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67화 (67/112)

〈 67화 〉 011. 첫 번째 토끼

* * *

누군가가 조용히 노래했다.

옛날, 옛날, 먼 옛날, 어느 잊힌 왕국에, 네 마리 토끼가 살았습니다.

***

농협통장을 손에 거머쥔 나는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월말이 되어 정산한 통장내역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예금주인 내 이름은 그대로였다. 계좌번호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출 내역이 미묘하게 늘어나긴 했지. 이것은 변화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수입이다. 수입이 달라졌다.

붉은 길앞잡이 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는 다달이 150만원 정도를 받았다.

육군 병장 월급만큼의 격려금과 그것보다는 나은 액수의 생명수당으로 이루어진 봉급이었다.

편돌이나 고깃집 알바보다야 잘 쳐주는 급여라고 할 수 있지.

무엇보다 사무실을 거처로 삼아 삶을 이어나갈 수 있으니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만 빼면)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보통 100만원은 내가 필요한 곳에 썼고 50만원은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효자가 났군, 하고 시답잖은 농담이나 던지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이번 달 통장에 생긴 변화가 너무 두드러진다.

“340만원…….”

일일이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한참 늘어질 사건을 겪었다.

덕분에 나는 공익 생활을 청산했고, 우연찮게 일자리를 얻었다.

과연 적절한 일자리인지, 애초에 일자리가 맞는지 하는 얘기들은 제쳐두자.

지금 중요한 건 그 급여다.

당초 약속은 연봉 4천만 원, 12로 나누면 대략 340이다.

따라서 매우 정확하게 입금됐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내가 이걸 정말로 받아도 되냐는 것인데.

340이면 어마어마하게 큰 돈은 아니다.

연륜이 있는 직장인이나 전문기술자에게는 적은 월급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22살이며, 뭐라 말하기 애매한 B등급 지정능력이 있을 뿐이다.

딱 잘라놓고 말해서 나는 이 월급이 부담스럽다. 내가 그렇게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말씀.

아, 직설적으로 말하니까 속이 좀 시원해졌어.

물론 B등급 지정능력자는 고급 공무원으로 바로바로 채용된다. 그만큼 귀한 능력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B등급처럼 파계종을 잔뜩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안 좋은 의미에서 예외적이다.

이런 삶을 누려본 적이 없을 뿐더러 생각해본 일조차 없다.

결과적으로, 거듭해서 진술하건대 매우매우 부담스럽다.

그저 돈이 많이 들어와 당황스럽다는 말을 현재까지 매우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당황스러워서 이런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340만원.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고 부모님에게 ‘너 장기라도 판 거 아니지?’하는 진심어린 걱정을 들을 수 있는 돈.

안정적인 삶……. 행복……. 자본주의적 만족…….

송해요, 교수님……. 더는 대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져 버려욧…….

여기까지 생각하자 자기 긍정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340만원 정도의 가치는 있는 인간이 아닐까?

아니,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 월급을 받는 건 ‘너는 귀한 목숨인 제갈랑을 지켜라.’라는 명령을 준수했을 때 가능한 거잖아?

그리고 실제로도 구했잖아? 그걸 넘어서서 흉물까지 물리쳤잖아?

이런 식으로 끝도 없는 자신감에 찌들어보고.

혹은 그러다가 ‘내가 한 게 뭐가 있냐…….’

아니면 ‘사실 흉물이 누구냐는 추리도 틀렸고……. 폴트가 안 왔으면 거기서 죽었을지도 모르고…….’ 하는 좌절감도 맛보고.

마지막으로 ‘이런 위험들을 앞으로 계속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가.’ 하는 걱정까지 다다랐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경험이었다.

나는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한 일에 대해 보상을 받고 내가 받은 보상에 대해 일을 하는 것조차 당황스럽게 느끼고 있다.

대학생은 정말로 어른이 아니구나, 하는 슬픈 생각까지 이르렀을 무렵.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아야.”

“월급 도둑.”

랑이었다.

다만 평소의 랑과는 다르게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물론, 랑이 이렇게 다짜고짜 팩트를 때려 박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며칠 전에 내가 저녁 찬거리 사는 대신 폴트와 술을 나눠 마시고 만취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저녁은 차려주지도 못하고 랑은 보쌈을 시켜먹게 되었다.

도착한 보쌈은 맛있게 먹었으면서도 랑은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다.밥이 없는 것보다 술을 마신 것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다.

내가 술 마시는 게 뭐가 나빠! 라고 말하면 정말로 양심 팔아먹은 짓이었기 때문에 며칠 째 구박을 듣고 있다.

랑은 여전히 화가 안 풀린 상태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때까지는 툭 칠 때마다 사과를 늘어놓자.

“미안.”

지금처럼.

랑은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과연 시간이 해결해 주기는 할까요?

“다시 공익이나 해, 바보.”

정말 무서운 말씀을.

