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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48화 (48/112)

〈 48화 〉 008.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6)

* * *

온순하게 생긴 여자였다. 사람더러 온순하다고 하는 게 별로 좋지 않은 표현인 줄 알지만 인상 자체가 그랬다.

가볍게 끝이 내려온 눈매라든지 웨이브가 들어간 흑발. 아스페르만큼은 아니지만 갈색을 띤 피부. 황갈색 눈동자 등등.

종합해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였다.

“[멜라니 바렐라(Melany Varela)예요. 멜리라고 부르셔도 좋고, 어색하다면 멜라니나 바렐라고 해도 괜찮아요.]”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는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다. 지금도 이상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양해해줬으면 한다. 또 그런 의미에서 그냥 멜라니라고 부르겠다.]”

“[얼마든지요.]”

멜라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애매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이라고 해야 할까, 메이드와 웨이트리스의 중간적인 느낌.

여기서 메이드는 일본 매체에 등장하는 그런 메이드 말고…… 폴트가 예전에 하고 다니던 차림새를 말한다.

아무튼 묘사를 이어 나가자면, 멜라니는 그런 딱딱하고 고풍스러운 메이드와 그에 반해 경쾌하고 장식적인 웨이트리스 복식 중간의 어딘가에 낑긴 듯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는 이 사람이 폴트의 친구이니만큼 메이드겠구나! 하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모시는 몸이에요.]”

멜라니는 가볍게 말했다.

“[두 분께서 찾고 계신 윌리엄 경을 모시고 있어요. 그렇지만 고용된 관계는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은혜 갚기의 일환으로, 굳이 말하자면 제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니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멜라니는 말조차 매우 느긋해서, 오늘 마주친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알아듣기 편했다.

괜히 안심하며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지사장께서 어디 계신지 알고 있나?]”

“[물론이에요. 일단 연락을 취해놓았으니 곧 뵐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다. 고맙다.]”

“[천만에요.]”

그러면서 멜라니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옆에 있는 랑에게 설명이나 해주라는 표시였다.

깜빡 잊고 있었던 나는 충고를 따랐다. 그러자 랑은 다소 토라진 얼굴을 하고는 멜라니에게 말했다.

“한국어로 해.”

“합니까?”

멜라니가 대답했다.

……예?

“그러나 어려운. 익숙하지 못한.”

“저기, 지금 나만 이해가 안 되는 건가.”

내가 그렇게 묻자 랑은 쿡쿡 내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폴트한테 조금 배웠대. 취미로.”

“그러한. 취미.”

멜라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끄덕임이 끝나는 시점에서 랑은 나에게 툴툴거렸다.

“영어 못한다면서.”

“실제로도 엄청 못하고 있는데? 멜라니가 한국어 쓰는 수준일 거야.”

“하지만 거의 다 알아들어.”

“그래서 나랑 같이 수능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야.”

“또 공부 소리. 여기까지 와서.”

랑은 볼에 바람을 확 집어넣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눌러서 공기를 다 빼주기 전까지는 계속 복어처럼 그러고 있었다.

복어에서 사람이 된 랑이 말을 이었다.

“저 사람, 내 부하의 부하. 곧 나의 부하. 이미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어.”

“네가?”

“나를 바보로 알아?”

이번에는 내 허벅지를 확 꼬집더니, 다시 복어가 되려고 하다가 말았다.

“도움이 돼야 해.”

랑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어 있었다.

“공익 혼자서 다 하려고 하니까 자꾸 문제가 생겨. 그러니까 결론. 나도 같이 할 거야.”

“허어…….”

“뭐, 뭐가 ‘허어’야, ‘허어’는.”

“아니, 크는 게 빠른 나이다 싶어서.”

그렇게 대꾸하자 랑은 발을 들어 내 배를 꾹꾹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미화하지 말자. 랑은 나를 걷어찼다.워낙 운동을 안 하는지라 아프게 차버릴 능력도 없었지만 그 분노는 잘 알겠다.

