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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9화 (9/112)

〈 9화 〉 002. 저는 일반인입니다. 쏘지 마세요 (3)

* * *

“하젠야크트는 재작년 독일에서 나타났던 파계종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긴 회의가 이어졌다.

지루한 걸 참지 못하는 한월은 아까 전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재인은 주변 상황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희미한 웃음과 함께 한월을 쳐다볼 뿐이다.

그나마 유가 부부장 그리고 지휘관(대리, 제갈 가문 수행인으로 보이는 검은 정장의 남성. 정작 폴트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중간 중간 ‘하여간에 그 금발 메이드, 게을러 빠져서!’ 하고 투덜거리는 거리긴 하지만.

그러는 동안 재인은 잠에 빠진 한월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아본다.

따뜻하다. 엄청 따뜻해. 무심코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가 재인은 얼굴을 붉혔다.

당장에 손을 내려놓았다.

한월은 아직 깨지 않았다.

재인은 솔직히 세계의 운명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인천지부 최고의 팀으로서 사명감 같은 것도 적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한월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월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그러니 재인도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한다.

그것뿐이었다.

“파계종이 내뱉은 말을 신뢰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우리를 혼란하게 하려는 술책일 수도 있잖아요.”

“모든 파계종이 같은 원리로 움직이는 건 아니라네. 유 양도 알고 있을 텐데?”

유와 부부장이 그렇게 말을 나누었다.

부부장의 말마따나 모든 파계종이 단편적으로 인간을 멸절시키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그들의 패턴은 상당히 가변적이다.

지성이 없는 개체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공격하지만, 지성이 있는 개체에게 통솔 받을 때는 절제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간혹 그들끼리 크고 작은 규모의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특정한 목표지점만 탈취한 뒤 사라지기도 한다.

“특히 바롱은 인도네시아에서 살상은 거의 하지 않고, 대신 문화재를 파괴하는 데에 골몰했지.

이번에도 공격하려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고. 안전만 확보된다면 대화를 시도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제 동생이 죽을 뻔했어요! 한월 오빠랑 재인 언니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라고요! 그게 어떻게 살상을 하지 않는 태도인가요?”

“어디까지나 ‘거의’ 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네. 그래, 유 양이 말한 대로 이번 경우는 출몰 원인을 뚜렷하게 알기 어려워.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적극적인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재인은 한월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나가 있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둘은 회의에 적극적이지 않은 게 모두에게 알려진 상태라서, 빠진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터였다.

본래라면 유에게 잔소리를 듣게 됐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부부장과의 대화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둘은 조심스레 회의실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장 눈에 들어오는 음료 자판기를 본 한월이 거기에 등을 기댔다.

재인이 걱정스레 말했다.

“잠이라도 설쳤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영역지정을 썼더니 지정력이 떨어졌나 봐. 조금 있으면 낫겠지.”

재인이 한월의 뺨에 슬쩍 손을 올렸다. 열은 없었다. 아픈 것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커피라도 마실래?”

“괜찮아. 그보다도, 회의 도중에 중요한 얘기는 없었어?”

재인은 잠깐 생각하는가 싶었다.

그녀는 한월처럼 잠에 빠지기까지 한 것은 아니라서 흘러가는 논의의 줄거리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바롱이 나타났고, 그것이 하젠야크트라는 독일에서 확인된 파계종을 언급했으며, 인간들에게 뭔가를 전해주려 했다는 것.

아니면 제갈랑이라는 어린아이의 목숨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사실 정도일까.

이야기를 대강 듣자 한월은 한숨을 쉬었다.

“골치 아프네……. 하젠야크트는 A+급 파계종이라서 승도 아저씨나 마베 꼬마까지 불러와야 할지도 모르는데. 둘은 지금 외국에 있던가, 서울에 있던가?”

“서울이라고는 했지만 잘 모르겠어. 워낙 바쁘게 돌아다니니까.”

재인이 한월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 한월이라면 할 수 있으니까. 내가 곁에서 도와줄게.”

“아하하…….”

아래로부터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한월이 멋쩍게 웃었다.

