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64화 (64/112)

〈 64화 〉 2nd Episode Epilogue. 그리고 그 사람도 있었다

* * *

한국으로, 인천으로 돌아온 뒤 나흘 정도가 흘렀다.

그간 랑과 몇 차례의 실랑이가 있었다. 영국과 관련한 잡무 정리를 도우며 몰래 근처 오피스텔을 알아봤는데, 그게 랑에게 들킨 것이다.

랑은 이미 짐까지 옮겨 놓았는데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다고 바락바락 우겨댔다.

그래도 같이 사는 건 좀 아니지 않니? 하고 따져봤자 소용이 없었다.

자기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잠옷을 갈아입는 것도,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혼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랑 혹은 폴트에게 확인을 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금지 당했다.

애초에 애매하게 연수기간이라며 집에 들어온 내가 문제라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서로 편하게 근처에서 지내자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물론 랑에 의해서.

나야 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이고.

녀석을 돕겠다고 이미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어버린 이상 이렇게 되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래도 막상 같이 지낸다고 생각하면 참 묘하단 말이지.

그런 사소한 고민들이 물처럼 흘러가는 동안 TV를 비롯한 온갖 매체에서는 머즐드독스의 얘기로 뜨거웠다.

대기업 스캔들에는 늘 예민한 것이 우리나라 국민정서이자 언론의 특징이었지만, 솔직히 이번만큼은 유별날 만도 했다.

영국지사의 지사장과 그 일당이 흉물이라는 슈트까지 차려입고 대량 살상을 벌이질 않았나. 본사의 차녀는 계승서열을 엎겠다고 천명하질 않았나.

“태반이 왜곡된 기사들…… 이지만 말이지.”

자극적인 소재가 잡혔으니 자극적인 타이틀만 뽑으면 되는 것이다.

그 차녀가 윌리엄을 두둔했다느니 하는, 발표 도중에도 부정되었던 사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부각되는 기사도 있었다.

윌리엄이 본사의 지시에 따라 저런 움직임을 보였다는 음모론도 나돌았다.

“근데 랑이 넘어지는 동영상은 도대체 왜 돌아다니냐고…….”

그리고 왜 이게 조회수가 1위야…….

괄호 치고 ‘직캠’은 왜 붙여놨어, 아이돌이야 뭐야…….

온갖 애니프사들이 몰려와 ‘랑쟝 커여워’ 같은 댓글만 달고 있다.

이것들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싶은 찰나에 저어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도적으로 넘어뜨린 거죠?”

유였다.

랑과 내가 산 선물을 전할 겸해서.

그리고 말 그대로 영국에 있는 동안 몇몇 도움을 준 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동생을 데리고 가서 다치게 만들고 돌아온 사과를 하기 위해서 녀석을 잠시 불러냈다.

이곳은 송도 어딘가의 카페인 것이다.

“의도적이긴 뭐가 의도적이야. 두 번이나 자빠져서 얼마나 당황했는데.”

거기서 울음이라도 터뜨렸으면 대중들을 향한 이미지는 끝장이었다.

유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넘어졌냐는 질문은 그냥 농담 같은 것이었다.

대신에 유는 짓궂은 얼굴을 하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그것도 지울 거예요?”

“아니, 이건 내버려두려고.”

나는 대답했다.

여기서 지운다, 라고 하면 말 그대로 기사를 삭제해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기사를 쓴 기자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지울 수 있냐는 질문은 않는 것이 좋다. 나도 놀랐으니까.

암만 대기업이라지만 진짜로 기사를 지우고 수정하는 걸 청탁하고 그럴 줄은 몰랐다.

물론 우리나라는 언론자유국가이다. 삭제 수정을 요구하는 건 사실관계를 왜곡시키거나 지극히 편파적이고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기사에 한정된다.

그저 그런 기사라도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을 뿐이다.

도대체 네이버 뉴스에 있었던 그 무수한 추측성 보도들은 다 어떻게 유지되었던 거야?

아무튼 이런 이유로, 아까 말했던 윌리엄과 랑 사이의 관계성이 있다는 뜬금없는 기사들은 대거 잘려나갔다

.여기에 대해서 또 음모론이 피어오르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음모론이 될 뿐이다.

유는 실시간으로 기사들이 삭제되는 스마트폰 화면을 자못 익숙하게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유는 아까 내가 말했던 ‘그냥 내버려둔다’는 말에 에 관해 물었다.

발표 도중 자빠졌다는 망신스러운 기사를 왜 방치하냐는 것이다.

“이게 이미지에 좋잖아.”

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설명했다.

“그렇지만 뭐랄까, 언니 자리를 뺏어가는 버릇없고 나쁜 여자애 캐릭터가 붙으면 안 좋을 거 같아서. 그래서 그냥 내버려뒀어. 의외로 귀염성 있는 캐릭터를 붙여주려고.”

“으아, 완전 약아빠졌네요.”

“현명한 거야. 이미 네이버와 다음에 제갈랑 팬카페도 생겼는걸. 각각 회원수 3500명 1500명.”

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요? 제갈유 팬카페는 없어요?”

“있겠냐.”

농담 같은 질문에 농담처럼 대답해줬다.

사실, 너도 언론에 신상을 공개하면 10000명까지는 어렵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지.

이렇게 말해주면 왠지 어깨라도 툭툭 얻어맞을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흥분해서 지정능력이라도 튀어나오면 책상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건 일도 아니다.

