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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37화 (37/112)

〈 37화 〉 007. 난리들 났네

* * *

몇 가지 서류를 넘겨받았다.

총수의 말마따나 우리는 실제 협상에 나서는 권력자가 아닌 일개 허수아비였다. 우리 쪽에서 준비할 것은 거의 없었다.

주어진 일정은 마치 필수 상품이 포함된 패키지여행 같은 느낌이다. 다만 그런 여행에서 으레 들르는 라텍스나 건강식품 매장이 머즐드독스 영국지사로 치환돼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손에 넣은 정보나 활동반경이라고 해봤자 이메일로 전달해도 무방했을 것들.

결국 총수의 의도는 나와 랑에게 ‘적당히 깝쳐라.’ 라고 경고를 넣어주는 것이었던 듯한데, 네, 싫습니다.

저희는 이제부터 거하게 트롤링을 할 겁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인천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며 나는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뒤따라오던 랑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영국인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고 유랑 약속은 해놨지만 말이지, 이건 뭐랄까, 상황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유와의 약속은 그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제대로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뤄진 거잖아?

그래서 너희 어머니 지시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서, 최대한 도울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가 멋대로 조정을 한다, 라는 느낌으로.”

“응.”

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제에서 문제가 생긴단 말이지. 윌리엄이 제대로 구호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도 않은 것 같아서.”

단일품목에 1억 원을 투자했다. 그 품목이라는 것도 구호와 도통 관련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군수업체의 본질에 걸맞은 금속.

그걸로 제조업에 힘썼다면 꼬투리 잡힐 일도 없었을 텐데. 장부에는 친절하게 구호물품이라고 사용처를 붙여 놨다.

이마저도 또 정확한 사용처 대신 추상적인 표현만 사용했고. 다시 말하지만 난장판이다.

“하지만 일이 쉬워질 수도 있어.”

“그렇지.”

랑의 지적대로.

총수는 우리를 매개체로 삼아 재빠르게 재산의 낭비를 차단할 수 있다. 유에게는 ‘애초부터 구호에 쓰이지도 않았다더라.’ 하고 적절히 설명하면 되고.

또 나와 랑은 누군가에게 밉보이는 일없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 것이다. 윈윈을 넘어서서 윈윈윈인데.

그런데도 찝찝함이 남는다.

“나는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경영권을 가진 건 엄마인 것.”

그렇지. 그러니까 그걸 누구한테 물려줄지 정하는 것도 랑의 어머니가 된다. 아울러 유와 약속한 정의로운 기업집단을 성립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도 랑의 어머니 손에 달린 문제가 된다.

하지만 독대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 랑의 어머니는 랑을 그다지 고평가하고 있지 않다.

평범하게 지금의 방식대로 적당히 업무를 수행해서 적당히 성과를 내는 수준에 머무른다면 총수는 차라리 반항해서 집을 나간 유 쪽이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있는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이 모든 사정을 지금 당장 랑에게 설명할 수는 없다.

슬슬 그런 사정을 듣고도 담담히 넘기거나 혹은 스스로 파악해낼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랑은 그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런 능력을 기를 기회가 없었다.

더 나아질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

랑이 내 손가락을 슬며시 감싸잡으며 말했다.

순수함은 대단이 좋은 미덕이지. 하지만 그게 죄가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텐데.

어쨌거나 랑은 강심장이 아니다. 언니나 어머니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어 보이고.

복잡한 사정이나 역학관계를 떼어놓고 봤을 때 가장 훌륭한 상황배경이 완성되기는 했다.

그러니 고민은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나 실컷 하기로 결정했다.

잠들기 전 이것 하나만 얘기를 해두고 끝내자.

“분명히 말하는데, 다시는 너희 어머니를 만나게 하지 말아줘…….”

랑은 대단히 충격 받아서.

“왜? 왜? 엄마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

“내가 했거든.”

더 충격 받아서.

“어째서?!”

“그냥 일이 그렇게 됐다.”

“아, 안 돼. 공익은 엄마랑 친해져야 하는 것. 이건 의무야, 명령이야.”

“접수 안 해. 훠이훠이.”

굳이 언급할 것도 없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강골이 아니다.어지간하면 굽히고 들어간다.

이건 지난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리고 몇몇 것들을 버리고 도망치게 만들었던 비굴한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그 원칙을 깨먹을 때가 잦고 오늘도 그랬지.

하지만 가능하다면 지키고 싶다.

어떻게 어떻게 바롱을 물리쳤고 자매는 화해했다.

나는 좀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직장까지 얻었다.

잠시나마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해졌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평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이 평온을 유지하고 싶다.

“앞으로는 네가 독대해야 해.”

“나랑 엄마는 자주…….”

