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53화 (53/112)

〈 53화 〉 009. 그래서는 안 되는데 (4)

* * *

크하핫.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크하하핫! 그는 참을 수 없는 듯했다.

크하학! 노인과 신사가 뒤섞인 목소리 사이에서 바람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들어왔다. 크하하하하학! 아학! 노신사는 한참을, 어쩌면 이대로 웃어대다가 숨이 끊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웃음을 토하다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지?]”

“[당신은 어제 사장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가 사내에서 활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어떤 일거리가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건 너무 부실한 설명이군. 가령 내가 교회에 가서 오늘 무례를 저지를 자네를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수 있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당신은 한쪽 손이 의수라고 했다. 그리고 마치 짝을 맞추기 위해 그런 것처럼 양손에 하얀 장갑을 찼지. 그러나 내게는 그 내용물을 감추겠다는 의도가 엿보일 뿐이다.]”

“[흠, 흉물의 양손이 파계종의 것이라는 사실은 직접 들어서 알고 있지.

그렇지만 그건 비약이로군.나는 말했지만, 정말로 내 손을 파계종에게 뜯어 먹혔을 뿐이야.

게다가 설령 흉물이 맞는다고 해도, 그래도 흉물이 런던의 300인을 죽였다고 단정 지을 근거는 없지 않나?]”

“[당신의 팔에 관한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런던에서 벌어진 상황은 흉물의 짓이다.

내게 그 상황에 관해 자세히 말해준 사람이 있는데, 그녀는 지난밤 런던에 파계종의 힘을 휘두르는, 그러나 파계지점과 무관하게 활동하는 동시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존재가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윌리엄은 그제야 눈썹을 까딱거렸다.

“[호오. 그 대답은 상당히 의외로군. 누군가가 증언을 해줬다고.

그래, 좋아. 그 증언까지 온전한 사실이라고 쳐두지. 나와 협력중인 흉물이 사람들을 죽였다고 쳐.

그럼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서, 내가 흉물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뭔가? 어째서 내가 흉물이지?]”

“[당신은 내가 지정능력자인 것을 단숨에 알아봤다.]”

윌리엄의 동공이 부풀어 올랐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자네도 지정능력이니 알겠지만,’ 같은 소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머즐드독스에 정식으로 입사한 사람이 아니어서 당신에게 정보가 갔을 리 없다.

당신은 내가 영어가 가능한지조차 모르지 않았던가. 또한 이곳에서 어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에게 지정능력에 관해 입에 올린 적은 없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내가 지정능력자라고 전제를 삼고 말했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내가 지정능력자임을 밝혔다는 한 사람은 바로 흉물이다. 당신과 만나기 직전 나는 흉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그리고 흉물과 헤어진 직후 우리는 멜라니와 당신을 만났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내 사정을 알고 있었지?]”

“[그거야…….]”

흠, 하고 윌리엄은 잠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가.

“[그거야 흉물이 내게 알려줬을 수도 있지. 직접 만날 시간은 자네 말대로라면 없었을 테지만 전화 연락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겠나.]”

“[그날 밤 런던에는 파계지점이 발생했다. 원활하게 통신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가? 그래, 뭐 그렇다고 치지. 자네가 정답을 고했다고, 그렇게 치자구. 자네가 놓친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어쨌거나 끝이 없을 테니까.]”

노신사는 밤하늘에 가득 찬 달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밤바람이 멀리서부터 불어왔다. 냉랭하고 습윤했다. 수갑처럼 채워진 건틀릿을 원망스레 바라보던 노인은 흘깃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동작은 마치 무엇인가를 내려놓는 과정처럼 보였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가?]”

“[당신의 양팔은 구속되었다. 싸울 수 없다. 포기하라.]”

“[어떻게 할 거냐고 질문했네만.]”

잠시 침묵.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물을 것이다.]”

“[물어서 어쩌려고?]”

나는 침묵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네.]하고 노인은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서는 안 돼. 그런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노인은 나 혹은 자신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이 마치 어떤 기도처럼 변해갈 무렵 노인은 다시 한바탕 웃어재꼈고, 그 다음에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얼굴을 했다.

노인의 입으로부터 건조한 목소리가 흘렀다.

“[런던을 위해서였네.]”

“[런던을 위해서?]”

“[자네들이 버리지 않았던가.]”

그 목소리에서 건조함에 걷혔다.

장막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것은 이글거리는 분노였다.

