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38화 개인교습 2차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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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의 이상 행동에 대해 시에라와 고민하고 다음날.
혹시 말 못 할 부탁이 있는 거 아닐까 싶었던 추측을 마음에 둔 채 살펴보니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근거 없는 논리의 대입은 보통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 지양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한번 끼워 맞춰보니 정말 그렇게만 보였다.
……차라리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볼까.
수업 중에도 몇 번이고 눈이 마주친 걸 보면 기다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행동에 나서기 전.
“케일, 시간 괜찮아요?”
역시나 아이린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얼마든지.”
“……시에라 양과의 개인교습은 괜찮아요?”
“잠깐 양해를 구하면 되겠지.”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그럼 그거 포함해서 지금 말하고 올게. 어차피 복습 단계라 하루 정도는 빼먹어도 돼.”
기초와 관련해 가르칠 건 다 가르쳤다.
나머지는 시에라 본인에게 달려있었다.
시에라가 설마 다 알려줬는데 개인교습 없으면 실패하는 바보는 아닐 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곧장 양해를 구하러 움직였다.
“오늘 개인교습은 뺄게. 나 없어도 알려준 대로 혼자 복습해봐.”
“으, 응?!”
용건부터 꺼내자 시에라는 놀란 듯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아이린이랑 얘기 좀 할게.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그래.”
“아아, 그렇구나. 난 또 뭐라고.”
“네가 뭐 잘못한 줄 알았어?”
“헤헤, 응. 내가 너무 귀찮게 했나 생각했어.”
“귀찮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하겠다고 한 걸 빼먹진 않아.”
“……?”
사람이 책임감이 있어야지.
대의를 위해 나 하나 희생할 용기는 있었다.
“지금 귀찮다고 했……?”
“아무튼 간다. 오늘치 검사는 다음에 할 테니까 농땡이 피우지 말고 연습해. 조별 과제 발표 일주일도 안 남았다.”
“어, 으응. 케일도 대화 잘하고 와.”
나는 빠르게 용건을 마치고 복귀했다.
“끝났어.”
“……뭐라고 얘기한 거예요?”
“그냥 오늘은 개인교습 취소니까 혼자 하라고 했지.”
“근데 왜 표정이…….”
아이린을 따라 시에라를 바라보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으면서 왜 저런대.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거리에선 들리지 않았다.
“혼자 할 생각하니까 갑자기 걱정되나 보지. 알아서 잘하는 애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조별 과제 퀄리티에 급히 맞춘다고 개인교습을 했을 뿐.
사실 누가 안 도와줘도 시간만 넉넉하면 잘할 수 있었다.
아무리 지금 A반 최하위 성적이라도 주인공의 위엄이 있지.
한술 더 떠 개인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한들 걱정이 무용했다.
“걱정은 무슨. 눈엣가시인 평민을 제가 걱정하나요?”
아이린은 툭 쏘아붙이며 사나운 눈매로 시에라를 흘겨봤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구나.
그래, 아직 친한 사이는 아니지.
친해지기도 힘들고.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재빨리 넘어갔다.
“가요.”
나는 아이린의 뒤를 따라갔다.
따로 목적지가 있는 걸음으로 보이진 않았다.
저녁 식사 전 남는 시간이라 그런지 우리처럼 유유히 산책하는 이들이 많았다.
친구들끼리, 무리의 수장과 부하들끼리, 연인끼리.
갖은 관계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아이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씨가 좋네요.”
“…….”
나는 뜬금없이 하지도 않던 날씨 얘기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보통 이런 얘기는 아이린과 있으며 침묵을 견디다 못한 내가 하던 발언이었다.
아이린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날 쳐다보는 눈빛이 왜 침묵하냐고 재촉하는 듯하여 나는 상식선에서 대답했다.
“봄이잖아. 이곳 아카데미의 정원도 그렇지만 남부 영지에는 꽃이 많이 폈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거 봐라.
아이린은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깊은 뜻이 있어 말한 주제는 아니라는 소리다.
그냥 말길을 트기 위한 억지 잡담인 거지.
그녀가 이어 말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이번엔 진짜 참지 못했다.
우뚝 발걸음을 멈추자 아이린이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요?”
“아이린.”
“네.”
“가문에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
아이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저런 연기는 익숙하여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었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단 내 직감을 믿었다.
“말 빙빙 돌리는 게 너무 티가 나잖아.”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같이 있던 옛날에도 네가 나한테 이런 얘기는 안 했어. 수상해서 다 티나.”
“읏.”
과연 아이린은 정곡을 찔린 듯한 반응이었다.
목덜미에서부터 얼굴까지 피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수상하다고 할 것까진 없잖아요.”
“정말 문제인 거라면 지금 말해.”
