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1화 개인교습(1)
* * *
“아, 아. 들리세요?”
투명한 거울 위로 천천히 형상이 비쳤다.
그러나 거울이긴 하되 비친 것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짧게 깎은 턱수염.
부리부리한 눈매와 각진 턱.
넓은 어깨와 우락부락한 팔뚝.
전쟁 영웅 출신의 신흥 귀족.
내 아버지인 크레인 알베지아 남작이었다.
[……그래, 잘 들린다.]
마공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마법에 공학이 합쳐져서 마공학.
교복 옷깃에 매단 배지와 같은 아티팩트가 마공학의 산물이었다.
같은 마공학의 산물이라는 점으로 분류하자면 이 거울 또한 아티팩트의 범주에 속했다.
통신 거울.
판타지 장르에서 으레 등장하는 마녀의 수정구를 크게 만든 버전이다.
“잘 들리면서 표정은 왜 그러세요.”
[내 표정이 뭐 어떤데 그러냐.]
“제가 사고 쳤을 때 짓는 표정이신데요?”
[알긴 아는구나.]
아버지는 뚱하니 한 손에 턱을 괸 채 말했다.
[뭘 잘못했는지 알겠느냐?]
“짐작 가는 바가 없네요.”
나는 떳떳했다.
“혹시 아직도 제 아카데미 입학이 마음에 안 드세요?”
[두 달 전에 끝난 이야기를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둘 만큼 쪼잔하지 않다.]
“그럼 뭡니까, 대체.”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 중년의 삐진 모습은 썩 보기 좋지 못했다.
퉁명스레 대꾸하니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방금 얘기한 두 달 전. 이거 듣고 뭐 생각나는 거 없느냐?]
“없습니다.”
[이래서 자식 마음 부모 마음이 다르단 거야. 배려해줄 필요가 없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말해주시죠.”
[편지 쓰라던 건 어떻게 됐냐.]
“……아.”
생각해 보니 그랬네.
정말 이제 떠올랐다는 표정을 짓자 아버지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하나 있는 자식 수도로 보내놨더니 얼마나 인생이 즐거운지 연락 한 통 없이 감감무소식인데 이걸 내가 어찌 받아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 루나가 연락하지 않았어요?”
[했지.]
“그럼 된 거 아닐까 싶…….”
[내 자식은 루나가 아니라 너다.]
“크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내 잘못이지.]
“예?”
[자식새끼가 가문의 영광이 될 마탑을 거절하고 아카데미로 튀었는데 팔다리 한 짝 분지르지 않고 용서한 내 무른 점이 잘못 아니겠느냐.]
“두 달이나 지난 일 가슴에 안 담아둔다면서요.”
[안 그러려고 해도 네 하는 꼴을 보니 이렇게 되는구나.]
“…….”
아버지는 한동안 못마땅히 날 응시하더니 이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됐다, 지금이라도 연락했으니 다행으로 알아야지. 편지 대신 얼굴 보니까 좋긴 하구나.]
“앞으로는 얼굴 보고 싶으면 이쪽 좌표로 연결하시면 됩니다.”
[네가 할 생각은 안 하고?]
“당연히 저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안 지키면 휴학하고 돌아와야 할 줄 알아.]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루나에게 눈짓했다.
내가 까먹으면 알려줘라.
루나가 굳은 결의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에는 별일 없었죠?”
[남부야 언제나 그렇듯 평화롭지. 오죽하면 내가 매일 네 연락 기다릴 여유가 있었겠느냐.]
“아무 일 없는 게 좋은 겁니다. 우리 영지는 과도한 세율만 매기지 않으면 알아서 성장할 테니까요.”
[아무리 내가 칼밥 먹고 여기까지 온 놈이라도 알 건 다 안다. 네가 그렇게 매번 강조 안 해도 알아서 잘 하고 있어.]
아버지는 잔소리 말라며 손을 휘적이곤 내게 물었다.
[너는 좀 어때? 아카데미 수업은 배울 만한 것 같으냐?]
“입학한 지 일주일째인데 괜찮네요. 마법에 관해서도 마탑만큼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수준 높고요.”
[성적은 잘 딸 수 있을 것 같고?]
“그럴 수 있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별 과제를 떠올리니 그것만으로 피곤해졌다.
내일부터 시에라의 개인교습이지.
현 상황에서의 최선이었으니 감수했지 아니었다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선택지였다.
“일단 보고드리자면 황태자 전하와 아이린과 같은 반이 됐습니다.”
[아이린이야 너희 둘 사이이니 내가 뭐라 말할 게 못 되고, 전하에 대해 말하자면 결코 실례하는 일 없도록 하여라.]
아버지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황실에 큰 은혜를 입은 가문이다. 네게 벌써 충성을 강요하는 건 아니다만 지켜야 할 예의가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네.”
평민이 기사가 되었고, 이내 영지를 가진 세습 귀족이 되었다.
황실에 대한 아버지의 충심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이해했다.
그치만 내가 겪은 일련의 사태 때문인지 표정 관리가 상당히 어려웠다.
[특별한 계기 없이 전하와 친분을 쌓을 기회가 쉬이 오지는 않는다. 기왕이면 네 이름 정도는 각인시킬 수 있으면 좋겠구나. 내 욕심이라 치부할 게 아니라 네게도 큰 도움이 될 게다.]
