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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2화 (2/112)

〈 2화 〉 001. 세상은 니네끼리 좀 구해

* * *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빌어먹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익숙한 천장 (병원 특유의 회색 플레이트) 이지 않나. 병문안을 온 사람이 웬 시커먼 남자애지 않나.

보통 옆에다가 사과 깎는 여고생 정도를 붙여주지 않던가.

교복 넥타이를 살짝 풀어맨 한월은 나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다행스럽게도 사과를 깎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더라도 나는 화답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메마른 입을 쩝쩝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됐냐…….”

“글쎄요.”

한월이 어깨를 으쓱했다.

“형이 기절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요. 특별히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있나. 병원비를 내가 내야 하는데.

끌려갈 때는 국가의 아들이지만, 다쳐서 들것에 실려 가면 느그 아들이다.

수천 년을 내려오는 이 유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지정능력 대체복무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말이 복잡하다면 그냥 공익근무요원의 병원비에 보태줄 세금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이것도 복잡하다면 그냥 내 말을 듣지 마라…….

일어서려는 것을 한월이 말렸다.

하지만 지금 한월은 심리적으로 내게 도움이 될 수가 없었다.

저쪽은 A급 지정자라서 병원비는 물론이고 숙소와 연금까지 지급된다.

나와 그 사이에는 딱 공익과 행정고시 패스한 5급 공무원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재수 없는 녀석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그냥 일어섰다.

갸아아악.

찢어질 듯한 아픔이 등을 달렸다. 비명을 지르자 한월이 헛웃음을 흘렸다.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지휘관 누님은 어디로 가고 네가 왔냐?”

“오늘부로 교체됐대요. 새로 오신 분이 계셔요. 그러고 보니까 형은 아직 소식 못 들었겠네요.”

아이고, 그러냐.

하긴 병원에서 첫만남을 할 수야 없지.

내 꼴이 추레한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병원에서는 특히 추하지 않겠니.

그래서 찾아오지 않았다면 정말 다행이다.

공무원들의 기묘한 배려에 감탄하며 나는 다시 제자리에 누웠다.

어차피 일어서지도 못할 거였으면 5급 공무원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로군.

“그러게 왜 그렇게 깊숙이 들어오셨어요. 다른 길앞잡이들은 모두 빠지는 타이밍이었는데.”

“됐어,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까 더 듣고 싶지 않아……. 다른 길앞잡이들은 무사하고?”

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인 일이었다.

내가 속한 붉은 길앞잡이를 비롯해 팀명에 ‘길앞잡이’라는 단어가 달라붙은 팀들은 팀명의 어감과는 다르게 최약체들이다.

후속부대를 인도하는 엘리트 집단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름과 본질 사이에 괴리감이 발생하는 이유가 있겠지.

그것은 파계지점이 발생했을 때 파계종이 나타나는 순서를 고려하면 간단하게 알 수 있다: 약한 파계종들이 먼저 나오고 강한 것들이 늦게 나온다.

물론 한월처럼 스컬터 따위의 저급 파계종을 손짓 하나로 날려버리는 지정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지정자의 지정력은 무한하지 않은 것이다. 낭비를 아끼기 위해 채택된 정석적인 파계지점 공략법은 결국 약자와 약자를 맞붙인다.

즉, 선 진입하는 상대적으로 약한 팀이란 의미에서‘길앞잡이’인 셈이다.

어젯밤도 그런 식이었다.

내 팀인 ‘붉은 길앞잡이’를 포함한 약체 팀들이 일차적으로 들어가서 약한 파계종들을 잡아냈다.

그 다음 한월의 팀인 ‘새카만 칼날들’이 후진입해서 점차 강해진 파계종들을 상대하려 했다.

다만 타이밍이 어긋나서 물러설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불어난 스컬터 떼거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리타이어.

정말 아름다운 결말이군.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데 등 근육이 팍팍 땅겨서 못 해주겠네.

“혼자 다닌 게 문제였어요. 형, 제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요.”

“아, 그러냐.”

“팀원들은 도대체 어디 있었어요?”