이만하면 거의 확정이다.
나는 익숙하게 세실리아에게 손짓해 주위 사람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자세한 사정은 말 안 해도 좋아. 내가 혼자 알아보고 손을 써볼 테니 너는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
도움 요청이 아닌 내 오지랖이다.
아이린이 괜한 고마움 느낄 것도 없고,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내 머리로는 아이린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전에 제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사양하지 말고…….”
“아니라고요.”
아이린은 불퉁한 표정이었다.
내게 향한 시선에서 불만이 읽혔다.
……뭐지. 진짜 아닌가?
이건 연기 같지가 않은데.
긴가민가해진 내 가슴 속에서 자신감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오해였나.
오해면 진짜 쪽팔린 건데.
생각해 보니 괜히 멋 부린 것 같아서 손이 오그라들었다.
“됐어요. 시시콜콜한 소리하며 분위기 좋게 대화를 이끌고 가라니 무슨 의민지 모르겠네.”
중얼거린 아이린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괜한 오해하는 것 같으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응.”
“개인교습. 그거 저랑도 해요.”
진상은 뜻밖이었다.
“……? 지금 뭐라고?”
“두번 말하게 하지 마요, 케일. 개인교습 저랑도 하자구요.”
“고작 그거 말하려고 이상한 행동 했던 거였어?”
“이상……은 말이 심한 거 아니에요?”
아이린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치만 말하는 본인도 내 지적에 제 실수를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바닥으로 향한 눈동자가 충격에 휩싸여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고작 개인교습 부탁이면 뜸 들이지 말고 속 시원히 털어놓지 그랬어.”
시에라에게 해줬는데 아이린에게 못 해줄까.
어려운 파트 맡긴 건 맞는 만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협력할 마음이 있었다.
진상과 추측의 방향성이 다르긴 했지만 자존심 상한다는 건 맞았나.
남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은 그녀로서는 주저할 법한 일이긴 했다.
“어디서 막혔는데? 마지막으로 합 맞추기 전까지는 시에라 말고 너부터 도와줄게.”
아이린의 재능이면 사소한 부분에서 막혔으려나.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발표 날짜에는 충분히 맞출 수 있으리라.
“……저.”
하나 아이린은 입을 떼길 주저했다.
마침내 목소리를 흘린 것조차 개미 기어가는 성량이었다.
“저?”
“전부, 요.”
“……?”
나는 되묻기보단 시선으로 질문했다.
내가 들은 게 맞냐고.
그러자 아이린은 아예 내게서 등을 돌리다시피 했다.
내 귀가 잘못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전부라고…….”
……의외인데.
시작조차 못 한 거라면 가문 마법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터.
아이린이 어디서 헷갈린 건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이린은 적반하장의 진수를 보여주듯 내게 소리쳤다.
“주말에 케일이 알려줘요. 진득하게, 친절하게, 오래도록.”
뜻밖의 위기에 직면한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알았어요?”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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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지?”
“성공했어요.”
“훌륭하군.”
시에라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황태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박수쳤다.
“내가 이번엔 성공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역시 전문가는 다른 법이군. 내 이 공은 잊지 않지, 토메르 경.”
“과찬이십니다.”
그의 옆에 서있던 밀런이 빙긋 웃으며 겸양했다.
세실리아는 그 촌극이 웃기지도 않았다.
전문가는 무슨.
그냥 지금까지 황태자가 했던 조언이 이상했던 거다.
정상이 과대평가 받으니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 눈 뜨고 살던 기분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잠자코 있었다.
밀런의 조언에 특별함은 없었어도 그에게 맡기는 것이 황태자보다는 훨씬 나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도와준다면 가슴 답답할 일은 없겠다 싶었다.
“저보다는 제 말을 믿고 행동해주신 공녀님의 공이 더 큽니다. 공녀님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어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입에 침도 안 발랐는데 말이 술술 나왔다.
자칫 거북할 수 있는 아부도 밀런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합쳐지니 듣기 편안하기만 했다.
“뭐, 재주는 있는 분이시군요.”
“별말씀을.”
아이린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여태 죽을 쑤기만 하다가 첫 성공을 한 데다 그 공을 제게 돌리니 나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해야 사이를 진전시킬 수 있는 거죠? 같이 있을 시간이 늘어나는 건 좋다고 보지만 그것만으로 끝은 아닐 거 아니에요.”
아이린이 말을 이었다.
“자칫 케일에게 멍청한 여자로 보일 수 있는 부담을 감수한 일이에요. 그 부담 이상의 이득이 없다면 실망감을 느낄 것 같네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지금부터 설명 드릴 참이었습니다.”
밀런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당일 영애께서는…….”
좌중은 홀린 듯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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