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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55화 (55/112)

〈 55화 〉 009. 그래서는 안 되는데 (6)

* * *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세 가지 일을 동시에 벌였다.

첫째, 일단 나는 런던으로 이동한다.

둘째, 경찰의 도움을 빌린다.

셋째, 한국에 상황을 알린다.

우선 택시로 런던까지 이동.

택시기사는 웬 동양인이 런던까지 가 달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긴 했지만, [더블!]하고 외치자 검문소까지도 자기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충직하게 말해줬다.

여기서 내 사비가 전부 털리는군. 감안하도록 하자.

택시를 타면서 이어갈 문제가 남았다. 경찰에 연락하고 한국에 상황을 알린다. 둘은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다가 내가 이런 위기에 봉착해 있으니 영국에 연락을 취해 달라, 하고 부탁하는 것이다.

굳이 이런 복잡한 방식을 택한 이유는 택시기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나아가는 도로 너머에 무시무시한 흉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더블로도 모자라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통화는 한국어로, 정확히는 문자를 한국어로 보내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부터 전화가 왔다.

3초만 기다렸다가 바로 받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찌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였다.

­제 동생이 납치를 당했다니 무슨 소리인가요?!

“어, 음, 잠시만. 설명할 시간이 모자라.”

­핫? 장난이죠? 장난이군요? 이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주제로 장난을 치셨겠다?!

……오래 걸렸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다.

윌리엄이 랑을 데려갔다. 안전을 보장하고 있지만 자신이 하려는 일이 끝날 때까지 데리고 있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윌리엄이 흉물이라는 정체불명의 지정능력자를 부리고 있다.그들은 런던이 세간의 주목을 받아 구호받기를 원한다.

그 목적을 위해 그들은 런던에서 ‘죽여도 된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죽일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유는 말이 없었다. 통화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고 순수하게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뭔가 말하려고 했다. 지나치게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혹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것들을 입에 담기 전에 유는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많이 변했어요.

“응?”

­아, 이건 어감이 이상한가. 그러니까 뭐냐면, 그, 오빠 많이 달라졌어요. 아주 많이요.

잠시 침묵이 오갔다.

­저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저랑 약속해서?

“그런 것도 좀 있어.”

­그래요. 고마워요. 저도 일단, 말씀하신 대로 경찰에 연락해보구요. 또 총수한테도 얘기해 볼게요. 그리고 뭐야, 잘 해결해서 한국 돌아오면 제가 밥이라도 살게요.

거기서 통화가 끊어질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유는 머뭇거리며 ‘그런데요’하고 덧붙였다.

유는 그 말을 인정하기 싫다고 절실히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절대 랑이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노력할게.”

­응, 정말 고마워요. 밥은 제가, 진짜 맛있는 걸로 살 테니까.

“그래. 아무튼 지금은 일분일초가 급하니까 이만 끊자.”

­앗, 잠깐만요, 한마디만 더.

그때 나는 끊기 버튼을 눌렀다.

까닭에 뭐라고 더 대답할 틈은 없었다. 말을 내뱉은 유 자신도, 통화자인 내가 마지막 한마디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확인할 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짧은 한마디가 남았다.

­오빠도 다치지 마세요.

***

런던까지는 몇 시간이나 소모되었다.

변경지대에 들어서 검문소 하나를 마주쳤다.

택시기사는 자기가 여기 인심은 훤히 꿰뚫고 있다며, 지인이 있는 검문소이니 어떻게든 통과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면서 그는 차를 세워놓고 불이 켜진 검문소 부스로 달려갔다.

그러나 직후 기사는 당황한 듯 굳어버렸다.

그는 한 1분 정도를 그렇게 서 있다가 망연히 차로 돌아와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웬 술 취한 여자가 혼자 있는데?]”

“[무슨 말인가.]”

“[그게, 젠장, 나도 좀 황당해서 뭐라고 전하면 좋을지 모르겠소만, 술에 취한 여자가 드르렁쿨쿨 자고 있단 말이오.]”

술에 취한 건 당신 같은데, 라는 말을 이제 와서 할 수는 없었다.만일 거기서 이 기사가 만취상태라고 판단하면 나는 두 시간동안 음주운전 차량에 탑승해 있었던 셈이니까.

별로 믿을 마음은 없었지만 일단 나도 차에서 내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방해인가 싶어서, 일이 꼬이면 무작정 검문소를 뛰어서 통과할 셈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당신은 돌아가도 좋다.]”

“[응?]”

“[금세 데려다줘서 고맙다.]”

“[아는 여자요?]”

“[그건 당신이 알 바가 아니지. 여기, 요금이다.]”

기사는 의이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무튼 약속했던 더블이니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그가 도로 택시에 올라타고, 또 그 택시마저도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자 나는 검문소의 문을 열려 있었다.

택시기사가 지칭했던 그 만취녀는 반은 잠들고 나머지 반은 깨어 있었다.

나는 깬 상태의 그녀에게 말했다.

“폴트, 짧게 설명해줘. 널 보니까 갑자기 머리가 확 아프다.”

***

“우선은, 으흥, 좋아합니다.”

“몇 캔 마셨어?”

“사랑에 숫자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거 그렇게 쓰는 말 아니거든……. 그래서 몇 캔이야.”

“여섯?”

미치겠군.

지금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취객은 무시하고 지나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여자한테 볼일이 남아 있다. 사실 런던에 오면서 먼저 만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이쪽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 일단은 먼저, 도와달라는 게 우선이었다.

흉물이 어디에 있을지 나는 모르지만 이 여자는 런던 전역을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뭡니까아, 대답은 안 합니까?”

“야, 야, 너 많이 취했어.”

“전혀요. 영어도 안 하지 않습니까.”