잠시 이 카페에 있는 다섯 개 정도 되는 테이블을 공중에 띄우며 무시무시한 염동력 댄스를 추는 유를 상상해보았다.

그만뒀다.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던 윌리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저씨였다.

영국에서 흔치 않게도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는 기사가 어제인가 나돌아다녔다.

“어, 그런데 연애 관련 스캔들도 있네요.”

끔찍한 기억을 끊어주듯 유가 그렇게 말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를 듣자 조금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는 화면에서는 눈을 떼고 라떼를 들이키며 말했다.

“그래, 어떤 미친 인간이 윌리엄이랑 엮어 놨더라니까. 그건 고소할까 생각했어. 진지하게.”

“정말요? 근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인데요?”

“응? 다른 사람 누구?”

유는 희미한 조소를 머금으며 화면을 들이밀었다.

“오빠네요.”

무엇이라솔?

멍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자, 놀랍게도 정말이었다.

‘머즐드독스 차녀 제갈랑, 수행인과 비밀연애?’ 라는, 앞서 말한 두 팬카페 회원을 상대로 도발하는 듯한 타이틀이 박혀 있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화면 속에 시선을 박아두고 있었다.

그 감상이 끝나는 것은 잠시 후 유가 휴대폰을 자기 품으로 회수했을 때였다.

흥미롭게 웃으며, 유는 물었다.

“이건 어떻게 할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저장?”

고민할 것도 없이 삭제요청이었다.

***

랑이 산 초콜릿은 결국 둘이서 다 나눠먹게 되었다.

초콜릿을 하나하나 소모할 때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말해주게 되었다.

랑의 행적이 유와의 약속에 걸맞은지 어땠는지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유 본인은 그 연설 겸 발표 겸 선언만으로도 점검은 끝났다며 만류했다.

그래도 나는 이것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다.

“윌리엄은 지금 만족하고 있을까?”

그러자 유는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이제 그만 만족했으면 좋겠네요.”

아마도, 그게 정답이었다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늘어놓고 나니 이번에는 반대로 유가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할 차례였다.

재인은 의식이 없다고 했고 한월 또한 다쳤다고 들었다.

한월은 몰라도 재인의 사정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언급을 피했지.

결국 듣게 된 소식은 이랬다.

“재인 언니는 오빠가 한국에 돌아오기 전날에 깨어났어요.”

유는 침울한 어조였다.

“어제 밤에도 제가 만나고 왔어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앞으로 한 달 가까이 입원을 해야 한다나 봐요. 본인이 아픈 건 괜찮은데 그간 한월이 오빠가 어떻게 됐냐고 묻는 게 좀 안쓰러웠어요.”

안쓰럽다.

그것보다 좋은 표현이 없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재인 언니가 의식이 없는 동안 한월 오빠도 다친 주제에 여기저기 돌아다녔단 말이죠.”

“돌아다녀?”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유는 잠깐 홍차를 들이마셨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내인데도 그 한숨은 얼음처럼 굳어 천천히 흩어졌다.

“서울 쪽에서 지정자에 관한 정보가 누출됐거든요. 이게, 전례가 아예 없는 대사건이라서요. 이 사태 자체도 공인받은 B등급 이상 지정능력자한테만 공지됐어요. 오빠도 B등급 취득하셨다고 들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앗,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지정자 관리국에서 전화가 오긴 했다.

‘안녕하십니까? 지정자 관리국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하고 멘트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더 듣고 싶지 않아서 그냥 끊어버렸지만.

“근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대?”

“모르죠, 저도. 서울에 유능한 지정능력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게 가능했는지……. 사람이 했는지 파계종이 했는지 아무도 몰라요.”

유는 그렇게 말하고는 목소리를 더 낮추어서 이어나갔다.

“일단 인근에서 정신조작계 능력을 가진 B­등급 파계종을 찾아서 제압하긴 했어요.”

“아, 그 녀석이 저지른 거야?”

“그랬다면 이 사건이 미궁에 빠지지 않았겠죠?”

유는 또 익숙한 한숨을 쉬었다.

“그게요, 그 녀석은 B­등급, 그러니까 B등급보다도 못한 수준이어서 그런 광범위한 정보유출을 커버할 능력이 없었거든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범인 같은 녀석을 없애기까지 했는데도 정보 유출이 두 차례나 더 발생해서요. 부산하고 광주에서도 정보가 주르륵.”

“허어.”

정말 미스테리 그 자체인데.

여기까지 듣고 나는, 그래도 이 이상의 미스터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유가 “아참!”하며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제야 비로소 혼란의 끝을 보게 되었다.

“사라진 자료 대신에 이 이미지 파일이 남겨져 있었거든요, 이게 뭔지 아세요?”

그것은 말 그대로 이미지 파일, 정확히는 어떤 문양이었다.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의…… 토끼 모양의 아이콘이었다.

도대체 왜 여고생 휴대폰 액정에 플레이보이 아이콘이 튀어나온 것인가.

이것이 과연 정의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있는 찰나였다.

유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쩌면 이렇게 순수할까 싶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아침에 받은 이미지인데,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요.”

나는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말했다.

“이거 혹시, 플레이보이…….”

“플레이보이?!”

유는 뜬금없이 구체적인 고유명사가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며 추궁했다.

“플레이보이라뇨! 대체 뭐죠? 비밀결사의 암호명 같은 건가요?”

그것이 성인잡지의 이름임을 납득시키는 데에 약 30분이 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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