뭐랄까, 재인이 소곤소곤 말하면 듣는 입장에서는 귀가 간질거리곤 했다.

거리가 있더라도 재인은 꼭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게다가 검은 머리카락하며 포근해 보이는 카디건도 솔직히, 예뻤다.

그런 여자아이가 손을 붙잡고 괜찮아괜찮아 다독여주니 어떤 남자가 견딜 수 있을까.

한월은 슬며시 재인에게서 떨어졌다.

재인의 ‘괜찮아’라는 말은 입버릇이었다.

어떤 날에은 한월을 갑자기 뒤에서 껴안고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날에는 한월의 양손을 자기 가슴께에 끌어다 놓고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한월은 그 애정이 부담스러웠다.

“아무튼 파계종 자체는 차치하더라도, 진짜 문제는 유네 가정사 같단 말이지.”

한월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유가 가출했다는 건 알았지만, 아예 동생이 찾아올 줄은 몰랐어. 게다가 그 동생이라는 아이는 목숨을 위협받고 있고…….”

“한월이는 유를 도와주고 싶니?”

재인이 그렇게 물었다.

한월이 멈칫했다. 그의 동공에 조금 부풀어 있었다.

한월은 길지 않은 생각 끝에 말했다.

“글쎄, 솔직히 말해서 조금 부담스러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인천시를 지키는 입장이 되었다보니……. 이런 와중에 유를 도와줄 여유가 있을까?”

“한월이라면 할 수 있어.”

재인이 확신을 갖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한월이 미묘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회의실 안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유가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하고 소리치는 소리였다.

아마 지휘관(대리)가 뭔가 발언을 한 모양이지. 한월이 뺨을 긁적거리다가 회의실 문에 손을 얹었다.

“졸음도 깼고, 이제 들어갈까?”

“응.”

재인은 잠깐 뒤를 돌아봤다.

“……그렇지만 한월이 먼저 가 있어.”

“나 먼저? 다른 용무라도 있어?”

“으응, 그런 게 있어서……. 잠깐이면 돼.”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한월을 남기고 그녀는 복도 저편으로 도도도 뛰어가기 시작했다.

걷는 뒷모습이 귀여워 한월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것도 잠시. 회의실 안쪽에서 그를 질타하는 목소리를 듣고 움찔 떨었다.

아무래도, 제갈 가문의 아가씨가 화가 난 모양이었다.

***

………이어서 재인이 찾아간 곳은 자료보관실이었다.

회의실 반대편 복도 끝의 자물쇠로 잠긴 방이었는데, 재인에게는 메모장이 있어 자물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인은 메모장에 ‘자료보관실 열쇠’라고 적은 뒤 적힌 글자를 따라 읽었다.

이어서 허공에서 열쇠가 나타나 바닥에 떨어졌고 재인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여기서 얼른 유의 자료만 찾아서…….”

재인은 중얼거렸다.

한월은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재인은 믿고 있었다.

한월에게는 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고. 다만 자신감이 없고 추진력이 부족해서 망설일 뿐이었다.

그러니 재인이 최대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안 됐다.

위기의 순간에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면 한월의 연인이고 뭐고 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연인이라는 생각에 잠시 얼굴이 붉어진 재인은 헛기침을 했다.

어쨌거나, 지금의 문제점은 한월도 재인도 유와 그녀의 동생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정도 알지 못하는데 도와주는 것은 어렵다. 때문에 재인이 직접 나서서 유에 관한 자료를 찾기로 한 것이다.

재인은 아까 만들어낸 열쇠를 천천히 꽂았다.

……그러나 맞물리지 않았다.어떻게 된 것일까, 하고 문고리를 살짝 돌려보니 그대로 잡아당겨졌다.

원래부터 열려 있었던 것이다. 순간 재인은 당황했지만, 일단은 유의 자료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What the…….”

그러다가 재인은 무엇인가와 마주쳤다.

우선은 영국식 영어였고, 둘째로는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였다.

금발에 제법 큰 키. 새카만 칼날들의 새로운 지휘관으로 부임한 폴트였다.

자료실 내부에 서 있던 폴트는 당황한 눈빛으로 재인을 쳐다봤다.