“[세상의 한 가운데서 런던을 잘라내어 마귀가 들끓는 복마전을 만들어놓지 않았느냔 말이야!]”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이렇게 해도 되는가?]”

잠시 말을 섬겼다.

“[당신은 런던의 범죄자들을 죽였다. 물론 이곳 사람들은 그런 구체적인 사실은 알지 못하고, 그저 300명의 시민이 무참하게 도륙 당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이제 와서야, 정말로 뒤늦게 런던 안의 광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신은 이 변화를 원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된다는 건가? 사람들이 런던을 구하고 싶다고 바라게 된다면, 그러면 이걸로 충분한가?]”

말했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범죄자 300명을 죽였는지 나는 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300명을 죽여서 더 많은 사람을 살린다면 그것은 고귀한 일이다, 라고. 물론 잠시 고민은 했겠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라고 느꼈을 테니까.

그러나 희생자들은 어차피 ‘악’에 속하는 사람들이니 문제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했을 것이다. 영광스러운 일에 쓰임되는 것이라느니, 그딴 식으로 생각했겠지.]”

물었다.

“[만일 사람들이, 그래 영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런던을 버렸으면, 그래서 그 도시는 무너졌고 수많은 고아와 난민들이 들끓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면 이렇게 해도 된다는 건가?]”

정적.

정적.

더 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정적이.

그러나 아니다. 정적은 누군가가 입만 열어도 사라지고 만다.

“[자네가 모르는 것이 두 가지 있네.]”

노인은 자신이 지워낸 정적을 다시 몰고 왔다.

그 고매하고 중후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설득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를 응시하며 내가 무엇인지 관찰하겠다는 심미적인 태도만이 가득했다.

노인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자네가 모르는 것, 우선 그 첫째는, 나는 이것이 해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야. 다시 말해서, 나는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아. 언젠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떳떳하다고도 하지 않아. 그러나 보게, 런던에 갇힌 고아와 난민들의 숫자를 알고는 있는가?]”

노인은 말했다.

“[육만 팔천이야. 와 닿지 않겠지.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숫자라서, 중소도시의 인구통계나 사회 서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숫자라서 사람의 목숨으로 느껴지지 않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네. 육만 팔천이라고 하면, 이는 우리가 버려놓고 살리길 포기한 아이들의 숫자야. 하나님을 믿는 내 안에서는, 최소한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야.]”

신사는 호흡을 골랐다.

“[그런데 뭐라고? 300명을 죽여서 그 이상을 살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빌어처먹을 젊은이, 잘 듣게! 내 생각이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라고! 300명을 죽여서 단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와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살릴 숫자를 저울 좌우에 올려놓고 티스푼의 끄트머리만큼이라도 오른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저울 한쪽의 사람들을 도려낼 거야.

하지만 보게, 나를 좀 보게 젊은이!]”

노신사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모독과 조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렇게 말로 지껄이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전혀 달라! 이건 책상 위에서 앉아 300이 크니 301이 크니 독백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나 하는가? 이렇게 해서 런던의 아이들에게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관심을 기울여주면 그걸로 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것이 얼마나 역겹고 괴로운 일인지 아느냔 말이야!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나의 의지로, 나의 선택으로 이렇게 했어! 이것은 내 선택이 훌륭하기 때문도 탁월하기 때문도 아니야! 이 극단적이고 저열하며 악마적인 방식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는 나 혼자였기 때문에!

차마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아내며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구할 수 있다면! 이 한 몸이 지옥 유황불에 영원히 불탄다고 해도 나는 웃는 낯으로 견딜 수 있기에!

그렇기 때문에 저지른 거야!]”

나는 말을 잃었다가.

“[그렇다고 해도 당신의 행동은 잘못됐다.]”

“[잘못됐다고? 자네는 한국인이 아닌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던 사고가 벌어진 뒤에야, 살릴 수 있었던 수백의 사람이 바다 깊숙한 곳에 수장된 이후에야 외양간을 고친 나라의 사람이 아닌가.

그 모든 촌극을 직접 목도했을 자네가, 나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를 살리건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당신은 당신 스스로 사람들을 죽였다. 당신의 손에 피를 묻혔다는 말이다.]”

“[거기서 자네가 알지 못하는 두 번째 사실이 드러나지.]”

노인은 흐붓하게 웃어보였다.

“[나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야.]”

그 시점에서 사고가 정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신사의 탓이 아니었다.

노신사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흑색 월광이 쇄도했다.

하늘 위에서 나타난 진짜 흉물이 지상을 내리꽂으며 나의 등 뒤를 후려갈겼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