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010.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4)
* * *
한 차례의 비명이 런던의 허공을 가로질렀다.
윌리엄의 신체를 중심으로 세계가 뒤죽박죽 뒤섞였다.
무엇인가가 잘못됐다.폭주하고 있다. 날뛰고 있다.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소리 지르고, 뒤집고 헤집고 망가뜨리고 있다.
사념들이 헤아릴 수 없는 속도로 윌리엄의 머릿속에 쑤셔 박혔다. 윌리엄은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그럴 때마다 남아있던 헬기의 잔해나 건축물의 골재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나진에게도 랑에게도 심지어 멜라니에게도. 규칙도 무엇도 없는 염동력이 지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윌리엄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환청이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놈은 장난스럽게 조잘거렸다.
‘힘을 원하나? 같은 뻔한 소리는 재미없지.’
그 목소리는 영어가 아니었으나, 또렷하게 윌리엄의 인식 속에 아로새겨졌다.
함께 하자! 환청은 소리쳤다.
‘누구인가, 대체 누구야?’
윌리엄의 무의식이 맞받아쳤다.
그 힘겨운 목소리에 환청은 한참동안 키득거렸다.
‘정의로운 괴물.’
환청은 유혹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익숙한 말 아냐, 노인?’
그러자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익숙했다. 정의로운 괴물.
그것은 다름 아닌 윌리엄이 십 년간 집어삼켜온, 그러나 이제는 멜라니라는 소녀에게 물려준 업보의 이름이었다.
윌리엄은 가까스로 말했다.
“[정의롭고 싶어.]”
윌리엄은 간절하게, 자신의 앞에 선 환청의 주인을 주와 같이 모시며 그렇게 간청했다.
‘제발, 정의롭고 싶어,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위해 서고 싶어, 누구도 울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단 말이네.’
그러자 환청은 그림자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대체 얼마나 훌륭한 건지 모르겠군. 누구도 울지 않는 세상. 화합하는 인류. 단결하는 하나!’
그리고 환청은 은밀하게, 그 간청에 대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하나를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도려내야만 해.’
그래, 맞다. 윌리엄은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다. 희생 없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물론 윌리엄은 언제나 그 희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질 모든 비난과 책임을 감각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을 위한다는 멜라니의 손길조차 거두기로 한 것이다.
더 완벽해지기 위해. 누구도 울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말할 기회만 준다면 윌리엄은 그것이 야훼든 사탄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니 이제, 거짓된 쪽을 도려낼 시간이다.
세상이 개벽했다. 염동력이 걷혔다. 윌리엄은 일어섰다
멜라니가 그를 돌아본 채 울고 있었다. 윌리엄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더는, 싸우지 않아도 된다.]”
윌리엄은 잘려나가지 않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흉물이 이곳에 있어.]”
***
나진은 랑을 감싸 안았다.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랑을 구하고 무사히 지켜내는 것이었다.
둘째는 영국 경찰과 지정능력자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목표는 이제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나진에게는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는 결코 쓰러지지도 않고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
나진은 염동력을 휘두르는 바롱을 상대로 홀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랑을 손에서 놓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르다. 나진은 확실하게 랑을 붙잡았고,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같은 힘을 휘두르는 윌리엄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대처할 방법은───
생각이 툭, 끊어졌다.
윌리엄은 왼팔을 높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 동작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나진은 염동력에 의해 압력을 받을 수는 있지만 쓰러지거나 물러서지 못한다.
윌리엄이 건물 잔해와 헬기의 부품을 집어 던졌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진은 그저 등을 보이고 랑을 끌어안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을 무마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윌리엄은 바롱이 아니었다.
한 차례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윌리엄은 들고 있던 왼팔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다고 해봤자 나진은 마찬가지로 버티고 설 것이다.
바롱은 그 무의미한 시도를 하다가 결국 쓰러졌다.
