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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약혼자가 로판 속 악녀다-22화 (22/40)

〈 22화 〉 22화 ­ 첫 수업, 첫 과제(2)

* * *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세요? 개인실 들어갈 때 확인하기론 저 말곤 한 명도 안 쓰는 것 같았는데.”

시에라가 밝은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원래 친화력이 좋은 편이라 그런지 떨어졌던 소꿉친구 만나는 듯한 거리감이었다.

실질적으론 고작 통성명만 마쳤을 뿐인 사이면서.

꺼림칙한 건 아니나 부담스러운 거리감이었다.

“명상을 좀 하려고. 아침 습관이야.”

멀리서 봤는데 인사하는 거면 못 본 척 무시하겠지만, 면전에서 말을 걸어오는데 무시할 만큼 내가 나쁜 놈은 아니었다.

“아하, 명상. 저도 비슷한 거 했어요.”

“기도?”

“네, 아무래도 습관이 드니까 낯선 장소에서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더라고요.”

교회 출신답게 시에라는 독실한 신자였다.

고아였던 자신이 여태 살아 보살핌을 받았음을 신의 기적이라 여기는 만큼 믿음이 깊었다.

사람을 가리지 않는 친절함과 남을 향한 배려심은 그러한 배경 아래 조성된 성격이었다.

“아, 마법사는 이런 얘기 싫어하죠? 신이 어디 있냐면서.”

그러면서도 시에라는 남을 존중할 줄 알았다.

다른 신도들도 마법사 앞에서 신의 기적을 말하지 않음은 같지만 결이 달랐다.

그들의 존중은 겉치레다.

속으로는 불신자를 비난하면서도 겉으로는 자애로운 목자를 연기했다.

보통의 중세 세계관과 달리 이 세계에선 교회의 세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의 기적을 바라지 않아도 포션이 있고 마법이 있는데 기적에 매달릴 이유가 있겠는가.

귀족들마저 여신보다는 마법을 숭앙했다.

고로 교회의 세는 마탑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반면 시에라의 존중은 진심이다.

그녀는 신자이되 마법사로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법사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지만.

지금 밝혀질 사정은 아니었다.

“별로 신경 쓰거나 하진 않아. 명상이랑 큰 차이 없는 행위잖나.”

여신의 존재가 의심받는 세상이긴 해도 나는 여신이 존재함을 알았다.

원작에서 등장했으니 그야 당연히 건재하겠지.

명상이 마나의 감응력을 높일 훈련이라면 기도는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훈련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

시에라는 입을 다물고 연신 두 눈을 깜빡거렸다.

독실한 신자를 상대로 내뱉기엔 좀 무례한 말이었나.

그래도 시에라니까 괜찮겠지.

나는 낙관적으로 넘겼다.

“……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아무렴 시에라가 불편해할 리 없었다.

불편해하기는커녕 다시 봤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케일 공자님은 다르네요.”

“뭐가 다른데?”

시에라는 대답하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유순한 눈매가 곱게 접혀 반달을 그리고, 풍성한 앞머리가 나긋하게 파도쳤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정면에서 마주 보자 말을 잃게 만드는 미모였다.

기화요초에 홀리는 귀부인들이 이런 기분이겠지.

나는 넋을 잃을 것만 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전하는.”

“네?”

“황태자 전하는 뭐가 안 다른가?”

시에라에게 있어 신경 써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다.

남주 후보인 황태자지.

의도는 기가 막히게 들어맞아 시에라는 곧장 관심을 돌렸다.

“전하가, 그, 유리스 엘하임 님 맞죠?”

“제국에 황태자 전하는 그분 하나지.”

“하으으.”

시에라가 작게 한탄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알고 계셨다면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저는 꿈에도 모르고…….”

“인사말로 올린 제국의 작은 태양이라는 말은 못 들었나?”

“선배님이시니까 별명 같은 건 줄 알았죠. ‘얼음꽃’이라든가 ‘붉은 사자’처럼요.”

“웬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별명이군.”

“아, 맞아요.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에서 나오는 건데 혹시 아세요?”

“몰라.”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나서 소설은 읽어본 적 없다.

그러다 또 그 세계에서 환생하면 어쩌려고.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전하는, 음…….”

시에라가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분도 특별하긴 하시죠. 자기소개에서 말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황태자이신 줄 몰랐을 거예요.”

특별하다.

괜찮은 표현이었다.

딱히 황태자를 나쁘게 보고 있지는 않을 테니 호감에 가까웠다.

“기왕이면 더 말씀 나눠보고 싶어요. 황태자 전하시니까 평민인 저랑 첫날처럼 해맑게 이야기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알기론 저 고민은 첫날 황태자가 옆자리에 앉으며 불편해하지 말란 말로 날려버렸어야 하는 건데.

하필 황태자가 내 옆자리에 앉아 일이 틀어졌다.

“전하는 그런 거 상관 안 하니까 지레 겁먹지 말고 살갑게 대해.”

“그래도 되나요?”

“평민이 말 걸어서 무례하다 내치는 분이셨으면 첫 만남에서부터 너와 대화하진 않았겠지.”

저를 몰라봤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낀 사람이다.

