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49화 (49/112)

〈 49화 〉 008.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7)

* * *

생각대로 되는 게 없다, 라는 말은 보통 나쁜 의미로 쓰인다. 일이 어마어마하게 꼬였다고 뜻풀이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드물게 좋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희귀한 의미에서나와 랑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됐다.

영국지사는 도합 12층의 빌딩이었다.

3층까지는 로비를 비롯해 각종 편의시설, 식당 따위가 구비돼 있었다.

그 위 4층부터 10층까지가 업무지구였다.

11층에는 일부 인사들만 쓸 수 있는(주로 랑을 비롯한 오너 일가) 게스트 하우스, 12층에 사장실이 위치한다.

윌리엄은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우리를 11층까지 안내했다.

그곳까지 올라가며 받은 대우도, 그러니까 마주친 직원들의 태도나 주변 환경의 정돈된 수준도 상당했다.

한마디 정도는 해줘야 되겠네.

어설픈 영어로 말하는 것이 창피하긴 하지만. 아무튼.

“[왜 이런 혼란스러운 자세를 취하나?]”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윌리엄은 이쪽을 흘깃 돌아보더니 가벼운 웃음을 머금으며.

“[그럼 여기서 창피라도 당하길 바랐는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윌리엄은 그러자 웃음을 터뜨렸다.

“[여러 잔머리를 굴렸던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런던까지 흘러갔으면 우리 사정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네.]”

“[그곳에서는 하루아침 머무르다가 말았다.]”

“[다행스럽겠군. 그러면 생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나?]”

나는 잠시 아스페르를 떠올려보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을 하러 온 입장이다.]”

“[걱정들이 많으셨군.]”

신사는 대화의 가닥을 끊어먹었다.

그는 우리를 머무를 방으로 안내했다. 잘 꾸며진 호텔 같은 분위기로 한 30평 정도는 돼 보였다.

나는 솔직히 조금 감탄했지만, 랑은 아까부터 착 가라앉아 있어서 뭔가에 호응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다소 짜증난다는 얼굴이었다. 그 상태에서 묵묵히 내가 윌리엄의 말을 통역해주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랑은 돌연 이렇게 물었다.

“왜 통역이 없냐고 전해.”

“응?”

“당사자한테 전해. 통역, 없어. 그거 성가셔.”

“랑, 그건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통역도 안 불러놓고 잘해주는 거, 이거 엄청 열 받아.”

랑은 드물게 빠르게 말하며 그렇게 따져댔다.

어쩔 수 없이 전하라는 바를 전해주자 윌리엄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노신사는 아까부터 답답하다는 기색이었다. 언어의 장벽 탓에 랑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이제야 뜻을 알게 되어 기쁜 것일까.

“[그거야 자네들이 곤란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 말을 그대로 랑에게 전했다.

“[나는 자네들이 솔직히 말해서, 큼, 이 상황에서 아예 빠져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건실한 기업인 아닌가.

체면이 있어서 그런 것은 곤란하지. 그저 자네들이 자네들의 분수를 깨닫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길 바랐어. 하루 정도 골탕을 먹인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그대로 전하는 동안, 노신사는 “[그러나]”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건 좀 의외일세. 나는 자네 둘 다 영어를 전혀 못할 줄 알았거든.

멜라니가 더듬더듬 내뱉는 한국어로 통역한 내 말을 억지로 알아듣는 척하는 자네들을 보고 싶었는데, 그것까진 어렵게 됐군.]”

나는 수행인이므로 랑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랑은 거의 말을 잃었다. 대신 노신사를 노려다 보고 있었다. 랑이 그보다 덩치만 컸더라도 벌써 주먹 한 대는 갈겼을 눈빛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랑은 어린아이여서,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나는 그냥 랑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제대로 진정되기도 전에, 윌리엄은 번뜩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물어왔다.

“[놀랍군. 자네가 혼자서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내게 물은 것이었다.

그 말의 의미만 랑에게 전달하고, 나는 직접 되물었다.

“[무슨 뜻이지?]”

“[저 어린 숙녀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전하려 한단 말 아닌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저 어린것이 이 대화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겠는가? 그 말들의 책임을 질 수나 있느냐 이 말이야.]”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아니, 무시할 수밖에 없네.]”

윌리엄은 냉소했다.

“[내가 여기 좁은 섬나라에 틀어박혀 있으면, 본사에서 굴러가는 사정에는 맹인처럼 어두울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을세. 거기 있는 숙녀분께서는, 유감스럽지만 가업을 이어갈 적임자로 길러진 자도 아니고, 또 그렇게 길러질 수 있는 자도 아니야.

나는 그녀에게 우리 영국지사의 영역에 침범할 권한이 있는지 묻고 싶군.]”

이 지점에서 나는 마지막 주장을 반박해야 했다.

본사가 지사를 통제하는 건 당연하다. 법리적으로 아무 잘못이 없다.

