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2nd Episode Epilogue. 그리고 그 사람도 있었다 (2)
* * *
“오빠는 변태예요! 오빠가 그런 남자인 줄 몰랐어요! 저는, 저는 진짜 오빠라면 어지간한 건 믿고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처받았다구요, 상처받았어! 오빠도 맥심? 그런 잡지까지 보는 거죠?! 성인잡지까지 일일이 사서 모으는 거죠?!”
야! 맥심 성인잡지 아니거든!
말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이름만 알고 직접 사서 본 적은 없다느니 플레이보이가 국내에 발매되는지도 모르겠다느니.
해명해도 딱히 믿어주지 않았다.
불신에 불신이 겹치는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한참이나 계속되는 변태 매도가 간신히 끝났다.
지칠 대로 지친 유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혹시 생각나는 거 없어요? 진짜 가벼운 거라도 좋은데.”
“일단 토끼니까, 하젠야크트가 번쩍 생각나긴 하는데.”
“저도 그 생각부터 하긴 했는데, 한월 오빠나 재인 언니가 만난 하젠야크트는 순수하게 전투적인 파계종이었단 말이죠.”
“으음, 그렇지만 여러 형태가 있다며?”
그 말을 듣고 유는 귀를 쫑긋거리는 토끼 같은 얼굴을 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한월이가 말해줬어. 그러니까…… 여러 형태가 있고 그래서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고. 상황 자체는 다르지만 자료가 없어졌다는 점에서는 겹치는 분야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으음, 여기서 의외의 추측까지 닿았네요. 고마워요.”
유는 그러다가 물었다.
“그럼 오빠가 생각하기에는, 음, 정보를 빼돌리고 흔적을 지우거나 하는 토끼 타입의 지정자나 파계종은 뭐가 있을까요?”
나는 잠시, 그 플레이보이 마크를 가만히 내려 보다가 이상한 두통을 느꼈다.
아마 라떼를 너무 많이 마셔대서 혈압이 안 좋아진 모양이다.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어. 그런 접점이 있겠냐, 나한테.”
“왜요, 있을 수도 있죠.”
“그런 건 한월이한테 많을 테니까, 얼른 가서 물어보지 그래?”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그건 너무 자기비하네요.”
그것은 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생각과 함께 몸이 확 굳어버렸다가 이내 풀렸다.
나는 느릿느릿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목소리의 주인, 한월이 서 있었다.
덤이라는 것처럼 후드를 뒤집어쓴, 간신히 소녀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기묘한 녀석과 함께.
그 소녀는 전혀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한월 오빠! 재인 언니 보러 병원에 갔던 거 아녜요?”
“그게…… 어쩌다보니까, 라고 해야 할까. 이 녀석을 데리고 가니까 재인이가 ‘또 여자아이군요……?’ 같은 정체불명의 말을 하면서 막 화를 냈다고 해야 할까.
아하하. 일단 기왕 쫓겨난 김에 이 녀석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고 있었어.”
그러면서 한월이는 후드를 살짝 내려줬다.
그 안에는 아니나 다를까 예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고결하고 도도하게 생긴 외관이 담겨 있었다.
재인만큼이나 새카만 머리카락에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보석에 비유하기에 모자랄 데 없이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바롱의 눈을 연상시켰다. 찝찝하게 말이야.
이어서 소녀의 머리에 돋아난 양뿔 같은 뿔을 보게 되었을 때, 찝찝함은 명백한 불쾌감으로 바뀌었다.
유는 미간을 좁히고 있는 나를 보더니,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아, 오빠! 그게요, 얘는, 뭐라고 해야 되나……. 그 정보 유출이 벌어진 현장에서 발견된 아이인데…….”
“짐은 무결하고, 또 무고하느니라.”
유가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망령된 자들이 짐을 의심해, 혹여는 하젠야크트의 일부일지 모른다고 평가해 짐을 가둬놓으려 했건만, 여기 있는 한월 공을 만나 목숨을 건졌느니라.
하여간에 발칙한 것들, 어떤 벌을 내리면 좋을지 감이 안 잡히는구나.”
