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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62화 (62/112)

〈 62화 〉 010.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6)

* * *

클로를 이용해 눈알을 뽑아냈다.

다소 징그러운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가볍게 힘을 주자 쑥 뽑혀 나왔다. 마치 뿌리가 덜 박힌 뿌리식물을 캐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이미 엄청나게 징그러운가.

양팔을 도려내는 것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멜라니는 그것들을 떼어내 줄 것을 재촉했다. 다시 팔이 돋아날 거라는 정체불명의 설명이 뒤따랐다.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완고한 소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고…… “정말로 돋아났다?!”

갈색의 매끈한 팔을 부끄럽다는 듯이 감춘 멜라니는 어설픈 한국어로 설명했다.

“이것, 원래 이러는, 봐요, 빌도 눈이 생겼어.”

그 말 그대로였다.

윌리엄 저 인간은 랑을 마구 때려댄 모습이 눈에 밟혀 딱히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사실 확인을 위해 살펴보니 눈이 다시 생겨 있었다.

참으로 편리한 시스템이군.

한가로운 생각을 하는 동안 마 도착한 경찰이 폴트와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전달받고 있었다.

얼마 없는 여유시간이다.

나는 이미 돌아본 것도 있고 해서 중요한 사실 몇 가지만 얼른 말해주기로 했다.

윌리엄에게.

“[용서할 마음은 없다.]”

이어나갔다.

“[당신은 사람을 죽였고, 또 이 꼬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후자의 경우 저 눈알의 영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걸 쑤셔 박는 걸 당신이 택한 것이니 나는 봐줄 수가 없다. 적법한 처벌을 받게 만들 것이다.]”

“[상관없네. 일이 끝나면 어차피 처벌받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웃는 낯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털털거리는 윌리엄을 두고 나는 [다만]하고 말을 끝어냈다.

“[사과를 할 기회는 줄 수 있다.]”

나는 랑을 앞에 세웠다.

윌리엄이 그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무시했던 것을 포함해 때린 것까지, 모두 사과해라. 처벌을 없앨 수는 없지만 이런 기회 정도는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그대로 시선을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눈물을 감추려는 행동 같았다.

“[고맙네.]”

그렇게 말하고는 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자네에게 온갖 무례와 잔악을 범하고 말았네. 사죄를 받아주시게.]”

“꼴도 보기 싫어.”

랑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내게 달라붙었다. 역시 용서는 저쪽에서부터 해줄 맘이 없었다는 거지.

어쨌거나 랑은 여기저기 몹시 아파하고 있기 때문에 병원에 데려갈 준비부터 해야겠다.

그때 폴트가 경찰을 대동하고 멜라니와 윌리엄 앞에 다가왔다.

지정능력자로 보이는 위압을 두른 남자도 서넛 포함돼 있었다.

멜라니와 윌리엄은 별다른 저항 없이 슈트를 반납하고 수갑에 묶였다.

이제 나도 내가 할 일을 해야지.

“폴트, 너도 사과해.”

약속했던 사과였다.

그지시대로 폴트는 곧장 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랑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랑은 사태의 전모를 모른다. 녀석에게 폴트는 그저 타이밍 좋게 나타난 우리 편이었을 뿐이었던 셈이다.

폴트가 어째서 내게 윌리엄이 탄 헬기를 화면으로 보여줬는지, 또 어떻게 타이밍 좋게 나타났는지는 설명이 안 된 채다.

여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해두자.

“그리고 폴트, 덩달아 이것도 사과해.”

“어떤……?”

“런던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직까지 엄마 찾냐며 깔본 거 말이야.”

물론 그건 아직까지 안 고쳐진 것 같기도 하다만.

“말투, 고쳐졌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둘은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뭐라구요?”

“뭐라고?”

되물은 두 사람 중 조금 늦게 되물은 녀석이 랑이었다.

이번에도 랑은 ‘뭐라는 것?’하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손뼉을 짝 쳤다.

“그래, 언제부터인가 그 것것거리는 말투가 고쳐졌어.”

그렇게 말하자 랑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자기 혼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의미 없이 주절거려보았다.

확실히, 그 것것 하는 어미가 사라져 있었다.

실로 장족의 발전이로군.

“성장했다는 거지. 이제 초등학교 저학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고학년 같아.

중학생이지만.

“대단하군요. 저는 저 말투를 교정시키려고 사흘밤낮을 고생했습니다. 끝끝내 실패했지만.”

폴트는 자기 말투가 변한 것처럼 놀라서 중얼댔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사과해. 쟤도 어느 틈엔가 쑥쑥 크고 있다고.”

“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러거나 말거나 랑은 아직까지도 자기 말투를 재현하며 당황해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의 목소리가 들릴 처지가 아닌 듯했다.

저러다가 또 원래대로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한숨을 푹 쉬고 있는 그때, 무엇인가가 나를 와락 덮쳤다

나는 또 지칠대로 지친 랑이 내게 기대 쓰러진 것은 아닌가 깜짝 놀랐는데, 감촉 자체가 랑과 달랐다.

