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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14화 (14/112)

〈 14화 〉 003. 아뇨, 그런 사람 모릅니다

* * *

일정은 자기들끼리 조율한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간 미친 자매가 아니었다. 새벽에 모였기 때문이다.

오전 5시. 누군가는 아침이라고 우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 계절은 겨울로 접어드는 가을이고, 해는 아주 늦게 떠서 일찍 진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온 지금, 사방은 어둡다 못해 캄캄하다.

적막.

적막.

적막.

한숨이 쏟아진다.

일단 소집 장소는 인근 지하철역 입구였다.

그러나 아직 지하철이 운행하지도 않는 시각이고, 사실 지하철 자체를 이용하지도 않을 게 분명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랑이 외제차를 끌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유는 안 타겠다고 박박 우길 거고, 폴트는 둘을 중재하려 하겠고, 나는 곁에서 탭댄스라도 춰야겠네.

아니지. 생각해보면 모두가 여기서 모이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순서가 꼬여서 랑과 유만 덜렁 와버렸다면 그 어색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랑은 폴트를 달고 있을 테고, 그런 불상사는 자기들끼리 미리 제거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유도 ‘본가’에 있었을 때는 폴트 같은 메이드를 달고 다녔을까.

폴트는 큰 아가씨라고 부르던데 원래 쓰던 호칭일까, 즉석에서 갖다 붙인 것일까.

일단 유가 가출해서 새카만 칼날들에 합류한 게 몇 달 전이고, 폴트는 머즐드독스 무기에 매료돼 랑을 모시게 됐다고 했으니……….

정신없군.

저쪽 가정사는 파헤치려고 하면 땅바닥이 아래로 쑥 물러나는 느낌이다.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

적당히 포기할 즈음, 누군가가 말했다.

“날씨가 춥네요!”

“예?”

등 뒤였다.

덮치듯 뛰어든 가느다란 팔이 허리를 살짝 휘감았다가 곧바로 떨어진다.

아무리 반갑더라도 적절하지 않은 스킨십은 바로 피한다는 거지.

그런 성격을 가진 녀석이 하나 있긴 했다.

일단 건방진 랑은 절대 아니고.

“늦었네.”

“……긴장해서요.”

유였다.

하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목에는 그냥 흔해 보이는 머플러, 상의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목폴라 티셔츠 같았고 하의는 청바지인가.

랑은 드레스를 고집하는데 꼭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랑은 어떻게 입고 나타날까.

음. 의상 선택권을 본인에게 주면 혼자서 폭주할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폴트가 알아서 잘 중화시키겠지.

믿는다, 우리 메이드.

“택시나 잡을까요?”

“역시 따로 만나기였냐…….”

“네에?”

“아니, 아무것도.”

택시가 잡히긴 할까 걱정이다.

낮 시간에는 지하철역 입구만큼 택시들로 붐비는 곳이 없지만 지금은 새벽 5시.

밤늦게까지 운전하다가 곯아떨어진 택시기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냉혹한 시간이다.

일단 잡아보려 했다. 실제로 몇몇 택시가 스쳐 지나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죄다 손님 받을 일 없다는 듯 무시하고 사라졌다. 아니면 만차등을 깜빡이거나.

어쩔 수 없이 앱으로 불러보니 대기 시간이 30분이랜다.

한참 걸리겠군. 우리 둘 다 도로 쪽으로 손을 길게 뻗은 채 이야기를 나눴다.

“그 아이랑은 친해지셨어요?”

“잘 모르겠다.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

“먹을 걸 나눠줬다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일 텐데요.”

“어, 진짜?”

초콜릿을 받기는 했지. 누텔라에 찍어서.

“정말요? 그거 의외로 맛있죠?”

“인정하기는 싫지만.”

무슨 원리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째서 초콜릿에 초콜릿을 찍었는데 맛있을 수 있지. 아이템 강화 그런 건가.

“의외로 멀쩡하게 대하는 거 같다?”

“뭐가요?”

“네 동생 말이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유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저번에는 시선도 안 주고 휙 지나갔고.”

“그때는 마음의 정리가 덜 됐을 때였죠.”

“지금은 다 됐고?”

“물론이죠.”

당돌하시기도 하지.

나도 저렇게 자신감 있게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버릇이라는 건 옷이 아니라 허물 같은 거라서 제멋대로 입고 벗고 할 수가 없다. 가루가 돼 떨어져 나가길 기다릴 따름이다.

헛헛한 생각에 잠기는데, 유가 운을 텄다.

“그냥…… 계속 생각을 해봤어요. 오빠도 슬슬 아시겠지만, 그 아이, 총수의 말에는 거스르지를 못해요.”

이처럼, 유는 자기 어머니를 직함으로 부르곤 했다.

그것도 존칭을 빼고.

“총수의 교육이 워낙 특이해서요.”

“어떤 식인데?”