게다가 이 아이는, 이 아이를 당신이 어떻게 볼지는 모르지만 총수에 의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이곳에 파견된 것이다.

당신이 뭐 어떻게 생각해도 이 아이는 당신들의 영역에 간섭해 조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논쟁에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로 치더라도 그게 절차적으로 합당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 자매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매가 아니다.]”

당장이라도 지정능력을 써서, 아니 솔직히 말해 ‘써버리겠다!’하고 겁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도 아니지.

어쨌거나 분풀이라도 하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증오하고 있지도 않고, 동생이 언니의 자리를 가로챈 것도 아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 지점에서 화를 내다니, 조금 이상하군. 어쨌거나 내 말은 영국지사가 자네들 뜻대로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미리 선언해두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만.]”

“[그딴 선언은 애초부터 당신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다. 당신들이 거스른다면, 그건 말 그대로 거스르는 것에 불과하다.

어쨌거나 우리는 총수님의, 그리고 그 따님의 의사를 전달할 것이니 헛소리하지 말고 들으라.]”

거기까지 정리하고 나는 한숨을 푹 뱉었다.

뒤늦게 랑에게 오간 대화를 정리해줬다.

랑은 자매 얘기에서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잘했어.”하고 어울리지 않게 칭찬을 얹어줬다.

그 뒤에는 도로 발언권을 행사했다.

“내 수행인이 말한 대로, 당신이 우리 의사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영어로 전했다. 윌리엄은 차분하게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여기서 우리가 자네들의 경고를 어긴다고 해도 어쨌거나 총수께서는 찾아오실 것이고, 그때는 내 기가 그녀에게 억눌리겠지. 그 사실만큼은 인정하네.]”

전했다.

랑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바보 같아. 당신들, 지금 시간 벌기에 불과한 일에 목매고 있어.”

전했다.

윌리엄도 약간의 생각할 시간을 가진 뒤 대답했다.

“[시간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겠나? 나야말로 자네들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어느 거짓선지자가 종말 같은 것을 예언하면, 자네들은 거기에 그저 수긍하고 끝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지 않아. 시간만 충분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전하자, 랑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또 전하니, 윌리엄은 짧게 대답했다.

“[런던의 고아들을 돕고 싶네.]”

대답을 전하자 랑은 말을 잃었다. 랑은 지껄여볼 테면 더 지껄여 보라는 표정을 내비쳤다.

영국인은 그 제스쳐를 알아들었다.

“[서류에 기입했던 것처럼 내가 운용한 회사의 자산 일부는, 런던의 아이들에게 돌아갔네. 마땅히 쓰여야 할 곳에 쓰이고 있는 것이지.]”

전했다.

“그건 당신이 개인적으로 할 일. 기업의 자산을 빼돌려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불법이라고 생각은 했어?”

전했다.

“[사회적 기업 활동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네. 그리고 알겠지만, 우리는 자산 운용 측면에 있어서 한미 본사 다음으로 효율적인 행정을 보이고 있어. 남는 자산을 지사장인 내가 좋은 곳에 쓰겠다는데 왜 자꾸 토를 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전했다. 그러자 랑은 인상을 크게 찡그렸다.

“그 말에 동의는 해. 우리, 당신들 해치러 온 거 아냐. 가능하면 우리도, 만약에 엄마 뜻에 반하더라도 당신들을 돕고 싶어. 나도 언니도 여기 있는 내 수행인도 영국인들을 돕는 게 옳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아냐. 당신들,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떳떳하게 사용내역을 공개하고, 절차를 밟아야 해.”

전하자, 윌리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을 고한다면 무엇이든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물음을 한국어로 돌려주니, 랑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또렷이 대답했다.

“최소한의 변명은 할 수 있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도.”

그 대답을 영어로 들은 윌리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하고.

그는 배꼽을 잡은 채 쓰러질 것처럼 한참을 웃어대다가 겨우 비틀거림을 멈추고 똑바로 섰다.

그는 웃음으로 생긴 눈물까지 닦아가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자네를 너무 어리게 봤군.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할 필요가 없겠어. 자네는 그렇게까지 어리지 않으나, 세상은 아담과 이브 이후로 수천 년을 썩어 왔거든.]”

윌리엄은 말을 이어나갔다.

“[뭐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 남을 위해서 한 일이니까, 영국의 국민들을 위한 일이니까 이해받을 수 있다고? 이보게, 어린 친구, 그러면 도대체 주께서는 왜 못에 박혀 돌아가셨지?]”

통역을 듣자마자 랑은 날뛰듯 외쳤다.

“그럼 말해보든가. 듣고 타당하면, 그럼 우리도 이해해줄 것 아냐?”

그러나 그 말을 미처 영어로 내뱉기도 전에 윌리엄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를 흘렸다.

비웃음은 강물처럼 흘러내려 윌리엄의 구두코까지 떨어지는 듯했다.

윌리엄은 원망에 뒤섞인 목소리로 냉랭하게 단언했다.

“[우리는 흉물을 돕고 있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