실루엣도 마찬가지였다. 더 부드럽고, 차갑고, 미묘하게 키가 더 큰 녀석이 달라붙어 있었다.

“폴트?”

“저도 일단, 두 가지 말씀을 드릴 예정입니다.”

“그래?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은데 왜 이렇게…….”

“우선 폴트는 관두기로 했습니다.”

허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고친 성씨라고. 이게 멜라니가 했던 말에서 정정해야 할 사안 첫 번째였습니다. 본래 이름과 성으로 살자고.”

“어, 그래요. 그래서 원래 성이 뭔데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존댓말.

그러나 이것저것 따지고 알아먹을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라도 용건만 물었다.

밀착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이 녀석이 스파이 노릇을 할 때도 밀착은 했다.

오히려 그때 더 남심에 불을 지르게 차려 입고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뭐랄까. 지금은 뭔가가 다르다. 그때는 ‘열심히 유혹하는구나~’ 하는 감상으로 여유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만.

지금은, 음음. 그때와 달리 팔도 두르고 있고. 곁에서 랑이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노려보고 있고.

아무튼 다르다.

“원래는 해밀턴이었습니다. 흔해 빠진 성씨지요. 반전도 재미도 없습니다.”

“어, 그래요, 해밀턴…… 이네요.”

“하지만 제니퍼라도 불러도 좋습니다. 아뇨, 제니인 것으로 하죠.”

“둘이 무슨……?”

마침내 랑이 나와 폴트, 아니 해밀턴 혹은 제니를 번갈아보았다.

익숙해지지 않는 이름은 집어치우고 그냥 제니퍼라고 하자.

제니퍼는 즐겁다는 듯이 웃어보이고는 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이제부터는 영어로 할까요?]”

“[살려 달라.]”

“[하여간에 재밌는 말투입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좀 떨어져라.]”

“[눈치가 없군요. 감사인사를 하려는 겁니다.]”

“저기, 감사인사고 나발이고 일단은…….”

읍.

뭔가 기묘한 것이 볼에 닿았다

그때 확, 오렌지의 향취가 끼쳐왔다. 술에 절여놓은 것처럼 매끈하고 깊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향이었다.

그 향을 걷어내자 시각을 사로잡는 것은 새하얀 피부와 푸른 눈동자, 긴 속눈썹.

거기까지 머릿속에서 처리되니 촉각으로 넘어왔다.

볼에 닿은 것은 입술이었다.

“허어.”

뭔가, 뭐라고 말을 해야 했는데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길고 복잡한 수사법 대신 쏟아진 게 그 한탄이었다.

한참 입술을 붙이고 있던 폴트는 만족스럽게 뗀 뒤, 뱀같은 웃음을 지었다.

“영국식 감사인사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속겠냐? 어?”

내가 바보야? 어?!

“진짜입니다. 자유국가 아닙니까. 감사인사를 결정하는 건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이쪽도 자유국가거든. 영국보다 GDP도 높거든.”

“돈이 곧 자유라고 사고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아니면 감사의 마음은 돈으로 표현해라, 뭐 이런 겁니까? 영국식으로 더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암만 성인이고 자기 주관이라고 해도 이런 건 연인끼리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으엑, 한나진 씨와 연애라니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으엑, 하고 감탄하는 캐릭터였구나.

그리고 누가 연애한대. 누가?

“저는 까다로운 여자입니다. 봉급이 높고 학식이 풍부하고 잘 생기고 키 큰 남자를 원하지요.”

“공부는 잘하거든? 이름만 말하면 다들 아는 대학 다니거든?”

봉금도 우연찮게 많이 받게 됐거든? 키도 평균보다는 크거든?

“영국인은 서울대도 잘 모릅니다.”

별로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우리도 옥스포드 말고는 잘 모르니까 간신히 비겼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건 키스도 아닐뿐더러 내게는 첫 키스도 아니다.

영국식 감사인사도 아니긴 하겠지만 폴트, 아니 정정 제니퍼식 감사인사이기는 하다.

정말 오래간만에 내 또래의 여자랑 접촉을 했더니 매우 흥분하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그랬지만 침착한 인간이야…….

실로 침착하지…….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다.

재차 감사하다고 말하는 제니퍼를 보며 뭐라고 끝을 맺기 어려워서 뒷머리만 벅벅 긁다가 뒤를 돌아섰다.알아서 따라오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뒤를 돌았을 때는 런던의 허허벌판이 펼쳐진 게 아니라 울먹울먹한 소녀가 있었다.

울먹울먹?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랑이 있었고 울먹울먹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확 짜증이 솟구쳐서 눈물이 살짝 맺힌 모습이었다.

다친 부위가 많이 아프다든가, 뭐 그런 건…… 당연히 아니겠지.

다른 의미에서 짜증이 난 거다.

이쪽을 올려다본 채 한참 씩씩 거리고 있던 랑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는 것처럼 손가락을 휙 겨눈 뒤 당당하게 선언했다.

“해고야, 해고!”

물론, 이 근로기준법에 위배되는 해고는 3시간 뒤 철회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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