“비인간적이에요.”

“때려?”

“때리는 건 인간적이죠. 그것만큼 인간미 있는 훈육도 없을걸요.”

허어.

“그렇게 말하니까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

“때리면 때리는 사람도 손이 아프잖아요? 동등한 수준으로 아프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때린다는 느낌이 있죠. 저는 그게 상당히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총수와는 다르게.”

“그러면 너희 어머니는, 총수님은 어떤데?”

“책을 한 권 줘요.”

책?

내가 알고 있는 그 책을 말하는 것인가.

설명을 끊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그것도 나와는 매우 익숙한 책, 유교서적 같은 걸 주로 취급한다고.

거기까지 들어서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책을 읽고, 글자를 분해해요. 주로 ‘부모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든지, ‘사람 사이에는 순서가 있다.’ 같은 문구죠. 책의 서른 페이지 정도를 갈기갈기 찢어서 그걸 맞추게 해요.”

“예?”

무슨 그런 해괴한.

공자가 보면 괴력난신이라 윽박을 지를 듯한.

“이상하죠?”

“아니, 이상하고 자시고 이해가 안 가는데……. 서른 페이지를 맞춘다고?”

“구절을 완전히 외운다면 시간을 한참 잡아먹는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죠. 제 경험으로는 평균적으로 여덟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 것 같아요. 집중한 상태에서.”

“그러셔…….”

이건 신고감인데.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재조립된 책을 총수가 다시 읽어요. 이전에는 통독을 하고, 맞춰놓은 걸 정독하죠.”

심지어 엄청 고상해.

아니아니. 진짜 우아하잖아.어쨌거나 유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냥 책을 읽게 되는 것뿐이니까.

폭력과는 전혀 다르다. 그녀는 달콤한 홍차라도 마시면서 독서를 즐기면 그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주먹으로 패는 게 인간적이다.

“이런 벌이 한 서른 가지 돼요. 그날 총수의 취향대로 선택되고요.”

“서른 가지…….”

집을 나올 만한 사유가 된다. 나는 오늘부터 마음속에서 유의 불효를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불효라는 이상한 단어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재판부는 사과문과 함께 그녀를 무죄 방면하는 것이 합당하다…….

“꼭 그것만은 아니에요.”

유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곤해 보였다.

“벌은 견딜 수 있죠. 16살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버텨왔는걸요. 제가 집을 나온 원인은…… 총수의 사고방식 그 자체예요.”

“사고방식.”

“그 사람에게 파계종은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요. 언론에 돈을 뿌려대고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있지만, 사업을 확장할 수만 있다면 파계종과 연합할 준비조차 갖춘 수전노예요.”

유가 슬프게 중얼거렸다.

“총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몰라요.”

유는 수시로 어머니를 악평한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당황하게 된다.

뉴스에 의해 보도되는 제갈무와 딸에 의해 폭로되는 제갈무가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가 인류에게 헌신하는 양심의 기업인이라면 후자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인간말종이 된다.

정확성을 놓고 따지자면 유의 판단이 정확하겠지. 어머니의 인격적인 면은 다른 누구보다도 딸이 또렷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재벌가의 혜택이고 나발이고 팽개치고 목숨을 거는 현장까지 도망친 것이 아니겠나.

어쨌거나.

어쨌거나 우리 대화의 주제는 ‘랑을 만날 준비는 되었는가.’였다.

“그 아이도 저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당장은 어렵겠지만 말이지.”

“워낙에 시키는 족족 따라다니는 녀석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설득해야죠. 적어도, 저를 다시 머즐드독스에 끌고 가지는 않도록. 오빠가 도와주실 거라고 믿어요.”

“글쎄, 내가 뭔가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질 않아서…….”

“옆에서 거드는 거면 충분하죠.”

잘 거들 것 같지도 않다는 말.

그것만큼은 삼켜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유는 평소보다도 기운차게 오늘의 계획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랑을 설득시킬 일종의 공략집 같은 느낌이었다.

전부 귀에 들어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시종일관 떠드는 목소리를 비집고, 어떤 생각이 스쳐왔기 때문이다.

대단하구나.

이런 아이를 구원했다니.

………그건 재인의 표현을 빌린 것이어서, 떠올린 스스로조차 몸서리쳐지는 것이었다.

***

새삼스러운 얘기 좀 할까.

제갈 가문 두 딸의 만남에 내가 낀다는 영 달갑지 않을 소식은 랑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다만 랑은 ‘언니에게도 동행인이 있다.’라는 식으로 다소 마일드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현실은 마일드가 아니라 와일드였다.

아침 여섯 시가 막 지나갈 무렵, 택시는 서울 구로구의 먹자골목에서 멈췄다.

아직까지도 한산한 그곳에서 금발의 메이드와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가 먼저 차에서 내렸고, 랑은 활짝 웃었다.