“부모와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총수와 하급자로서.”

제삼자가 나서서 조율하는 평온에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내 역할이 아닐 뿐더러, 장기적으로 랑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네가 해야 해.”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네가 설득하고, 네가 따지고 네가 묻고 네가 협상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저기, 공익.”

불안한 목소리.

가다듬는 숨결.

머지않아서.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정수리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려줬다.

기만적인 말이 아니다. 억지로 기운을 북돋워주겠다고 겉치레로 내뱉은 것이 아니다.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잘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너 하나만큼은 제대로 지켜줬다.

오래 묵지 않은 자부심이다.

그러니 너도 나처럼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

런던의 상공에 밤이 내려앉았다.

런던참사 당시 무너지지 않은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 빅벤이 도시 어딘가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위로 창백한 달이 드러나 그 아래의 세계를 비추었다.

그러나 빅벤 아래의 세계는 명백히 망가져 있었다.

옛 왕조의 잔해처럼 산산이 부서져 잔해만 남은 집터와 빌딩의 골조.

어쩌면 그 밑에 산재하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의 시체.

16년 전, 처음 파계종이 나타났을 무렵 아무런 준비도 해두지 않았던 런던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파괴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밍엄과 옥스퍼드로 이주했다. 그곳에 남은 것이라고는 한때나마 사람이 살았을지 모른다는 가정적인 단서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아직도 살고 있다.

그것은 우스운 현상이었다.

런던에 기거하다 참변을 맞은 본토의 영국인들이 남이나 북으로 이주했다.

반면, 시리아 내전으로 유럽까지 내몰린 아랍계통 난민들과 소수의 영국 빈민들이 자처해서 런던으로 기어들어갔다.

어차피 뜸해진 파계종의 출몰. 있던 곳에서 죽는다는 높은 확률과 타지에서 죽는다는 낮은 확률 간의 저울질 끝에, 그들은 런던에서 새로운 터전을 꾸렸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적인 서사시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애도를 위한 장송곡 같은 것도 아니었다.

치안이 닿지 않는 암흑. 빈도는 줄었으나 여전히 나타나는 파계종. 모든 것들이 위협이었다.

마치 오늘밤처럼.

빅벤 아래에 형성된 텐트촌의 주변에서 이상한 기류가 포착되었다.

런던을 포기한 영국정부는 그 기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빅벤 꼭대기에 서 있는 괴인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괴인을 일컫기를 ‘영웅Hero(ine)’ 그러나 괴인이 자칭하기를 ‘흉물Abomination’.

영웅 혹은 흉물은 천천히 시야를 내렸다.

그가 입은 전신슈트가 검은빛을 번쩍거렸다.

얼굴을 포함한 전신이 가려져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다부진 몸은 20대 중후반의 남성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 가정은 조금 틀려먹었을지도 모른다.

20대 중후반이 틀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남성이라는 게 틀렸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그자가 인간이라는 전제의 전제가 틀렸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흉물의 팔은.

자칭한 바에 걸맞게 뒤틀린 흉물 그 자체였다.

파계종의 팔이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어깨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끝난 상반신의 슈트부.

이어지는 팔은 각각 왼쪽이 붉은색 오른쪽이 노란색.

괴상한 색에서 멈추지 않고 왼팔의 끝은 액체처럼 출렁이다가 날카로운 칼날로, 오른팔의 끝은 돌처럼 굳어 있다가 짐승의 발로 변화하였다.

그 변화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누구 없어요?!]”

시작됐다.

흉물의 슈트 고글이 붉게 변했다.

시야에 비친 것은 뚜렷하게 열린 파계지점.

가장 먼저 D등급 파계종들이 감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강력한 것들도. 그리고 이후에는 가장 강력한 것들도 나타날 것이다.

“[누구 없냐구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필사적으로.

“[제발 도와주세요!]”

간청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바라고 있었다. 염원하고 또 염원해서, 누군가에게 닿길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의미한 행동이 아니었다.

정부는 이곳을 포기했고, 사설 경비업체들은 수익성 때문에 물러났다.

머즐드독스조차 이곳에 지정능력자를 파견하거나 무기를 배부하는 ‘기업윤리적 사업’을 중단했다.

그러니 이곳에는 아무도 올 수 없다.

살려달라고, 그저 목숨만 구해 달라고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을 테니 나타나만 달라고 목 놓아 외치는 꼬마. 그 앞에 서서 아직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알려줄 사람은 없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으니까.

분명, 아무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자정을 알리는 타종소리가 울렸다. 전율하는 공기의 떨림 그 끝으로, 흉물이 몸을 날렸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변조되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수많은 파계종 앞에서 당당하게 포효했다.

“[흉물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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