황태자인 걸 알았다고 벌벌 떠는 사람에겐 오히려 흥미가 떨어질 성미였다.

시에라는 황태자에게 살갑게 대하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황태자도 원작처럼 시에라에게 관심을 두리라.

“그럼요, 공자님.”

잠시 생각하는 듯싶던 시에라가 말했다.

“저 공자님한테 반말해도 될까요?”

“……?”

어느 사이엔가 그녀와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어깨와 어깨가 닿기까지 약 한 뼘 남짓.

아무리 허물없고 친근한 성격이래도 이건 너무 가깝지 않나.

나는 눈치 채지 못하도록 슬며시 거리를 벌렸다.

“그게, 같은 반이기도 하고 같은 학년이기도 하고 안면이 없는 것도 아닌데 공자님이라고 계속 존대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해서…….”

“…….”

“교칙, 교칙에 학생들 사이에 신분의 차는 없다고도 했어요! 바깥이랑 달리 아카데미 내에선 똑같대요!”

“…….”

“전하한테 살갑게 대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 공자님한테도…….”

내가 무언으로 일관하자 시에라는 시무룩해져서는 말끝을 흐리며 공손히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눈꼬리가 풀이 죽은 강아지 꼬리처럼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별 대꾸 안 해도 활기차던 그녀의 분위기마저 심해에 잠긴 듯 가라앉았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조심하겠습니다.”

침몰했다.

내게는 시에라의 머릿속이 눈에 선했다.

실수했다.

괜히 말 꺼내가지곤.

무례하다며 앞으로 얼씬도 말라 하는 거 아닐까.

살가우면서도 고집이 센 건 아닌 시에라는 이리 후회하고 있을 터였다.

“마음대로 해.”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존대건 반말이건 네 뜻대로 하라고.”

딱히 건방지다 여겨서 침묵한 건 아니다.

평민이랑 말 놓고 친구 먹은 건 이미 룸메이트인 다히트라는 선례가 있었다.

시에라와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는 건 지양할 일이나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 선을 저울질한 침묵이었다.

내가 시에라와 반말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여 뭐 남주 후보들이 질투하거나 시에라를 포기하는 불상사가 생기겠어?

그럴 사람들은 아니라고 봤다.

아니면 원작 속의 역하렘 수라장은 발생하지도 않았겠지.

큰 줄기를 해치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거수일투족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중할 필요는 없었다.

혼자 이것저것 재다간 타이밍을 놓치고 해야 할 일도 못 했다.

“그럼 그, 우리 친구니까 나한테 하대도 안 할 거지……?”

“그래야지.”

시에라가 언급하지 않았어도 얘 앞에서만 고귀한 귀족마냥 말하는 건 그만할 마음이 있었다.

사실 이건 내 실수에 가까웠다.

아이린한테 폐 끼치지 않도록 시에라를 도와주되 괜히 정 붙이지 않게 하기 위한 연기였는데.

아카데미에 와서까지 달라붙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언젠가는 교통정리를 했어야 할 일이었다.

얘한테는 이렇게 말하고 얘한테는 이렇게 대하자고 차별을 두다 보면 인지부조화 걸린다.

“……!”

내가 긍정하자 시에라가 반색하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바닥에 질질 끌렸던 발걸음이 통통 튀고 자그맣게 콧노래가 흘렀다.

그렇게 좋나.

좀 고민해 봤더니 얘가 아직 아카데미에 친구 하나 없을 시기긴 했다.

좋아할 만하네.

나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다.

“그럼 있잖아, 우리…….”

시에라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떠드는 사이 교실에 도착한 탓이었다.

수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인지라 교실 내엔 어제 내가 도착했을 때보다 많은 학생들이 앉아있었다.

“…….”

아이린은 어제 그 자리에 똑같이 앉아있었다.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웬일인지 금세 눈을 돌리고, 그러다 뭘 잘못 봤다는 듯 다시 날 쳐다봤다.

“……!”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시에라였다.

아이린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표정을 숨기듯 부채를 펼쳤다.

“아, 어제 자리 그대로 남았다.”

……얘는 왜 이런 눈치는 없지.

시에라는 태연하게 교실을 가로질러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제 옆자리를 손가락질했다.

어림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로 어제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았다.

“…….”

왜 같이 안 앉느냐는 충격받은 시선이 볼을 간질였다.

왜기는.

거긴 나 말고 다른 사람 자리였다.

드륵!

마침 장본인이 등장했다.

아침부터 남들과는 한층 다른 화사함을 뽐내는 황태자였다.

“흠.”

그는 내부를 스윽 훑더니 목적지를 정한 듯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다행히도 그는 어제처럼 이변을 발생시키지 않았다.

그래, 저래야 남주 후보지.

새가 제 둥지를 찾아가듯 시에라의 옆자리에 앉은 모습에 나는 안도했다.

그대로 나한텐 관심 꺼줘라.

혼자 착각해서 애먼 사람 들쑤시지 말고.

“자, 조용히들 하거라.”

정각이 되자 의자에 앉아 책을 훑던 제이스 교수가 교단에 섰다.

“마법의 탐구 첫 강의를 시작하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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