월급이니 뭐니 제쳐놓더라도 공익 생활로 다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

그건 사람 자존감이나 내면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말하지만 나는 한월이는 아예 번호까지 지워버렸다.

걔들은 그냥 거기서 세상을 구하고 자빠졌으면 좋겠다. 난 빼고.

“그런 의미에서 휴대폰 소리 좀 줄여라.”

말은 그렇게 해놓고, 나는 내가 직접 랑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랑이 시청하고 있던 유튜브 사이버 렉카 채널에서는 ‘하젠야크트가……’ 어쩌고저쩌고로 시작해서 ‘인천의 일부 지정능력자, 특히 박한월 군……’이라는 언급으로 이어져 ‘많은 피해를 낳았습니다.’라는 결론으로 치닫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유에게 듣기로는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정보누설이 발생했다고.

그것과 하젠야크트가 엮이는 보도가 나오는 듯했다.

상당히 타당한 이론이기는 하네.

일단 정보누설 이후 남겨졌다는 플레이보이 마크랑 하젠야크트의 외관인 토끼랑은 상당히 잘 들어맞잖아?

그러나 분명히 밝히건대 나는 그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며, 당사자가 될 이유도 느끼지 못하고 있고, 또 당사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뉴스를 보고 경악하지만 별다른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외부인으로 남아있고 싶다.

내 절박한 동시에 소박한 소망이다.

간혹 친한 유가 저 사건에 관해 푸념을 늘어놓고 그러겠지.

하지만 그건 뭐랄까. 연예인을 건너건너 아는 친구에게 연예인 소식을 듣는 그런 느낌으로 넘겨버릴 것이다.

이 구체적인 비유를 떠올리느라 체력을 소모했을 정도로 나는 복잡한 사건과 엮이기 싫다.

굳이 뭔가 하고 싶다, 라고 말을 한다면 글쎄다.

내 앞에서 휴대폰을 돌려달라고 펄쩍펄쩍 뛰는 꼬마아이를 지키는 정도.

“앗! 앗! 돌려줘!”

“싫어, 인마. 또 보기 싫은 방송 틀 거잖아.”

“소리 줄일게! 아냐! 아예 안 틀게!”

“그냥 키를 키우는 건 어때.”

랑을 제압하는 것은 가뿐하다. 휴대폰을 쥐고 손을 머리 높이까지 올리기만 하면 된다.

“넷플릭스 볼 거야.”

“갑자기?”

“보기 싫다며. 트라우마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건가.

여기서 괜히 더 장난치면 발길질이 시작되므로 휴대폰을 돌려줬다.

랑은 정말로 넷플릭스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나도 같이 시청하기 시작했다. 둘이 착 달라붙어서.

내리 두 편을 시청했을 때 문득 출출해졌다.

간식거리로땅콩 같은 거라도 갖고 오려 찬장으로 향했다.

이윽고 초인종이 울려댔다.

정확히는 거실 한 가운데에 놓인 디스플레이에 ‘방문자 있음’이라는 메시지가 뜨며 요란한 차임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금수저들은 놀랍게도 집마다 이런 주택 관리 디스플레이를 갖추고 있는 모양이다…….

화면에는 편리하게도 초인종을 누른 사람의 얼굴이 드러난다.

아니. 드러나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보통 택배. 물건만 내려놓은 뒤 다른 층으로 가버린 것이다.

지난번에 랑이 은근슬쩍 게임 굿즈를 잔뜩 주문시켜서 잔소리를 좀 했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분위기가 풀렸는데 또 싸워야 하는 것인가.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현관문을 열었고.

“드디어 나왔구나.”

마주치고 말았다.

홈 디스플레이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작은 키를 가진, 결코 달갑지 못한 손님을.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에,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난번에, 그러니까 상당히 최근에 처음 마주친…… 한월과 함께 있었던 정체불명의 적안을 가진.

“네가 왜 여기에……?”

“가출했느니라.”

즉, 뿔이 달린 소녀였다.

***

“설명해.”

“모르겠다.”

랑과 나 사이에서 짧은 문답이 오갔다.

랑은 짜증나서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언짢기는 나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기분이 상한 이유는 각자 달랐다. 랑은 평화로운 저녁을 방해 받았고, 나는 어떤 거대한 사건의 여파가 내게까지 닿아오기 시작했다는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뿔이 달린 소녀는 잠옷 차림이었다.

바지는 분홍색 파자마였고 상의는 어울리지 않는 후드티였다.

아마 모자로 뿔을 가리는 용도 같았는데, 이런 안쓰러운 외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내가 이 뿔 달린 소녀를 현관문 너머에 내버려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일단 데리고 들어왔다.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아무튼 어린아이이고, 지금은 겨울이다.

나는 특별히 묻는 것 없이 집 안까지 녀석을 인도했다.

그리고 딱 그 타이밍에 앞선 문답이 오고가게 된 것이다.

“모르는 게 어딨어. 모르는 사람 왜 데려와.”

랑이 빠른 어조로 툭툭 쏘아붙였다.