어쩌면 윌리엄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그것이 맹점이었다.
윌리엄은 어째서 바롱이 실패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염동력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나진의 양팔을 상냥하게 붙잡았다.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신사적으로, 나진의 양팔을 끌어당겼다.
그래, 그것은 끌어당겼다.
결코 쓰러뜨리려 하지 않았다.
나진의 안면이 경악으로 젖어 들어갔다. 나진은 어떠한 형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서히 끌어당긴다면?
그것도 무너뜨리겠다든지, 짓눌러 망가뜨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친절하게 양팔을 벌리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것은 결코 쓰러지는 것이 아니므로.
제아무리 쓰러지지 않는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진의 양팔이 완전히 풀렸다.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나진은 그저 버티고 설 뿐이었다.
그 앞에 움츠린 채 윌리엄을 올려다보고 있는 랑은 마치 번제물처럼 보였다.
윌리엄은 통쾌하게 웃었다.
“[고작 이것인가! 이것을 신념이라고 박아놓았다니, 형편없는 박제로군!]”
윌리엄이 다시 손을 허공에서 휘저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오른쪽 눈동자가 새빨갛게 번뜩이고, 마찬가지로 조율되는 음표들처럼 사방에 깔렸던 잡동사니들이 일렬로 섰다.
그래, 윌리엄은 이제 무방비 상태에 놓인 랑을 염동력으로 짓눌러 죽이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 첫째로.
“[모든 지정능력을 자네 방향으로 돌린단 말이지!]”
윌리엄은 경탄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경탄의 끝으로 손가락 끝을 슥 내리눌렀다. 그러자 몇 개의 잡동사니들이 랑에게 날아들었다.
당연히, 나진은 그것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것이 경험적인 지식이었다.
윌리엄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윌리엄이 당장에 랑을 죽여 버리지 않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해야 할 것이다.
윌리엄은 천천히 걸어왔다. 나진은 멈춰선 그대로고 랑은 굳어 있다.
윌리엄은 공중에 띄워 놓았던 잡동사니들을 모조리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대신, 스스로의 왼팔을 허공에 들어 그대로…… 랑의 뺨을 갈겼다.
“[자네들은 범해선 안 될 지점을 건드렸네.]”
갈겼다.
다시, 갈겼다.
갈기고 갈기고 또 갈겼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학대극이야말로 두 번째 이유.
윌리엄은 랑의 몸을 짓눌러 터뜨려버리겠다느니,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당했던 것을 처참하게 돌려주고 싶다고 바랄 뿐이다.
“[그만해!]”
보고 견딜 수 없었던 나진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온몸에 쓰러질 수 없는 압박감이 달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뺨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부르터지는데도 윌리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통쾌함을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편안한 것을!]”
윌리엄은 그렇게 감탄했다.
“[나는 충분히 이럴 자격이 있었어! 그래, 맞아, 이 목소리가 말해주는군! 나는 자네들에게 억눌려 있었을 뿐이야! 내가 짊어질 짐에 멋대로 뛰어들어 헛소리를 늘어놓는 기생충 같은 놈들,] 네놈들을 모조리 망가뜨려 주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윌리엄은 왼손으로 얼굴을 거머쥐었다.
“[얼른 빌어보게.]”
짝, 다시 윌리엄이 랑의 뺨을 후려쳤다.
그대로 스르륵 랑은 주저앉았다. 작은 어깨가 천천히 떨려왔다.
윌리엄은 그제야 하핫, 하고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이질감이 섞였다.
“젠장, 이렇게 말해야 하겠군. 내 말은 그래, 빌어보란 말이야, 어서! 도와달라고! 누구라도 좋으니까 도와달라고! 이곳의 아이들은 매일 밤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가!”