얘는 또 무슨 속성이지? 마베 꼬마 짝퉁?
그렇게 단정짓기에는 미묘하게 말투가 다르다.
마베 꼬마의 경우 ‘~하였소.’처럼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가볍게 존칭하는 느낌으로 말을 끝냈지.
이 녀석은 마치 고관대작의 맏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느니라.’하고 끝내고 있었다.
어조의 경우도 마베 꼬마가 약간 어설픈 느낌이 있었다면 이 녀석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 현대 사회의 고관대작의 맏딸이라 할 수 있는 유는 평범하게 말하고 다니지만 말이지.
한월은 어색하게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확 낮추었다.
“아하하……. 죄송해요. 얘가 좀 버릇이 없어서.”
“버릇이 없다기보다는…… 좀 이상한데.”
나는 가만히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랑보다 한 서너 살 많은 듯한, 즉 외관상으로 중학교 3학년 정도에 해당하는 키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수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녀한테서 흘러나오는 위압의 형태였다.
그것은 파계종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니었다.
굳이 뭔가 뚜렷하게 정의 내려야 한다면 파계종과 인간의 중간 형태였다.
그 사실에 관해 묻자 한월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다들 좀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뭐랄까, 불쌍해서요. 얘가 감금당한 채 혼자 우는 모습을 봤거든요.”
“흥, 울지 않았느니라!”
“네, 보시다시피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요.”
한월은 뒷머리를 긁었다.
“아무튼 그래도 우는 녀석을 홀로 내버려두기가 좀 그래서, 일단 제가 허락을 맡아서 데리고 다니고 있어요.”
“허락을 맡은 게 아니라 억지를 부렸죠.”
유가 툴툴거렸다.
그래도 한월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한월은 유에게 조금 수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왜, 마베 꼬마랑도 사이가 좋잖아.”
“못 말려요, 진짜.”
그렇게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다 입을 타이밍에 나를 눈치 챈 유가 물어왔다.
“어, 오빠? 벌써 가시려고요?”
“어…… 응. 네 동생 저녁 찬거리 사러 가야지.”
“그래도 조금 더 얘기 나누다 가시지. 한월이는 간만에 보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기는 한데 뭐, 인사도 다 나눴고.”
나는 유와 한월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도.
이름은 아직 듣지 못했으나 별 관심은 없었다.
나는 한월의 번호조차 지운 지 오래였다.
모든 이야기에는 중심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외곽으로 밀려나는 누군가도 있는 법이다.
억지로 그 섭리를 거스르려고 하다간 별로 크지도 못한 코마저 다치는 수가 있다.
짊어질 수 없는 짐은 짊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영국에서 배웠다.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익숙한 노래 가사가 카페 어딘가에 있을 스피커로부터 흘러 나왔다.
의자를 집어넣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렇게만 하면, 어쩌면 저 뿔 달린 소녀마저도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
겨울을 알아차린 노을이 일찍 가라앉을 무렵이었다.
홀로 카페를 나서며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를 고독 따위를 느끼고 있었지만 가야 할 길 자체를 잃지는 않았다.
근처 마트에서 찬거리를 사가겠다는 당초의 계획은 아직까지도 유효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까 전 나와 같은 타이밍에 카페를 나선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선 눈에 들어온 복장은 웨이트리스의 것이었다.
원본의 출처가 불분명한 원피스와 프릴 앞치마가 팔랑거렸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당연히 얼굴을 보자고 하면.
“으음.”
잠시 눈을 씻어보았다.
하지만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고.
조금 지쳐버려서, 나는 무거운 톤으로 축 가라앉아 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아르바이트입니다.”
“아르바이트.”
“최저시급은 안 주더군요. 괜찮습니다. 몇 달 일하다가 노동청에 진정서만 제출하면 원만하게 해결됩니다.”
폴트, 아니 또 호칭이 헷갈렸다.
제니퍼 해밀턴이라는 본명을 떳떳하게 밝힌 영국인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앞으로 해밀턴이라고 정리해두자.