뭔가를 더 생각하기 전에 폴트는 내 목에 팔을 감았다.

갑자기?

우리가 뭐, 친구니 선후배니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했지만 아무튼 불타는 청춘이란 말이지?

암만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 달라붙는 건 좀 그렇단 말이지?

게다가 폴트는 지금 배꼽까지 보이는 크롭티에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돌핀팬츠만 입고 있다.

연중 온화한 런던이라고 해도 추워 보일 지경이다.

그런 상태에서 폴트는 나를 꽉 껴안은 것이다.

오해의 소지 같은 건 없다. 운 나쁘게 넘어져서 몸이 겹쳤다든지,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했다든지, 그런 일이 아니다.

폴트는 비록 술에 취했지만 자기 의지대로 나를 껴안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 몸으로부터 냄새가 확 끼쳐왔다.

주취에 뒤덮인, 그러나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한 냄새.

폴트는 스스로의 말랑거리는 가슴이 내 가슴에 닿는다는 걸 알면서도 미묘한 웃음만 지으며 파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답은 없습니까아?”

“갑자기 왜 그래?”

“좋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자가. 그럼 남자는 대답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설명이 안 돼.”

나는 잠시, 폴트의 허리에 손을 얹고 그대로 붙잡아 떼어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폴트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손 안에 잡힌 하얀 허리 살이, 탄탄하고 또 축축했다.

그대로 이쪽에서도 확 껴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고 나는 물었다.

“무슨 연유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 좋아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고자입니까?”

“아니, 전혀 아닌데.”

아니라서 지금 미치겠거든.

“그럼 뭡니까, 술 취한 여자가 이렇게 밀착해서 좋아한다고 하면, 뭐, 다른 의미가 있습니까? 굳이 제가 어디가 어떻게 좋고 어떻게 마음에 들고 이런 얘기를 해야 합니까?”

“해봐.”

폴트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아마, 내가 망설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짜고짜 해보라고 직언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연애 경험 미달이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사귀어본 한 사람이 전부. 그나마도 그 여자, 수아는불미스럽게 운명을 달리했다.

여자에 관해 트라우마를 가진 내가 직접적으로 나를 좋아하는 이유 같은 걸 물어볼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그거 상당히 옳은 판단이었다.

나는 솔직히 나를 좋아한다고 다짜고짜 진심을 고백하는 여자에게 그런 시시콜콜한 따지기를 벌일 수 없다.

그렇게 말해준다니 기뻐, 하고 대답할 뿐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정의에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이 고백이 진심일 때의 이야기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진심으로 고백했을 때, 나는 아마 연애에 익숙하지 못해 덤벙거리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으로 돌아가 얼굴을 붉히고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폴트에게. 냉정하게 해보라고.

그러자 폴트는 다시 내 목을 휘감고 그대로 볼까지 입술을 들이밀었다.

결코 볼에는 닿지 않는 입술을 내 귀로 갖다 대며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술 취한 사람답게 흥얼거렸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내가 갑자기 좋아?”

“네에.”

“어느 정도로?”

“여기서 당장, 해버려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슨 술을 코로 마셨니?”

“취하면 솔직해지는 타입이라고 해둡시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았다.

아주 오래 걸렸다.

그대로 폴트의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생각이 끝나버렸을 때 결론은 순식간에 떨어졌다.

나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수도 있지.”

말했다.

“그런 사람도 있어. 어째서인지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식으로.

편의주의적인 거야. 길가다가 누구랑 부딪혀서 넘어지면 그 여자애가 내 허리 위에 올라타 있고, 알고 보니 그 여자애는 어렸을 때부터 날 짝사랑해온 소꿉친구였던 거지.

혹은 그럴 수도 있어. 그냥 좋아요, 오빠가 너무 좋아요, 하고 이유 없는 호의와 사랑을 받는 거. 그런 게 가능한 사람도 있어.”

하지만 말이지,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폴트를 밀쳐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폴트는 마치 더는 견딜 여력이 없을 정도로 상해버린 폐목처럼 툭,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좋아하는데요.”

그 무뚝뚝하면서도 어딘가 달아오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확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폴트가 피식 웃었다.

“너무 자학하는 거 아닙니까?”

“그보다는 그런 환상적인 내용이 나오는 만화를 덜 본 거야. 원피스랑 나루토만 보고 자랐거든.”

“그 뭐냐, 원피스라면 저도 봤습니다만, 핸콕은 루피를 그냥 좋아하지 않습니까?”

“너는 덜 보지 않고 대충 봤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유일하게 자기한테 들이대지 않으니까 역으로 좋아하게 된 거야. 나한테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타입이지. 구준표라든가.”

폴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 진짜, 그렇게 꼭 복잡하게 따져야 합니까? 남자가 눈치 없습니까? 우리 둘 다 성인입니다.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 나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방금은 분위기 타서 한 번 정도는 해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마워. 근데 내가 지금 시간이 너무 없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한국인은 상당히 보수적이야. 그 공략법은 틀려먹었어.”

“제가 한국에서 얼마나 자주 헌팅을 당했는지 들으시면 놀라실 테지요.”

“별로 안 궁금해. 아무튼 이 이야기는 됐고.”

클로를 꺼냈다.

“왜 나를 속였어?”

“글쎄요. 이건, 말입니다.”

폴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 말고.”

“네?”

“지금 얘기하는 거 아니야. 지금은 내가 묻는 이야기의 연장선상. 그러니까 다시 물어볼게.”

이제 내가 왜 이 유사 메이드를 만나려고 했는지 소개할 차례다.

말했다시피 시간이 없다. 신속하게 하자.

“왜 우리를 속였어?”

검은 눈동자와 파란 눈동자가 마주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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