반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때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사실을 언급하는 수밖에…….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춥고.”

“여기 내 집이야.”

랑이 완고하게 말했다.

“사실 이 건물 전체가 내 거야. 경비원 불러놓고 얼차려 시키는 것도 가능해.”

“하면 혼낸다.”

“경비원한텐 안 하더라도 너한테는 할 수 있어.”

보통 혼낸다, 하고 얘기하면 랑은 거기서 끊어버리곤 했다.

(농담이긴 하겠지만) 경비원을 불러놓고 얼차려를 시킨다느니 하는 건 보호자 입장에서 제지해야 마땅한 일이었기에 이번 ‘혼낸다’는 정당한 발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랑은 그런 사실을 제쳐놓고서 반박을 이어갈 만큼 화가 난 모양이다.

“얼차려, 할래?”

“아니요…….”

랑이 슬리퍼를 신을 발을 들어 내 허벅지를 꾹꾹 짓밟기 시작했다.

여전히 몸무게는 얼마 안 나가는 꼬맹이다. 또 악의를 담아 때리는 것도 아니기에 안마에 가까운 강도였다.

하지만 뭐랄까. 나보다 여섯에서 일곱 살 어린 녀석에게 발로 밟힌다는 건 정말 묘한 일인데.

뿔소녀는 랑이 나를 짓밟기 시작한 시점에 소파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좀전까지는 ‘이놈들은 뭔가.’하고 관찰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조치를 보고는 ‘아, 별것들도 아니로군.’ 쪽으로 돌아섰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게 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어나!”

“싫다.”

“야! 경비원 부른다! 나가! 얼른!”

“싫다고 분명히 밝혔느니라.”

“공익! 네가 쟤 좀 혼내! 쫓아내!”

“자, 자, 그만들 싸우고…….”

손뼉을 쳐가며 말렸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랑은 폭력이라도 불사할 터였다.그만큼 랑은 집에서 쉬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적당히 진화되고 나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보다 본질적인 방향으로.

“저기, 가출했다고 했지?”

뿔 달린 소녀는 자기를 말하는 것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눈짓으로 ‘그래, 너.’하고 대답해줬다.

그러자 가소롭다는 것처럼 피식 웃어버린 소녀가 말했다.

“그렇다만?”

아, 얘도 별로 안 좋아하는 스타일 같은데…….

일단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주고.

“그럼 역시 한월이네 집에서 뛰쳐나왔다, 이런 의미지?”

“흥, 그 무례한 작자는 언급할 의향조차 들지 않는구나.”

이거 말 빙빙 돌리는 거 봐라.

그보다 전에는 ‘한월 공’이라면서 마베 꼬마와 같이 칭송하는 느낌이었잖아.

어느새 표현이 달라졌다. ‘그 무례한 작자’로.

“아무튼 한월이네 집에서 가출한 거라고 생각할게. 한월이랑 싸웠니?”

그렇게 묻자, 뿔이 달린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윽고는 여기까지 어떻게 견디고 듣고 있던 랑이 소녀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뚜껑이 열렸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딱 자기 외관에 걸맞은 톤으로 ‘야! 나가! 나가라구!’하면서 날뛰기 시작했다.

영역의식이 강한 분이시지.

나는 랑을 일단 떼어놓고, 들어올렸다.

“놔, 놔! 놔아아!”

“잠깐만 있다가, 잠깐만 있다가…….”

어린애 취급을 하고 싶지 않지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굴기 시작했으므로 별 수가 없었다.

나는 일부러라도 등을 토닥거리며 랑을 진정시켰다. 또 뭐라고 날뛸 것 같았지만 의외로 랑은 발버둥치던 것을 그만두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제법 잘 안겨 있다.

어차피 긴 문답이 될 것 같지도 않으니 나는 그냥 안아들고 있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금 뿔이 달린 소녀에게 물었다.

“한월이랑 싸운 거 아니야?”

“모르겠구나.”

나는 돌겠구나.

“모르겠다는 건 무슨 의미?”

“일반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싸웠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다퉜다느니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니라.”

그럼 나랑 다투자는 거니?

쏟아지려던 말을 억지로 주워섬겼다.

“아무튼 뭔가 불화가 있었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하느니라. 불화가 있었다, 라는 표현이 실로 적합하겠구나.”

“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한월이한테 연락을 해볼 테니까 당사자랑 여기서든 어디서든 만나서 해결을 하자.”

“그 방도는 불가하다.”

나는 이번에는 이쪽이야말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의 불화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더 본질적인 것이고, 깊은 것이다. 그러니 말로써 행동으로써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대안을 찾아 이곳까지 왔느니라.”

“저기, 아까부터 말이 빙빙 돌고 있는데, 내 말은──”

“죽여 달라고 했다.”

뿔이 달린 소녀는 말했다.

분명하게.

단호하게, 확실하게.

아무리 비현실적인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뭐라고?’하고 되묻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내뱉은 것이다.

“짐을 죽여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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