나는 발목을 붙잡고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랑은 더 차댈 힘도 없는지 한숨만 푹 쉬었다.

그러자 멜라니가 저쪽에서 다시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는. 이러한 상황. 그렇고 그런 사이.”

“내가 아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길 바라요…….”

그보다.

“무슨 얘기를 했는데?”

“업무. 지사장이 왜 우리 연락을 안 받는지.”

“답은 나왔어?”

“다시 설명하는.”

멜라니가 끼어들었다.

“지사장, 당신들 원하지 않는. 더불어 당신들의 목적 알고 있는.”

“우리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시는데?”

“당신들. 런던을 돕지 않는. 도움 없애는.”

잠시 말을 잃었다.

“랑, 해명했어?”

“했어. 하지만 지금은 소용이 없는 것. 가서 직접 전하지 않으면.”

“그건 그렇지. 아무튼 일이 엄청 꼬였네.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지금 구호물자 보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내역서 정리해놓고 명확하게 밝히라는 거잖아.”

“그것. 납득하지 못하는.”

멜라니가 조금 억눌린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더니 내 손을 확 맞잡았다.

흥분해서 피가 전부 머리로 쏠리기라도 했는지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멜라니는 쏠린 피만큼 뜨거운 어조로 말했다.

“지사장. 노력하는. 런던의 아이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모두 구하는. 아니, 구하기 위해서. [그분을 도와주세요, 부탁드려요.]”

“공익. 영어로 전해.”

갑자기, 랑이 입을 열었다.

영어를 못하는 그녀조차 방금의 간단한 부탁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랑은 그대로 멜라니 쪽을 향해서 한국어를 내뱉었다.

“그건 곤란해.”

나는 머뭇거리다가 영어로 전했다. 곤란하다고.

랑은 이어나갔다.

“이것은 인정에 의한 일이 아닌 것. 기업의 일. 그런데 서류도 미비한 채 도와달라니, 이해가 안 돼. 필요한 지원이라면 서류로 작성해서 청하면 돼.”

“랑, 이 사람한테 따져봤자…….”

“공익, 내 부하니까 시키는 대로 해. 이건 업무야.”

그렇게 말하는 랑은 분명히 열받아 있었다.

어째서일까. 화내는 모습이 약간이지만 기특하다. 총수를 닮아 보인다고 할까.

음. 안 좋은 뜻인가.

생각하고 있는 그때 랑은 계속해서 한국어를 내뱉었다.

“멜라니 너를 탓하는 게 아닌 것. 네 의견도 의견이고 지사장과 겹칠 수 있어. 하지만 이 상황, 본사와 지사의 대표가 합의해야 해.”

통역은 내 몫이다. 그대로전했다.

그러자 멜라니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러나 랑은 물음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지금 지사가 우리를 거부한 건 멜라니도 포함해서 저지른 일이야?”

그대로 전했다.

멜라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아요.]”

“영국지사, 나랑 공익을 위험에 처하게 했어. 가볍게 넘어가지 않아.”

나는 멈칫했다.

“그것도 전해?”

그러자 랑은 신경질적으로.

“전할 필요 없어. 그냥, 짜증, 짜증이 나서……. 심지어 공익은 정말로 다칠 뻔했고 마음에 상처도 입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곧 만날 수 있다니. 짜증 나.”

“나는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아.”

랑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나한테 공익, 아주 중요해. 언니만큼 중요해. 나한테서 언니를 지켜줬으니까. 그런데 그런 공익을 다치게 하는 거 봐주지 않아.”

“그 정도야?”

그렇게 좀 평범하게 되묻자, 랑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일순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이, 그 정도는 아닐 수도 있고오…….

랑은 그런 식으로 말을 흐리다가 갑자기 발로 내 팔뚝을 걷어찼다.

