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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34화 (34/40)

〈 34화 〉 34화 ­ 개인교습 2차전(1)

* * *

이프린 아카데미 내에서 귀족의 숙소는 일반 학생들의 기숙사와는 달랐다.

기본적으로 입주하는 한 명을 위한 독채이며.

내부 시설은 귀족의 격에 맞게 저택을 방불케 할 만큼 꾸며졌다.

그만큼 가격이 어마어마하긴 했다.

하나 귀족이란 종자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부류는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 체면을 못 세울 바에는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재원을 마련했다.

황실의 후원을 제외하고 아카데미의 운영 자금에 크게 기여하는 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재원은 특급 독채다.

본디 이는 보통 변경백, 혹은 중앙 정계 백작 및 후작가에 돌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올해만큼은 달랐다.

귀족 파벌의 수장이라 할 공작가 영애조차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작가 영애마저 고개 숙일 존귀한 이가 처음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였기 때문이다.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 유리스 엘하임.

최근 파격적인 행보를 일삼은 황실 내부에서도암암리에가장 특이하다 평가받는 그였다.

“어서 오게.”

황태자는 범의 가죽이 걸쳐진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응접실 내부 황금으로 치장된 가구는 가장 빛난다는 태양의 형용이다.

그를 둘러싼 호위기사들은 동상처럼 한치의 미동이 없었다.

아이린은 긴장하는 세실리아의 기색을 느끼며 예에 맞춰 인사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인사가 딱딱하군.”

황태자는 무심하게 내뱉으며 유리잔에 든 갈색 액체를 들이켰다.

“할 말 못 할 말 같이 나눈 사이 아닌가. 시답잖은 예법은 생략해도 돼. 내가 윤허하지.”

“호의에 감사드리오나 아니 될 말씀이시군요.”

아이린 역시 담담히 답변했다.

“예와 법이란 실용성을 따질 일이 아니며, 사이에 따라 간략화하여 넘어갈 일도 아니죠. 높은 곳에 선 자의 위엄이란 외모가 아닌 행동에 나타나는 법이오니 언제고 유념하여 행동하셔야 합니다.”

그러다 황태자가 손에 든 유리잔을 눈에 담곤 미간을 좁혔다.

“참고로 말씀드리오니 손님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는 예는 제국의 법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떠난 후 다시 즐기시죠.”

아이린의 침착한 설교에 황태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헛짚었군.”

“예?”

“술이 아니라 찻물일세.”

손짓하자 시종이 주전자를 들고 다가와 유리잔에 따랐다.

“헷갈리게 하여 미안하군. 일탈을 일삼는 나라도 학생 신분에 술을 즐길 만큼 막나가진 않아.”

“……하아.”

아이린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부채를 펼쳐 숨겼다.

설마 저게 지금 장난이랍시고 한 행동인가.

미동하지 않는 입가를 보면 아닌 것 같다가도, 왠지 놀림 받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하군.”

“무엇이요?”

“영애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여태 실패한 적 없는 장난이었는데 말이야.”

설마가 사람 잡았다.

아이린은 감쪽같이 속고만 산 그를 위해 발언했다.

“전하께 아부하려는 간신배들입니다. 내치세요.”

“말이 과하군. 그들에겐 재밌는 장난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일 없습니다.”

세상이 두 쪽 나도 아니다.

억지로 웃으며 장단 맞췄을 수하들이 눈에 선했다.

아이린은 죽었다 깨도 그리 반응해줄 마음이 없었다.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영애는…….”

아이린이 단호히 반응하자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지식하군. 귀족가의 영애다워. 머리 굳은 황실 학사들과 대화하는 기분이야.”

“저는 귀족이니까요. 칭찬으로 듣겠어요.”

“우습군. 그런 주제에 저번에는 내게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었나?”

“그건…….”

그때의 일을 꺼내면 아이린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케일에게 접근하지 말라.

아무리 공작 영애라도 황태자에게 내뱉을 발언은 아니었다.