“어디 있기는…… 죄다 도망쳤지.”

한월이 특유의 ‘예에?’ 하는 표정을 지었다. 덧붙여서 내 특유의 표정은 ‘허어.’였다. 지금과 같이.

“한 명은 다쳐서 요양 갔고, 다른 한 명은 모르겠다. 도망을 쳤는지 뭘 어쨌는지…….”

한월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너는 이해가 안 가겠지.

피고인을 만난 검사와 변호사는 대부분 ‘얘는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법이다.

5급 공무원이 바라보는 세계와 공익이 바라보는 세계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은 결코 유별난 일이라 할 수 없다.

깊게 생각하는 버릇은 좋지 않다.

음울한 어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로 하고 나는 화제를 돌렸다.

“됐어, 아무튼. 너는 안 다쳤지?”

“저야 끄떡도 없죠.”

그러냐, 우와, 좋겠다…….

“됐다. 너는 가서 지구나 구해라.”

“형까지 그 얘길 하세요? 유가 떠드는 것만 해도 지긋지긋해요.”

한월은 답답하다는 것처럼 끙끙거렸다.

하긴, 주변에서 얼마나 떠들어댈까.

내가 알기로 한월이는 몇 주 전에 대통령까지 만나고 왔다.

연수구 구청 앞에서 나타난 A급 파계종을 처치한 공로를 인정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부담감을 많이 주겠지. 지금 언급된 ‘유’만 해도 한월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편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한월이 내 농담처럼 지구를 구할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가끔은 그런 착각이 들곤 한다.

이런 세상을 구한다니. 나에게든 누구에게든 허황됐다.

나는 다시 일어서길 시도했다.

한월은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금방 포기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서라. 절박한 상황에 몰린 인간은 의외로 강한 법이다.

나는 등의 통증을 이겨내고 똑바로 섰다. 한월이 박수라도 쳐줄 것 같은 눈빛을 했다.

정말로 치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말은 아껴두기로 하고.

“가야겠다.”

“퇴원이요? 벌써요?”

“그래. 지휘관 만나야지, 새로 왔다는데. 어디 계셔?”

“아하하…….”

한월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현장에 계셔요.”

“현장? 무슨 소리야?”

“동막역 근처에 스퀘어원이라고 쇼핑몰 있잖아요? 거기 파계지점이 나타나서.”

“허어.”

파계지점이 벌써 다시 생겼다는 말인가.

인성을 따질 수 없는 물리현상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쉬는 것이 서로에게 이롭지 않을까.

언젠가 파계지점이 인격체가 되어 나타나면 그때 따지도록 하자.

그러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

“……그리고 형네 팀의 새로운 팀원도 왔어요.”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월이 말했다.

나는 잠깐 동안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멍하니 한월을 바라봤다.

팀원이 새로 왔다고?

“우리 팀? 온다는 소식 못 들었는데…….”

“글쎄요. 갑자기 찾아오는 것도 가끔 있는 일이니까요. 게다가 워낙 특이한 사람이던데요.”

“네가 만나 봤어?”

“예. 제가 제일 먼저 만났어요.”

이것도 5급의 영향력인가.

아마 아니겠지.

그보다는 특유의 편의주의적인 인맥 닿기일 것이다.

이 녀석은 내가 아는 사람에 대해 물어보면 ‘어, 저 그 사람이랑 친해요.’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끔찍한 버릇이 있다.

“특이한 사람이라니 무슨 말이야?”

“직접 말씀드려도 이해가 안 갈 거 같아요. 그냥 직접 가서 보시는 게 빠를걸요.”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것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냈다.

한월이 다시 민망하게 볼을 긁적거렸다. 한월은 덧붙였다.

“그 팀원도 지금은 현장에 있어요. 새로 오신 지휘관이랑 친한 모양이에요. 이것도 좀 이해가 안 갈 테니까 그냥 직접 가서 확인하시는 게.”

“많이 심각한 모양이구나.”

“예, 많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물론 슬픈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한월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거, 출동 명령 떨어졌는데 안 나가면 연차 날아가는 건가?”