웃음 섞인 정의감이 윌리엄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자네들이 도대체 뭐가 잘났다고? 무슨 대단한 업적을 이룩해서 어떤 아이들이 공포에 떨며 선잠을 자는 동안 따뜻한 호텔방에서 안락한 휴식을 취하지? 자네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자네들 손으로 지킬 수 있는 사람도, 만들어갈 미래도, 그 무엇도 없어!
이제부터 내가 모조리 부숴버릴 테니까.”
윌리엄은 랑의 옷깃을 잡아 올렸다. 나진은 다시 괴성을 지르며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 걸음은 느렸고, 그저 쓰러지지 않았다.
윌리엄은 멱살이 붙잡힌 랑을 짐짝처럼 질질 끌고 몇 걸음을 물러서는 것으로 아까와 같은 거리를 벌렸다.
윌리엄이 다시 아무런 지정능력도 없는 맨발로 랑을 걷어찼다.
나진은 이번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윌리엄은 포효했다.
“그런 주제에 뭐라고? 자네였다면 깔끔하게 포기했을 거라고?”
참을 수 없는 격노를 윌리엄은 입에 담았다.
그래, 당치도 않는다. 윌리엄은 다시 뺨을 갈겼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윌리엄은 하늘을 향해 노성을 내질렀다.그와 함께 염동력이 퍼져나가 사방에 분진을 일으켰다.
윌리엄은 다시 발로 랑을 걷어찼다. 그제야 랑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윌리엄은 멈추지 않았다. 걷어차고 다시 걷어찼다.
나진은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란 말이다, 빌어먹을 연놈들. 너희들이 생을 이어가기 위해 그 번지르르한 말을 지껄이는 동안 버림받는 수많은 영혼을 생각해! 그것에 비하면 지금의 희생은 싸구려에 불과하지 않나!”
윌리엄이 그렇게 일갈하자 랑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랑은 도망쳤다.
작은 몸집과 짧은 다리로, 달아났다. 그러나 덜덜 떨리던 다리는 금세 꼬여 랑은 앞으로 자빠졌다.
윌리엄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윌리엄은 쫓아가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나진이 울부짖고 또 울부짖어도 윌리엄은 그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윌리엄은 왼팔을 들어 주변의 먼지를 한 데 모았다.
아가리를 벌린 독사처럼 하늘을 향해 치켜든 먼지덩어리가 한 방향으로 향했다. 랑이었다.
나진의 능력은 랑으로 향하는 공격적인 지정능력을 차단하는 것조차 포함돼 있었으나, 그것과 별개로 작용하는 지정능력에는 효과가 없었다.
일찍이 바롱이 자신의 능력으로 허공에 띄운 분수대를 내던져 랑을 죽이려고 했지.
원리는 같았으나 과정은 반대였다. 윌리엄은 랑의 발밑에 먼지의 장판을 만들어 움직이는 것으로 랑을 한꺼번에 끌어당겼다.
그 속도는 결코 나진이 다리로 뛰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진이 반사적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 윌리엄은 이미 멀쩡한 한손으로 랑의 머리채를 붙잡은 뒤였다.
지정능력이 아닌 그 힘은 랑을 가볍게 움직였다. 반항하는 윌리엄이 랑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거의 다 다가온 나진에게 염동력을 쏟아 부었다.
물러서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는다.
그 말의 무의미함을 윌리엄은 깨닫게 만들었다.
가까스로 나아가는 속도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씹어…… 먹을…….”
나진이 바드득 깨문 이빨 사이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동안, 윌리엄은 랑을 내려놓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미 날아갔던 헬기의 잔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환청 속에서 바롱이 울부짖었다.
드디어, 드디어, 다시금, 다시금!
윌리엄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젓고,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더 많은 이들을 위해서다.]”
헬기의 잔해가 바닥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닥에는 딱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잔해는 고작해야 가정용 가구 정도의 크기. 그러나 어린아이의 육체를 짓뭉개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앞으로 단 1초.
굉음을 토해내며 새카만 잔해는 하늘을 휘저었다.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저 여기까지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