심지어 공작가와 황실의 결합이라는, 제국을 뒤흔들 이면 합의까지 진행된 사이지 않았나.

말을 꺼낸 걸 후회하진 않되수치스러운 일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뭐, 좋아. 지나간 일을 따져봐야 무익하지. 그저 영애를 골릴 유흥거리 삼아 기억하고 있겠네.”

“이럴 때는 기억에서 지우겠다 말씀하시는 것이 맞는 수순 아닌지요.”

“그렇게 묻기엔 아까운 일이지. 꽤나 까탈스러운 성격인 듯한데 내가 변명할 거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

아이린은 지적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을 꾸욱 억눌렀다.

황태자.

이 짧은 대화에서도 잔소리할 거리가 화수분처럼 솟는 남자였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그러한 파격엔 충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 귀족의 도리였다.

하나 겉으론 동등하더라도 을의 입장인 그녀로서는 참아야 했다.

제 정치적 위치로 말미암은 을의 입장이었다면 참지 않았겠지만, 둘 사이의 거래는 그와 관련이 없었다.

케일.

그가 걸린 거래였기에 아이린은 참아낼 수 있었다.

“그래, 여하튼 우선 앉지. 이번엔 눈치도 없이 객을 세워두었다 지적당하지 않을까 겁이 나.”

“마침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어요.”

“천만다행이군.”

너스레여야 할 말이 너스레로 들리지 않는 건 저녁 시간 남녀가 한 방에 모였음에도 서늘하기만 한 분위기 탓이었다.

“피차 바쁜 몸이니 잡담은 이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황태자는 시종에게 유리잔을 넘기고 턱에 손을 괴었다.

“일전 내 거래 제안에 대한 대답은 결정했나?”

아이린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거래 제안.

아이린이 은밀히 황태자의 숙소에 발걸음한 목적이었다.

“제대로 기억 못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친절을 베풀어 다시 말해주겠네. 영애와 케일의 재결합을 돕고 가주로 추대해주겠다. 대신 영애는 내 사람이 되어 나를 돕는다.”

“…….”

“일주일이면 고민할 시간으로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만. 시간이 더 필요한가?”

쉬이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귀족 파벌의 수장인 공작 가문이 황실에 전적으로 협력한다니.

가뜩이나 소란스럽던 중앙 정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사건이다.

그렇다고 이 빅딜이 공작가의 영광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인 것도 아니었다.

오직 아이린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아버지 그레이슨 레오나드 공작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다.

“오래 기다려주진 못해. 흥미에 기반한 행동인지라 흥이 가시면 어찌 되어도 관심이 없거든.”

아이린과의 협력이 가장 이상적이라지만 꼭 최선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차선을 택해도 황태자는 케일을 제 수하로 들일 자신이 있었다.

케일의 숨겨진 뜻을 파악하였다는 그의 착각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

아이린은 차분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단적으로 평해 황태자와의 거래는 도박수였다.

제게 마음이 떠난 케일과의 재결합이 가능할지가 미지수고, 자신이 공작위를 계승한다는 가능성은 더더욱 계산 밖의 영역이었다.

일이 틀어질 시 황태자는 언제든 배에서 내릴 수 있다.

반면 아이린은 아니었다.

가문 내에 그나마 남은 제 영향력마저 모조리 잃어버릴 것이고, 완전히 꼭두각시로 살아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 또한 걸림돌이었다.

귀족이 가문의 손익이 아닌, 오직 제 감정에 기반하여 행동해도 되는 것일까.

그게 가진 것 없는 평민의 충동적 행보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저는.”

그러나 아이린은 제 마음이 기울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긴 침묵을 깨고 황태자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으리라.

감은 눈꺼풀 뒤편 어두운 장막 위로 뭇 장면이 스쳤다.

부티크에서 나란히 서 오붓하게 쇼핑하던 케일과 시에라.

무슨 사정인지 입학식에서 함께 들어오던 두 사람.