크는 게 빠른 나이라는 말은 취소해야지.

“역시나 둘, 그렇고 그런?”

다시금 이 발차기 장면을 목격한 멜라니가 나지막이 물었다.

저쪽도 참 어지간하다. 아무렇게나 생각하게 두자.

그보다 시급한 일이 많다.

“[지사장께서는 언제 오시나?]”

“[이제 올 거예요.]”

“[이제? 지사는 버밍엄에 있다.]”

“[그렇죠. 하지만 버밍엄에는 헬기가 있고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드드드드 하고 창문 바깥으로부터 별안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창문가에 쳐놓은 더러운 블라인드들이 요란스럽게 펄럭거렸다.

머즐드독스. 헬기 참 좋아한단 말이지.

***

두 가지 곤란한 점이 있었다.

첫째는 내 영어가 미숙하다는 것이다. 말할 때 동어를 반복하며 사용하거나 어감상 알맞지 않은 어휘를 욱여넣는다.

아마 그럴 것이다. 제대로 알았으면 어떻게든 고쳐서 말했겠지

어쨌거나 원어민이 들으면 매우 어색할 것이다.

사담을 나누는 데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머즐드독스 본사의 일원으로서 지사의 직원에게 일종의 지시를 내리러 가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격식 없이 구어체나 유아어를 사용한다면 솔직히 좀, 그렇잖아?

그래서 통역가를 부르자고 청한 것인데, 멜라니 말로는 “번역자 없는. 사정이 있기에.” 이런다.

진짜 누구 싸우자고 불렀냐고.

물론 이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방안이 하나 있기는 하다. 한국어 영어 모두 능통한폴트를 데려가서 부려먹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곤란한 점이 튀어나온다. 폴트는 우리와 함께 가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그녀는 이제 누구의 메이드도 아니며, 그러니 본사에 찾아가지도 않을 거라고.

아까까지만 해도 조언을 해주던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표정이 이래저래 복잡해 보였다.

나와 랑이 남모르게 대화하기를 이런 식이었다.

“폴트 말이야, 정확히 왜 그만뒀댔지?”

“이야기 안 했어?”

“대강 말해줬잖아.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고.”

랑은 잠시간 망설이다가.

“언니를 공격했어.”

“공격?”

어휘가 어색해서 되물으니 랑은 정정했다.

“그때 내가 옥상에서 울고 있을 때, 언니를 억지로 본가에 끌고 가려고 했어. 저항하니까 기절시키려고 했다고. 건틀릿을 써서.”

“엄청 복잡하네, 폴트도.”

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폴트,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가끔은 혼란스러워 한다는 생각도 드는 것. 남에게 지시받아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만, 또 나쁜 명령을 받아도 부응하려고 해.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는 식.”

“그래. 그럼 저쪽은 포기하기로 하고……. 뭐 어떡하냐, 멜라니랑 내가 손발 맞춰가며 최대한 소통하려고 하겠지.”

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윌리엄 지사장, 우리를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있어.”

“응. 그건 그렇지.”

한국어가 엄청 메이저한 언어는 아니라고 해도 영국 전역을 뒤지면 통역사 한둘이 안 나오겠나.

통역사 하나 고용하지 않았음은 사실 니네 말은 별로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어디 한번 당해봐라 이놈들, 같은 의사표시라고 봐야 한다.

아니면 그 정도 오해를 살 수 있는 결례이거나

결국 우리는 폴트를 그곳에 내버려둔 채 버밍엄까지 날아가기 시작했다. 갖고 있던 짐들도 모두 옮겼다.

분위기상 제일 쓸모없을 것 같은 망가진 건틀릿부터(제작비 8억) 제일 중요하게 느껴지는 바롱의 눈알까지.

후자는 찝찝하긴 했지만 혹여나 잃어버릴까 가방이 아닌 코트 주머니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돌아다닌 탓인지 가방 내용물이 온통 뒤섞여 있었는데, 혹시 눈알 담아놓은 케이스가 깨지면 어떡해.

