등등.
한참 진지하게 듣던 마베 꼬마가 당연히 한월을 돕겠다는 대답을 내놓을 차례였다.
그러나 그때, 한월의 테이블 맞은편에 웬 여자가 앉았다.누군가 싶어 얼굴을 쳐다보니 금발의 백인 여자였다.
송도에 외국인이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카페에 가면 한두 명은 꼭 외국인이었다.
게다가 마베 꼬마라든지 지난번 유의 동생과 동행하던 메이드 덕택에 외국인에게도 나름 익숙해진 한월이었다.
어색함 없이 계속 밥을 먹으려는데, 저쪽에서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매우 들뜬, 그리고 경쾌한 어조였다.
게다가 믿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한국어이기도 했다.
한월은 아직까지 저쪽에서 자신에게 인사를 했다고 생각하지 못해서 마베 꼬마의 대답을 듣고 있었다.
그래! 한월 공이 바란다면 무엇을 못하겠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어어? 무시하는 겁니까?”
한월은 그때 비로소 맞은편의 여자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한월은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아, 응, 고마워. 도와준다고 해줘서 고맙고……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조금만 있다가 전화할게.”
이후 한월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이해가 안 간다는 것처럼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예쁜 여자였다. 뭐랄까, 엄청난 미모! 라고 할 정도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몸매가 엄청났다.
아니지, 몸매가 아름답다는 것과는 또 달랐다. 그녀는 일단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앞섶을 배꼽 위까지 풀어헤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뭐냐, 안에 입고 있는 것이었는데…….
“바니걸?”
한월이 얼굴을 붉히며 일어섰다.
그래. 바니걸이었다. 바니걸 특유의 가슴은 다 파이고 속옷 끈은 보이지 않고, 라텍스의 탄력으로 간신히 위험한 부분만 가리는 검은 상의
아니, 상의고 하의고 구분이 없는 디자인이 맞으려나.
설마설마 생각하며 한월이 테이블 밑을 살펴보자 하이힐과 망사 스타킹이 눈에 들어왔다.
결코 흔한 패션이 아니었다. 게다가 머리에 놀이동산에서나 볼 법한 토끼 머리띠를 걸치고 있었다.
한월은 표정을 굳히며 재차 중얼댔다.
“바니…… 걸이라고?”
“핫핫핫. 뭡니까. 야한 거에 관심이 많은 나이다 이겁니까!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심지어 경쾌하게 인정해버렸다. 인정받은 것이다. 바니걸 복장을 하고 있다고.이런 아무 곳에나 있는 편의점에서.
트렌치 코트 하나만 간신히 덮어놓고. 아마 저것까지 안 덮어놨다면 경찰이 제지하는 수밖에 없을 만한 의상을.
한월이 기겁을 하며 물러서려는데 저쪽에서 흐흥,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진정합시다, 진정!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다구요? 저, 이래 뵈도 상당히 도움 되는 인간이니까!”
“좋은 소식이라니…….”
“찾고 있지 않았습니까, 토끼.”
한월의 동공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그러나 바니걸은 여전히 자신만만 위풍당당한 웃음만 머금은 채, 아니 오히려 거만하게 팔짱까지 끼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권유하듯 턱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한월은 조심스럽게 그곳에 앉았다.
한월은 이렇게 물었다.
“너…… 누구야?”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토끼는 답했다.
“큐티! 러블리! 프리티! 모두의 바니걸 소피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