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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36화 (36/112)

〈 36화 〉 006. 쪼그마한 게 발랑 까져서는 (6)

* * *

물었다.

“불편하냐?”

끄덕끄덕.

이어서 말할 기회를 줬다.

왜.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하지만 랑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얘기는 아예 안 해봤구나.”

“그거야, 그게…….”

랑과 친해진 이후 자주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중학교 2학년 때의 나는 어땠더라.

사실 깊게 돌이켜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평균적인 중학교 2학년처럼 행동했다.

이것은 내가 뭐, 중이병에 걸려서 SNS에 차마 못할 게시글 같은 걸 올렸다든지. 어둠의 자아 같은 걸 상정했다든지 하는 우스운 중학교 2학년의 행동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앞으로 뭘 할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유지될지.

간혹 이성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가 친구 문제로 다퉜다가 또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마주했다가…….

그런 식으로, 지극히 당연한 고민들을.

그러나 그 당연한 고민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꼬맹이가 있다.

그 아이의 앞길을 일컬었을 좋은 표현이 있다

탄탄대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계승권에 관심이 없으니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었다.

또 냉정한 부모 밑에서 자라났으나 사랑 받을 수 있는 자세를 잡고 다녔으니 예쁨 받을 수 있는 소녀였다.

그런 소녀였었다.

분명히.

언니의 순서를 빼앗으려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시 물었다.

“너, 후회하지는 않아?”

“무슨 후회?”

“효용에 관해서 묻는 거야. 너는 언니와의 관계를 돌려놓기 위해서, 네가 언니의 포지션을 차지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곧 그렇게 하게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 개선되는 게 있는 반면, 잃어버리는 게 있을 수도 있어.”

긴 침묵.

그러나 곧.

“……같이 있어줄 거라면.”

“응?”

“네, 네가 같이 있어줄 거라면, 그게,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것…….”

“넌 말투만 고치면 말 참 예쁘게 하는 녀석일 텐데.”

“우으…….”

길게 말하는 건 거기까지가 한계였는지 랑은 고개를 돌리고 앓는 듯한 소리만 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쨌거나 대답은 얻었다.

랑은 이제 스스로의 선택으로 어려운 길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밝혔다.

그것뿐이다.

“그러면, 뭐냐, 너희 어머니랑 얘기 좀 나누고 올게.”

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이드에게 눈짓만 보냈다. ‘울거나 하면 불러주세요.’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선을 다해도 어려운 일은 있는 법이다.

그건 아마 이 이후의 있을 일에 관해 논할 만한 말이겠지.

***

“큰애가 낫던가요, 작은애가 낫던가요?”

예? 라고 육성으로 되물을 뻔한 것을 억지로 꾹 집어삼켰다.

신중하게 단어를 섬겼다.

일단 무난하게 시작하자.

“낫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여러 의미로.”

으음~ 말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네.

저쪽은 농담이라는 식으로 이죽거리며 묻고 있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대놓고 농담처럼 취급하면 또 버르장머리 없어 보일 수 있단 말이지.

다시 차근차근. 야생마 대하듯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뛰어난 정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유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머, 의외의 대답이네. 그런데 내가 물어본 건 누가 더 예쁘냐는 거였는데?”

이 화법에 얼마나 많은 부하들이 심근경색을 앓았을까.

잠시 고민했다.

“두 분 다 예쁘십니다.”

“‘분’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그중에서도 굳이 고르자면?”

홍차를 내어준 건 잔째로 얼굴에 들이부으라는 의미였나.

“꼭 따져야만 한다면 유 쪽이 더 예쁜 것 같습니다.”

“그것도 의외의 대답이네.”

“의외.”

“응, 의외.”

눈웃음.

“나진 씨도 알겠지만, 직위라는 게 기본적으로 그런 거예요. 명확한 사실이 있더라도 굳이 입에 담을 수가 없지.

그래요, 나에게도 우리 두 딸 중에 더 마음이 가는 녀석이 있지만…… 그걸 말로 구체화시키면 나쁜년이 되잖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제가 나쁜 수행원이 된 것 같군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사실 나도 큰애가 더 예뻐요.”

눈웃음.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일개 사람이나 부모의 입장에서 예쁘다는 게 아니라 가업을 물려줘야 하는 총수의 입장에서 예쁘다는 거니까.

관점을 그렇게 돌려놓으면 나진 씨도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닐 거야. 큰애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관리나 주도적인 역할에 뛰어났거든. 우리 꼬마는 반대였고.

곁에서 둘 다 봤으니 어떤 얘긴지 알죠?”