재인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오갔다.

잠시 한국어를 잊어버렸던 폴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무슨 용무로?”

“지휘관이야말로 무슨 일인가요?”

재인이 되묻자 폴트는 능숙하게 받아쳤다.

“자료를 찾고 있었습니다. 특이한 파계종들이 나타났으니까요.”

폴트는 다시 물었다.

“아무튼, 무슨 용무로?”

“저도 자료를 찾아볼 게 있어서요. 출입은 따로 허가받지 않았지만, 상관없겠죠?”

“……제 소관은 아닌 것 같군요.”

폴트는 그러더니 꾸벅 목례하고 바깥으로 빠져 나갔다.

홀로 남겨진 재인은 잠시 폴트가 지나간 방향을 쳐다봤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나진과 친해 보인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마저도 아마 나진의 팀에 모시는 소녀가 있기 때문일 테지만.) 재인은 폴트에게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재인은 금방 잊어버리기로 하고,본래 찾으려 했던 자료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지정자에 관해 모아놓은 서재에서 제법 아래 칸, 성씨가 ‘제갈’이니까…….

“……찾았다.”

재인은 곧장 서류철을 빼냈다. 제갈랑과 제갈유 모두에게 하나씩의 문서뭉치가 있었다.

전자는 머즐드독스라는 군수업체 대표로서, 후자는 새카만 칼날들의 지정자로서 기재돼 있었다.

재인은 우선 제갈유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고 페이지를 펼쳤고……….

그곳에서 사라진 몇 페이지를 발견했다.

‘능력의 활용’이라는 제목 밑으로 종이가 찢겨 있었다.

재인은 다시 폴트가 지나간 길을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도.

***

그날 나는 일찍 사무실로 돌아왔다.

지부에서 바롱에 관해 연락할 수 있으므로 오늘은 더 이상 출동이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안도감은 들지 않았다.

지부에서 뭔가 진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나를 부리는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차를 돌리라는 명령은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갑자기 부를 때는 택시비를 주지 않는 것이 관료제의 관행이었으니…….

어쨌거나 나는 지금 사무실로 돌아왔고, 소파에 누웠다.

딸려있는 소형 텔레비전을 켜고 냉장고를 뒤졌다. 맥주만 몇 캔 남아 있었다.

마실까 말까 고뇌하다가 그만뒀다. 언제 불려나갈지 모르는 와중에 술을 마실 수 있을 리가.

어쩔 수 없지, 담배나 피울까 하다가 이것도 역시 그만뒀다.

유의 말대로 돈 낭비야.

그러고 보면 나는 피우고 싶을 때 피우는, 다시 말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의 충고 몇 마디를 떠올리고 담배를 자제할 수 있는 것이 엄청난 능력이라는 사실을 흡연가들은 알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암튼 내 주머니에는 오늘 아침에 편의점에서 구매한 담배가 한 갑 들어 있는데.

또 우울감이 몰려왔다.

텔레비전을 끌까 말까 하다가 그냥 뒀다.

그보다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에 관심이 기울었다.

……샤워실이었다. 화장실을 겸한 것이었는데, 벌써부터 씻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이 사무실을 사용했던 유일한 존재인 내가 이 시각에 씻지 않았으니까.

나는 흘끗, 그림자가 비친 샤워실을 쳐다봤다.

실루엣은 랑보다는 훨씬 크다.

게다가 입구 앞에 떨어진 메이드복으로 보아 샤워실에 들어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으음~ 이제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샤워 중인 폴트와 마주치는 장면을 연출해줬던 건가.

고마워서 돌아버리겠군.

나는 샤워실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폴트죠?”

“누구……. 뭡니까, 계셨습니까?”

“막 돌아왔어요. 씻고 계신 거 같은데 나갔다 돌아올까요?”

폴트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대답 자체를 유보하지는 않았다.

“죄송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뇨, 뭐…….”

괜찮다.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내가 씻을 때에도 널더러 나가 있으라고 할 거지만.

그나저나 담배 참으라고 훈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피우라고 압박을 넣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언제 호출될지 몰라 우울한 저녁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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