흥분이 엿보이는 아버지의 발언에 나는 씁쓸히 웃는 것밖에 못 했다.
……나는 관심도 안 뒀는데 황태자 쪽에서 다가오던데요.
들어보니 말이 되긴 했는데 본인은 의도하지 않은, 김칫국 100%의 들이마신 오해를 품고서.
괜히 황실의 권력 다툼에 끼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이 시점에선 절대 교분을 나눌 마음이 없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 드릴게요.”
[다음엔 내가 먼저 연락하게 하지 마라.]
“알겠다니까요.”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통화를 종료했다.
“오래도 얘기했네.”
창밖으로 뉘엿뉘엿 해가 졌다.
통화 시작부터 끝까지 삼십 분 정도 걸렸나.
다른 영식들은 밥 먹었냐고 물어보고 안부 전화가 끝나는 걸 보면 우리 가문이 특이한 편이었다.
“참, 루나. 통화 중간에 연락 온 거 있지 않았어?”
“네에, 크라운 백작가에서요.”
“빠르네. 내가 바로 어제 연락한 거 아니었나?”
이반젤은 원래 답장이 빠른 사람이고, 노엘은 저번에 내가 알려준 대로 논문 수정을 끝마쳐 휴식 기간이라 그런가.
외출 생각도 했던 만큼 답신이 빨라 다행이었다.
“크라운 백작가에서 뭐라고 했어?”
“말씀하신 예법 선생 수소문 건은 한 달 내로 결과가 나올 거래요.”
시에라가 아이린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연락할 거리가 생김 김에 바로 부탁했다.
근데 부탁하는 입장에 말하기 뭣하지만…….
“그게 한 달이나 걸릴 일이야?”
“날이 풀리며 여러 연회가 예정되어 있어서 격이 되는 분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어요.”
“그렇게 뛰어난 예법 선생을 원한 건 아닌데…….”
대모 이상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반젤의 성향을 까먹은 내 잘못이었다.
교복을 부탁하니 수도 최고 장인에게 의뢰한 사람인데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어야지.
……됐다.
바쁜 건수인 것도 아니고, 제대로 배워서 손해는 안 보지.
그보다 진짜 용건은 다음이었다.
“연금용지는 언제쯤 보내줄 수 있대?”
“그건내일이면 받아볼 수 있댔어요.”
“……이번엔 또 왜 이렇게 빨라?”
연금용지.
일반적으로 연금술에 사용되는 마법 가공 물품이다.
만드는 과정이 까다로운 탓에 수량이 한정되어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하지 못했다.
그걸 연락한 지 하루 만에 구해서 이틀째에 보내주겠다고?
뭔가 이상했다.
“마탑에 있는 재고를 보내주겠다네요.”
“그걸 노엘이 사적으로 빼낼 수 있어?”
“논문으로 발표한 이번 연구 성과를 마탑 수뇌부가 주목하고 있어서 그 정도 재량권은 생겼대요.”
“흐음.”
그때 담배 제조 부탁하면서 도와주길 잘했네.
역시 사람은 선행을 베풀어야 했다.
노린 게 아니어도 이런 식으로 어떻게든 도움이 됐다.
“전언은 이게 다지? 고마워.”
“아뇨, 이게 제 역할인걸요.”
“더 시킬 일 없으니까 오늘은 푹 쉬자.”
“헤헤, 네.”
나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오늘은 일요일.
내일부터 또다시 바쁜 한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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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첫 수업인 마법의 탐구는 일주가 지났어도 여전히 괴랄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강의 시작 십 분 만에 여기저기서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수업이 끝났을 즈음 여전히 눈동자에 정광이 살아있는 이는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다.
……대체 왜 월요일 첫 교시가 마법의 탐구인 거지.
나야 색다른 이론 공부가 흥미있어 들어줄 만했지만, 나머지 학생들은 달랐다.
시간표를 오후로 옮기는 게 낫지 않나.
만약 A반의 전체 과목 학습 성취도가 기대 이하라면 범인은 제이스 교수였다.
다행인 건 저번 주에 과제를 내줬으면서 이번 주에 또 과제를 내주거나 하진 않은 점이었다.
과제에 과제가 겹쳐지는 게 가능하냐고?
……겪어보면 안다.
교수의 악랄함은 언제나 학부생의 머리 꼭대기에 군림했다.
그렇게 모든 강의가 끝난 오후.
이번 주는 이대로 휴식이 아니라 시에라의 개인교습이 있었다.
나는 가방을 정리하고 시에라의 자리로 향했다.
황태자와 함께 있다면 양해를 구하고 데려오려는데, 그곳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함께하고 있었다.
“아, 케일. 잠시만, 지금 잠깐 얘기를 나누던 중이라…….”
나는 시에라의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 서글서글한 인상, 가까이 다가가기 쉬운 친근한 분위기.
입가에 걸린 자연스러운 웃음기가 인상 깊었다.
“같은 반인데 직접 인사를 나누는 건 오늘이 처음이던가요?”
남자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밀런 토메르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원작 첫 악역의 겉모습에서는 시꺼먼 속내를 유추할 수 있는 어떠한 흠결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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