잘은 모르겠지만 영어권에서는 성으로 불러도 된다고 들었다.
원래도 폴트라고 부르고 살았고.
“제니, 입니다.”
“그래, 제니. 제니로 하자.”
“너무하시는군요. 제니라고 부르다니.”
“무슨 컨셉이야.”
“컨셉이 아니라 실화입니다. 제니라는 말에는 암탕나귀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한나진 씨께서는 제 존재 가치를 암탕나귀 수준으로 낮춘 것입니다.”
“하지만 네가 제니라고…….”
“농담입니다.”
해밀턴이 어깨를 으쓱하며 특유의 지루하다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감정이 실린 웃음을 보여줬다.
나는 아직까지도 실감이 안 나서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간신히, 이 인간이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서 화제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일 끝났어?”
“아뇨, 그냥 오늘 그만두려고 합니다.”
당황스러운 녀석이었다.
“무슨?”
“사람을 모시는 일은…… 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디서 영어 강사라도 하면 됩니다. 20대 금발벽안 백인 여성은 한국에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메리트가 있으니까요.”
그건 그래요…….
슬픈 얘기는 거기까지 하고.
“그런데 갑자기 왜 한국에? 그, 뭐냐, 영국에 남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습니다. 다만 일이 좀 꼬여서 말이지요.”
해밀턴이 이쪽으로 착 달라붙었다.
다만 특유의 장난을 치는 밀착이 아닌, 명백히 필요해서 저지르는 밀착이라는 느낌이 강해 별 인상은 남지 않았다.
그런 게 생기기도 전에 해밀턴은 확 수그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희가 영국 정부에 반납한 파계종의 팔 말입니다만.”
해밀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어나갔다.
“그런 팔이 존재한다느니, 그리고 어떤 파계종의 신체는 인간과 융합이 가능하다느니 하는 사실이 B등급보다 낮은 지정능력자에게는 기밀로 취급되는 모양이더군요.
물론 저도 특이지정자라서 B등급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긴 하지요.
그렇지만 원칙적으로는 그게 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라고 할까요.”
“하지만 흉물은 파계종의 팔을 단 걸 사실상 공개해놓고 다녔잖아.”
“괴담과 실화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법입니다. 저희는 실제 목격자가 되었고, 그들과 맞서 싸웠고 또 그것들을 도려내서 반납하지 않았습니까. 어물쩍 넘어갈 수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문제라도 생겼어?”
“거기에 관해서 문제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미 새어나간 사실이고, 제게 있어서 별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그걸 빌미로 뭔가 요구를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해밀턴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노을을 맞아 마치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제게 바롱의 안구를 요구했습니다.”
나는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말없이 해밀턴을 돌아보았다.
그녀도 말이 없이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일련의 과정이 내게 지난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절차에 따라 멜라니에게 부착돼 있었던 파계종의 양팔을 영국 정부에 반납했다.
순순히는 아니었다. 다소간의 강제력이 있었다.
애초에 그 팔들이 마땅히 돌려줘야 하는 영국의 국유물인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압수당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것들을 내가 따로 가지고 버틸 방법이 없었다. 내어주는 수밖에.
그러나 그에 반해서 바롱의 눈알은?
정부는 그날 밤까지도 내가 바롱의 눈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윌리엄이 그런 것을 사용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았다.
거둬들인 바롱의 눈알은 애초에 내게 주어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윌리엄이 사용하는 모습을 본 만큼 그냥 정부에 맡기는 수도 있었지만…… 결국은 내가 가지기로 했다.
그래서 그 눈알을 다시 적절한 용기에 담아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오늘에 이르러 나타난 해밀턴의 설명에 의하면 영국은 이미 그 눈알의 존재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자세한 과정은 그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영국 정부는 C등급 지정능력자가 알아선 안 되는 것을 알아버렸다며, 눈알을 내놓으라는 겁박을 늘어놨다고.
그러나 해밀턴은 둘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고 아예 이곳으로 빠져버리는 선택지를 했다고 한다.