어느새 케일과 말까지 놓으며 친근감을 감추지 않던 시에라.

무례를 지적한 제 정당한 행동에 아닌 척 시에라를 감싸던 케일.

고득점을 목표로 한다는 명목으로 개인교습을 시작한 둘.

결정적인 사건은 오늘 일어났다.

시에라에게 밀런이라는 기생오라비가 접근하자 대놓고 불쾌한 티를 내던 케일.

개인교습 장소는 개인실.

뿌드득!

떠올리는 것만으로 부글부글 끓는 분노가 목 끝까지 치솟았다.

저도 모르게 품위 없이 주먹을 꽉 쥐었을 정도다.

하루 24시간 번뇌케 하는 이 가슴의 고통을 케일은 알까.

몰라주는 그가 미웠고, 여전히 가슴 뛰게 만드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차라리 내 눈에 띄지 말지 그랬어.’

그랬다면 시에라라는 도둑고양이가 케일을 채가도 곪는 속을 숨기며 축하해줄 수 있었을 텐데.

미련이 남아 밤잠 못 이루는 날이 있어도 추억으로 넘겼을 텐데.

가슴에 불을 지핀 이상 그런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케일의 잘못이야.’

그리 오래 함께했어도 아직도 제 마음을 모르는 그가 잘못했다.

제 성격을 알면서 제 주변을 맴돌고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면 그 또한 잘못이었다.

“전하와 손을 잡겠어요.”

아이린은 제 욕망에 충실하길 택했다.

******

빠각!

“……?”

난데없이 부러져버린 만년필에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이게 왜 부러져?”

힘을 크게 준 것도 아니다.

제품이 낡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촉이 부러지더니 잉크가 줄줄 샜다.

값비싼 연금용지를 물들이는 대량의 잉크에 나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앗! 괜찮으세요, 주인님?”

“다행히다치진 않았어.”

“우선 나오세요. 촉이 뾰족해서 잘못 건드리면 다쳐요.”

“아, 근데 연금용지가…….”

“연금용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다칠 수도 있다니까요?”

허리에 두 손 올린 루나의 서슬에 나는 어영부영 일어나 물러났다.

그치만 저거 진짜 비싼 건데.

개시부터 이리 어이없이 쓰레기로 변해버려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이런 실수를 저지르시게.”

“……응, 피곤하긴 했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감행한 시에라와의 개인교습.

이는 날 상당히 지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성과가 빨리 나질 않더라고.”

시에라의 진도는 오늘 하루 답보 상태였다.

“난 분명히 제대로 알려줬는데 기억을 못 한단 말이야.”

직접 몸속 마나를 움직여 흐름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이런 친절한 가르침에도 시에라는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얘가 이렇게까지 바보는 아닐 텐데.

집중 못할 사유가 있으면 가르쳐달래도 묵묵부답이었다.

“다음엔 잘한다고 하니 믿어 봐야지 뭐.”

안 되면 수업이고 뭐고 될 때까지 시킬 거다.

나도 힘들지만 진짜 힘들어질 건 본인이니 다음엔 각오하라고 전했다.

“그렇게 바쁘게 하루를 보내셔놓고 돌아와서 또 무슨 일을 하시려 하세요.”

청소를 마친 루나는 내 어깨를 두들겼다.

불만 표시인지 안마인지 분간이 안 가네.

“발표 때 쓰러지지 않으려면 지금 일해야지 어떡하겠어.”

나는 연금용지 위에 크게 그림을 닮은 문자를 적었다.

얼핏 보면 서킷의 도면과도 같은 구조.

어깨 위로 빼꼼 훔쳐 본 루나가 조심스레 의문을 표했다.

“……이걸로 진짜 마법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돼.”

내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마탑의 마지막 제안이었던 연구직 제안은 이것을 연구한 공로로 온 거니까.”

마나 서킷이 망가졌음에도 천재를 연기할 수 있는 내 믿는 구석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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