“압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첫째에게 지정능력까지 달라붙었다.

지정자라는 건 기본적으로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직업이다. 그중에서도고위급은 사회적인 인플루언서도 겸한다.

최근에는 명목상 지정자를 겸직하는 아이돌이나 가수 따위가 캐릭터성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마블 영화 속의 아이언맨 같은 느낌으로.

그런데 유감인지 다행인지 머즐드독스는 군수업체다.

그 군수업체의 후계자가 뛰어난 수준의 지정능력자이며, 실제 활동경력도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이력이 된다.

기업 이미지에도 좋을 뿐더러, 현장 관리능력에 있어서도 매우 유리할 것이다.

간단히 정리해서, 랑에게는 기회가 없었을 수밖에 없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망설였다.

“랑은 그런 총수님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총수가 아니라 어머님 정도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딱딱한 건 싫어하는 성격이라.”

“총수로서의 어머님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하.”

끄덕끄덕.

그 행동만큼은 둘째 딸과 똑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의 강도는 달라서.

“다소 거칠고 야만적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내게도 원칙이라는 게 있어요. 나는 그걸 도의라고 부르죠.”

총수는 길게 호흡했다.

“그렇지만 딸이고 뭐고 억누르는 도의라는 게 있다고 해서 그걸 원망하고 비난할 수는 없겠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이건 누굴 더 사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더 많이 주느냐의 문제이니까.

권한과 위상을 던져주면, 거기에 짐처럼 달라붙은 의무와 중압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잖니?”

“가령.”

“가령, 가업을 물려받을 아이에게는 자유가 없단다.”

단언.

“결혼상대 정도로 예를 들면 와닿겠지. 지금까지 우리 큰애랑 짝을 지어줄 후보를 다섯 정도 생각해뒀어요.

그런데 일이 꼬여버리더니 둘째에게 남편감들이 내려왔고오. 뭐어, 문제가 될 거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그게 머즐드독스의 다음 총수가 짊어질 무게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면 유는 다시 자유로워지겠군요.”

“맞아요. 뭐, 그래도 엄마로서의 내가 남아있으니 아주 놈팡이 같은 걸 데려와선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나진 씨 정도만 되는 남자라도 어디서 물고 오면 성대하게 식장을 마련해줘야지.”

“랑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동안.”

“상견례는 시켜둘 거지만요. 엄마로서의 매너.”

총수가 홍차를 홀짝였다.

“위치란 그런 것을 놓고 말하는 거란다. 함부로 넘볼 수도 없고, 함부로 넘봐서도 안 되는 것. 사회가 유지되고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 응당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순순히 걷는 것.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꼬마는 그러지 않으려 하고 있지.”

홍차.

“맞서려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부딪치는 모습은 추한 것이 사람이란다. 나는 솔직히, 나진 씨가 우리 애를 버려놨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애가 모자랐던 거지.

그래요. 언니를 데리러 가 놓고서는 생각을 바꿔먹더니 형편좋게 모두가 행복한 세계를 그려놨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 모자랐던 거야.”

홍차의 내음이 섞인 한숨.

“어쩌면 그걸 계산에 넣지 않았던 내가 모자랐던 거고.”

그녀가 눈짓으로 내게 차를 권했다.

그러나 마시지 않았다. 총수는 흐붓하게 웃어보였다.

“알겠나요, 나진 씨? 나진 씨가 우리 작은아이를 데리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그건 기뻐요.

그리고 또, 나진 씨 같이 든든한 아군이 우리 작은아이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도 기뻐요.

하지만 넘볼 수 없는 선이 있지. 나진 씨의 직위에 걸맞은 행동반경이라는 게 있는 거야.”

“대답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어머, 기꺼이요.”

호흡하지 않았다.

“당신 내 상관도 아니잖아, 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어린아이를 대하는, 불쾌한 미소.

총수나 나나 똑같은 어른이지만 동등한 어른은 아니다.

그 태도는 학생들을 대하는 몇몇 교수들의 행동거지에서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런 것에 화내지 않는다.

다만 그 단정이 싫었을 뿐이다.

나는 어른이라 이렇게 취급되어도 좋다. 상관없다. 감수하겠다.

하지만 랑은 아직 어린애다. 정말로 어린애다.

형편좋은 그림을 그려야 할 순간이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고.

“나도 우리 꼬마가 잘 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건 나진 씨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우리는 등불 같은 걸 들어서 길을 밝혀줄 뿐이고, 어디로 나아갈지 정하는 건 당사자뿐이니까.”

문을 닫았다.

“응원할게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상관이 아니라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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