영국에 유해를 반환해야 한다는 명문화된 법률이 없었다고. 범법자가 아니었던 만큼 손쉽게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해밀턴 양은 이제야 자유의 몸이 됐다며 기지개를 쭉 켠 뒤, 눈알을 달라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잠시 후, 해밀턴은 슬며시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물건은 위험합니다.”
정론을 말하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장착하고 빼내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더군요. 사적으로 확인을 해봤습니다만, 윌리엄과 멜라니는 신체에서 그것들을 떼어낸 지금까지도 환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가 있어?”
“원리는 모릅니다. 말 그대로 사적으로, 그날 밤 사건의 참고인 중 하나로서 어깨너머로 들은 소식이지요.”
일단 장착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고, 나중에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착하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문제점은 제거한 이후에도 계속된다.
결국 제거하는 건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긴, 떼어내는 순간 디메리트가 사라진다면 애초에 그렇게까지 나쁜 물건이라고 칭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원히 고통받게 된다. 위험한 물건에 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제 개인적인 권고입니다. 폐기를 하든지 한국 정부에 반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해밀턴은 내 손을 살며시 붙잡으며 말했다.
논리적인 추론과정과 그 결과만 놓고 봤을 때, 그 말은 실로 합당했다.
사용한다고 해도 데미지가 들어오는데 갖고 있다고 해서 좋을 만한 물건이 아니다. 부적이 되지도 못한다.
그냥, 불법으로 노획한 전리품이지.
어떤 관점을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그냥 없애버리는 편이 낫다는 결론만 도출된다.
하지만 만일에라도.
정말 만일에라도 그런 힘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그것은 윌리엄 지사장이 품었던 생각입니다.”
꿰뚫듯이 해밀턴이 따져 들어왔다.
나도 알고 있다.
윌리엄은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고, 어떤 형태로든 승리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고.
그 순간, 윌리엄은 망설임 없이 이 눈알을 사용했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보증한다.
내가, 정말 모독적이고 역겨운 말이지만 내가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1년 정도 거슬러 올라 그 여자 앞에 선다면.
그 여자가 아직 파계종에게 쫓기고 있고…… 내 눈앞에 꼭 어린애가 잘못 걷어찬 공처럼 바롱의 눈알이 굴러온다면, 그렇다면 나는.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눈알을 사용했을 것이다.
“저마다의 처세술이라는 게 있어.”
누군가는, 이런 힘조차 필요 없을 수 있다.
아니면 이런 힘의 제약조차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멋진 모습으로 싸우는 일류가 있다면, 어딘가에는 잔인하고 추한 방식으로 살아남는 삼류도 있으리라.
그러니, 당장 버릴 수는 없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습니까.”
“너무 심사가 꼬인 건가?”
“그래 보입니다.”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가급적이면 병원부터 가시는 게 좋겠군요. 제 생각에 이 증상은 중증 PTSD입니다. 병원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해밀턴은 은근슬쩍 팔짱을 껴 나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녀가 이끄는 방향은 병원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가까운 선술집이었다.
뭔 수작이냐고 묻자 해밀턴은 혀를 삐죽 내밀고서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말했다.
“원래 주인 통수만 쳐대는 메이드 아닙니까, 제가.”
암만 그래도 무슨 초저녁부터 선술집이야.
중얼거리려다가 말았다.
잡아당기는 가느다란 팔과, 그 근처로 살랑거리는 금색 머리카락이 이제 막 피어오르는 어스름의 색과 어우러졌다.
문득 황망해져 겨우겨우 움직이던 다리가 아예 멎어버렸다.
그러자 제니퍼 해밀턴은 뒤를 돌았다.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가 얼굴에 번져 있었다.
“벌써 밤이군요.”
그것은 이번에도 거짓말이었다.
하늘에는 별은커녕 달조차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채였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의 소음이 끼쳐왔다.
그 다음에는 문이 열리는 선술집의 술 내음이. 이대로 괜찮을까,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이러는 수밖에 없어.
남의 버릇을 흉내 내듯 어깨를 으쓱이곤, 그대로 들어섰다.
밤이 가까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