그러나 이어서 내가 내렸을 때 랑의 태도는 딱 이랬다 : ‘공익이 왜 거기서 나와……?’

본래라면 간만에 만나게 된 언니와 다정하지는 못하더라도 훈훈한 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마주한 랑은 그럴 여유를 잃어버렸다. 녀석은 당장에 폴트를 붙잡고 고압적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폴트는 평소와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말씀드린 동행자입니다.”

“말장난? 말장난? 폴트 지금 나한테 말장난?”

“저기, 미리 언질이 없었다면 미안한데.”

내가 끼어들자 랑은 이쪽을 휙 돌아봤다.

“어떻게 된 것. 잠깐 좋게 봐주니까 상황파악 못하고 끼어들은 것? 그런 거야? 암만 그래도 용납할 수가 없어. 제대로 설명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데려왔어.”

유가 나를 밀치고 도도하게 말했다.

상황이 복잡해졌군. 갑자기 재인이가 1승을 추가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걔한테 이기든 지든 내 알 바 아니라며 그냥 나왔을 것 같으니 이런 소모적인 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언니가 사실대로 밝히니 동생은 할말을 잃었다.

침묵하던 랑이 문득 폴트를 붙잡고 뭔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니, 비밀스럽다고 할 것까지 없고 랑이 폴트를 갈구는 모양새다.

폴트가 웃는 낯으로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사과한다.

다행히 회의는 금방 끝났다. 어떤 합의가 오고간 것 같았다.

짐작하건대 폴트가 ‘한나진 씨는 아가씨와 친하지 않습니까. 도와주실 겁니다.’라는 식으로 설득했겠지.

안타깝지만 이쪽은 딱히 누구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내 목표는 오직 하나, 이 해괴한 자매가 화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게 랑이 유를 포기하는 식이든, 아니면 유가 본가로 돌아가는 식이든 상관없다.

자매가 사이좋게 된다면 그걸로 족하다. 어떤 식으로든 화해의 분위기만 조성되면 그 방향으로 따라갈 것이다.

솔직히 시류에 거스르는 건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줬으면 좋겠지만, 무리겠지.

“우리 사이를 방해하지 마.”

“그래…….”

랑의 경고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녀석은 나를 한동안 째려보았다.

물론 나는 눈길을 피했다.

이곳은 두 재벌가 딸들이 맞서 싸우는 곳, 약자로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때보다 치졸해져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찾아볼까.

랑의 울화가 이쪽으로 향하면서 자매들끼리 만나자마자 싸운다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뭐가?”

“길거리에서 얘기할 거였으면 통화나 카톡질로 끝냈겠지. 그러니까 어딜 가긴 가야지.”

현재는 겨울 아침이고, 어지간한 가게나 식당은 문을 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문을 열었다고 해도 아직은 장사하지 않는다는 대답만 들을 테고.

물론 이 시각에 모이자고 주장한 것은 내가 알기로는 랑이다.

그녀가 식당 티켓까지 잔뜩 보내왔으니 일정 자체를 그쪽에서 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새벽 여섯 시에 모이자고 한 것인가.

“멍청이. 내가 그냥 식당에 가는 줄 알아?”

“티켓들은 그냥 식당이던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냥 식당이 아니라 각종 식당이라고 해야겠지.

분식집부터 시작해서 호텔에 딸린 고급 레스토랑까지 총망라했으니.

그러나 어떤 종류의 식당이건 간에 장사가 가능한 시간에 오픈한다.

지금부터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여섯 시는 좀…….

“전세 냈어.”

내가 얘들 수준을 깜빡했군.

“뭐? 네가 뭔데 식당들을 전세 내!”

멍하니 듣고 있는데 유가 버럭 화를 냈다.

“나 부담스러운 거 싫어하는 거 몰라? 돈 많다고 티내고 다닐 일 있어? 내가 그래서 집 나온 거 알잖아!”

“그, 그렇지만 언니, 나는 가급적이면 우리끼리만 있는 곳에서 얘기하고 싶어서…….”

“어휴. 정말!”

“큰 아가씨, 작은 아가씨가 큰 아가씨를 위해 알고 있는 모든 맛집에 들러 사정사정해 얻을 수 있었던 전세권입니다. 본래라면 전세 같은 걸 내줄 일 없는 작은 가게에서도 따내지 않았습니까.”

“……알았어요, 금발. 알았다구요.”

이곳의 대화는 너무 초월적이어서 내가 어떻게 끼어들을 여지가 없군.

폴트가 매우 훌륭한 압존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겠다.

무의미한 다툼을 최소화하는 게 내 역할이다.나는 자매 사이에서 손사래를 치며 물었다.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맨 처음으로는 어디로 갈 건데?”

“맛있는 분식집을 알아. 아침이니까 가볍게 거기부터.”

“그래, 분식집 어디…….”

“부산.”

여긴 인천인데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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