“글쎄요, 지금 날아가는 중 아닐까요?”

세상에 마상에. 나는 당장 코트를 걸쳤다. 지켜보고 있던 한월이가 이번에도 헛웃음을 흘렸다.

복도로 같이 나가고 길은 엇갈렸다.

나는 퇴원 수속을 위해 원무과로 가야 했고, 한월이는 정문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이재인이라고, 마찬가지 ‘새카만 칼날들’의 팀원인 여고생 지정자와 같은 택시를 타기로 한 모양이었다.

참고로 그 녀석까지 B+등급이다…….

딱히 상관없지만.

나는 괜찮지만.

정말로.

어쨌거나 파계종으로 가득 찬 쇼핑몰에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영웅의 등짝은, 네 갈래로 갈라진 내 등짝보다야 멋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

그녀의 이름은 제갈유다.

한월보다 한 살 어린 17살이고, 고등학교 1학년이다.

지정자로서 활동하는 도중에도 꿋꿋이 학교 수업에 참석한다는 점에서 성실한 아이다.

자기 성씨를 싫어하는 것만 빼면 스스로를 아낄 줄도 아는 아이다.

곁에 있으면, 고등학생이라는 건 이렇게 풋풋하고 귀여운 존재구나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아직 길앞잡이 팀들을 제외한 지정능력자는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계가 시작되고 파계지점이 완전히 붕괴해 고등급 파계종을 쏟아내기까지 (범위에 따라 다르지만)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민들이 질서 있게 대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퀘어원 쇼핑몰은 아직까지 안전하다.

기껏해야 D등급 파계종이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는 그곳에 있었다.

그 아이는 원래 그랬다.

새카만 칼날들 팀에서 가장 성실한 녀석이었다.

아니,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성실하다. 옳지 않은 일이 생기면 곧장 지부장님에게까지 달려가 따질 정도인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 팀에 한 명의 S등급 지정자와 두 명의 A등급 지정자가 있었기에 어지간한 요구는 승인됐다.

“또 늦었잖아요, 오빠.”

……더불어서, 한월과 함께 그나마 나와 친한 ‘새카만 칼날들’ 팀원이었다.

“늦었어요. 엄청 늦었다구요.”

교복 블레이저를 착착 접으며, 유는 내게 투덜거렸다.

나는 유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길앞잡이 인원이 부족해서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요? 지휘관이 저더러 들어가지 말라는 걸 무시하고 직접 사람들을 꺼내왔어요. 오빠도 가서 일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나는 끄덕거렸다.

유는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이 강한 편이다.

평소에는 평균적인 여고생보다도 너그러운 편인데, 업무가 시작되면 저렇게 성격이 바뀐다.

그녀가 악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진지할 뿐.

오는 길에 사무실에 들러 여분의 클로를 챙겨왔다.

아직까지 등이 아프기는 하다.

하지만 다른 길앞잡이 팀들이 있다는 전제 하에 스컬터와 싸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곳에 남 돌보기를 잘하는 유까지 있으니 안전은 확보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연차의 낭비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 왔다는 지휘관과 팀원에게 인사를 나누는 것보다는 못하다.

나는 유에게 지휘관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유는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몰라요. 안에서 설치고 있겠죠.”

“이상한 사람이야?”

한월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반응이 좋지 않다.

“글쎄요. 그건 아니지만 새로 왔다는 붉은 길앞잡이 팀원이랑 떠들기만 하더라고요.”

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만스레 중얼댔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눈치 챘다는 것처럼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면 오빠가 붉은 길앞잡이 팀 아닌가요?”

이제 기억난 거냐.

따지고 싶다. 하지만 꾹 참는다.

“큰일 났네요. 새로 온 팀원, 얼른 쫓아내주세요. 꼴도 보기 싫어요.”

“벌써 싸웠어?”

“싸우기는 예전부터 계속 싸웠죠.”

무슨 말이야, 하고 되묻기도 전에.

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괴롭게 신음했다.

“제 동생이에요. 새로 왔다는 애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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