몸도 지쳤겠다, 시간도 밤이고 해서 날아가는 동안만이라도 잠을 청할까 싶었다.

역시 관뒀다.이 헬기가 안전하다고 확신하지를 못하겠으니까.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랑은 멜라니와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다.

예를 들자면 이랬다.

“윌리엄하고 무슨 관계?”

“특별히 없는. 도움을 받았다?”

“은혜?”

멜라니는 은혜라는 단어를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랑이 설명했다.

“예전에 큰 도움을 받아서 갚고 있냐는 것.”

“아! 그러한.”

“무슨 도움?”

그렇게 묻자, 멜라니는 망설이지 않고.

“나, Orphan이었던.”

“오르펀?”

“고아라는 뜻이야.”

내가 끼어들었다.

랑은 표정을 굳혔다가, 문득 눈치 챘다는 것처럼 나를 돌아봤다. 자는 거 아니었냐고 따지는 눈빛이었다.

나는 둘이서 계속하라고 턱만 까딱거렸다. 랑이 남과 대화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었으니까.

랑은 조용하게 물었다.

“어쩌다가?”

“원래는 칠레 사람이었던. 그러나 칠레, 파계종으로 무너진. 그래서 나, 7살 정도 때 런던에 온. 그러나 같이 있던 부모님, 죽은.”

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멜라니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빌, 우리들을 도운. 계속 물건 보낸. 그리고 학교도 가게 한. 나, 그 까닭에 메이드 교습 받은.”

“그러면 메이드야? 윌리엄의?”

“그렇지 않아요.”

멜라니는 잠깐 말을 섬겼다가.

“나, 당신이 말하는 은혜? 갚는. 빌 근처에서 빌을 돕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빌, 고마우므로.”

그리고 그 지점에서 멜라니는 또 격정적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당신들, 빌에게 나쁜 짓은 하지 않아야. 그 사람, 영국에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그 얘기는 아까 말했다시피 그분을 만나면 하기로 하고…….”

나는 다시 끼어들었다. 어차피 딴 길로 샜으니까 부담없이.

그러나 멜라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앞쪽에서 헬기를 몰고 있는, 사실 얼굴은 살펴보지 않았지만 백발 가득한 노신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빌, 말씀을 기다릴게요.]”

그러자 신사는 중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대화였는가?]”

“[나와 당신 사이의 관계에 관해 얘기했어요. 그리고 또,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요. 내가 그렇게 말했어요.]”

“[어떻게 되었지?]”

“[그들은 우리를 부정했어요.]”

“[그런가. 늘 그랬지.]”

노신사는 잠시 조종간을 내려놓고 랑을 향해 돌아앉았다.

아무렇지 않게 오른손을 뻗으려던 노신사는 “[오, 이런 실례.]” 그것을 거두고는 “[오른손은 의수일세.]” 자랑하듯 흰 면장갑을 씌운 양손을 흔들어보였다.

“[파계종에게 뜯어 먹혔거든.]”

그 대신, 왼손을 뻗어왔다.

랑은 할 말을 잃었다. 그 와중에 왼손으로 지사장의 손을 맞잡았다.

“[만나서 반갑네. 취미로 헬기를 모는 늙은이일세. 누군 날더러 딱딱하게 윌리엄 경이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그건 좀 거추장스럽고 무거워서 싫군. 그냥 빌이라고 부르도록 하게. 이 정도면 소개가 되었겠는가?]”

노신사 윌리엄은 꼭 쓸데없는 군소리를 늘어놓는 노인처럼, 그러나 분명히 품격 있는 어조와 억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이 많은 백인의 모습에 내가 잠시 경도된 동안, 아직까지 악수를 거듭하고 있던 랑은 멍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공익, 이 아저씨 뭐라는 것?”

……넌 영어 공부는 꼭 해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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