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21화 첫 수업, 첫 과제(1)
* * *
촤락!
“일어나실 시간이세요, 주인님.”
“끄응.”
“으아아.”
침대 위로 쏟아지는 어슴푸레한 햇살에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건너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 하나 죽어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눈을 비볐다.
맑아진 시야 속에 루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씻고 나오세요. 그동안 청소하고 있을게요.”
“어어.”
"그리고 저쪽 분도……."
“응. 야,가자.”
“으어어어.”
잠시긴 하지만 다히트 혼자 남겨두면 루나가 불편하겠지.
나는 다히트를 일으켜 같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다행히 화장실은 넓은 편이기에 아침에 둘이서 가볍게 씻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괜찮아?”
“……그으, 좀 기다리면 괜찮아 질 거야.”
가볍게 세안을 마치니 완전히 깬 나와 달리 다히트는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아침에 약한 편인가.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물로 마사지한 후에야 다히트의 눈이 뜨였다.
“어으, 놀랐네.”
“뭐가?”
“아침에 누가 들어올 줄은 몰랐단 말이야.”
다히트는 문 바깥을 곁눈질했다.
루나가 이부자리를 정리하곤 댓바람부터 성실하게 바닥을 쓸고 있었다.
“어제 루나 소개해주면서 양해 구했잖아.”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시종이랑 같이 생활해본 적이 없어서 자연스레 잊었나 보다.”
“……별로인 것 같으면 들어오지는 말라고 할까?”
“아냐, 괜찮아. 나 아침에 잘 못 깨서 누가 깨워주는 편이 좋거든.”
“그럴 것 같긴 해.”
“집에 있을 땐 엄마한테 등짝 맞으면서 일어났어.”
다히트가 씩 웃었다.
“신경 쓰지 마.내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냐. 네 꼽사리긴 해도 시종이 대접해주니까 내가 뭐라도 된 것 같다.”
“그렇게 여겨주니 고맙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사실 시종의 출입 자체가 규정적으로 애매했다.
아카데미 역사상 귀족이 일반 기숙사에 입주한 적이 있어 봤어야지.
룸메이트가 털털한 성격이라 참 다행이었다.
이건 사생활 문제랑도 연관이 있는 거라 다히트가 부담스러워하면 루나가 자중하는 게 맞았다.
다 씻고 나왔을 즈음엔 루나가 방안에 없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방안에 남아 구경할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단장을 마치고 루나를 불렀다.
내 옷차림을 검수하는 루나에게 다히트가 말했다.
“아까는 비몽사몽이라 인사를 못 했지? 안녕, 좋은 아침이야.”
“네, 네에. 다히트 님. 좋은 아침이에요.”
“와, 아침부터 눈이 호강하네.”
아직 낯을 가리는지 루나가 내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인사했다.
다히트는 루나의 수줍은 움직임에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 동생이랑 같은 또래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너무 귀엽잖아.”
“동생이 있어?”
“입학 전에도 대판 싸우고 나온 웬수 하나 있어. 앞으로는 아침부터 그 자식 얼굴 안 봐도 된다 생각하니까 날아갈 것 같다.”
판타지 세계도 형제자매 간의 싸움은 다르지 않은가.
아주 치가 떨린다는 표정이었다.
“내 동생도 이렇게 싹싹하고 예뻤으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봐도 안 넘겨준다.”
어딜 넘봐.
루나도 내 옷자락을 꽉 붙잡으며 반박했다.
“전 주인님 외엔 모실 생각 없어요!”
“나 말고 누구 모시게 보낼 마음도 없어.”
“……정말이세요, 주인님?”
“당연하지.”
“헤헤, 저도 평생 주인님만 모시고 살 게요.”
“하, 부럽다. 이래서 귀족 귀족 하는 건가?”
다히트가 부럽다는 듯 루나와 나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털었다.
“……근데 난 죽었다 깨도 귀족은 못 하겠다.”
“응?”
“너 어제 전하한테 끌려간 거 떠올리니까 전혀 안 부러워졌어.”
“…….”
귀족이 보통 황태자한테 끌려가고 그러진 않는데.
남작가밖에 안 되면 황태자의 존안을 뵙는 일은 황실 주최의 파티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온갖 뇌물을 바쳤을 때의 이야기다.
황태자가 고작 남작가 자제인 내게 관심을 표한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여긴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인데시에라랑 안 놀고 뭐하는 건지.
다시 생각해봐도 황당했다.
“아무튼 앞으로 전하께서 우리 근처로 안 오는 건 확실하지?”
“아마도 그럴걸.”
“아마도는 또 뭐야.”
“일단 난 그렇게 이해했어. 루나도 그렇지?”
“네에, 아마도요……?”
루나도 나처럼 확신을 못 하는 듯했다.
황태자가 마지막에 남겼던 말이 적당히 의미심장했어야지.
면전에서 거절했으니 자존심이 있다면 한동안 내 주위론 얼씬도 안 하길 바랄 따름이었다.
“귀족 친구 둔 건 좋은데 난 전하처럼 높으신 분이랑 안면 트고 싶진 않거든? 그러다 제 명에 못 살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지 못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근데 이대로 가면 우리 너무 일찍 도착하는 거 아니냐?”
기숙사 밖에서 시계탑을 올려다본 다히트가 말했다.
아직 수업이 시작할 시간은 아니었다.
여유 시간은 1시간 남짓.
기숙사 통학이면 10분 전 기상이 국룰이거늘 1시간이면 상당히 일찍 깼다.
“……앗, 제가 혹시 실수한 걸까요?”
“아냐, 나는 평소 깨던 시간이잖아.”
“나도 뭐, 첫날부터 지각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괜찮아.”
허둥대며 내 눈치를 살피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루나도 첫날인데 당연히 시행착오는 겪는 법이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루나는 존재 자체로 내 힐링이기 때문에 작은 실수 따위 인간미의 일부였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케일넌 어쩔래?”
“글쎄다. 가볍게 워밍업이나 할까.”
“운동? 기사도 아니면서?”
“딱히 몸 쓰는 운동은 아니야.”
마법사의 단련은 기사의 단련과는 달랐다.
땀 한 방울 안 나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지성인의 훈련이다.
아카데미 입학생답게 마법사인 다히트는 금방 내 말을 알아들었다.
“아, 명상 말하는 거구나? 그걸 진짜 하는 사람이 있네.”
“안 하는 사람이 있어?”
“나는 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내 주위엔 하는 사람 많았는데……?”
대마법사로 명성을 떨칠 원작 속 남주 후보라던가, 노엘이라던가.
……생각해보니 좀 적긴 하네?
“그거 옛날에 사장된 원시적 마법사 훈련 방법이잖아.”
“그래?”
지금은 아카데미의 주도하에 마법사의 육성 방법이 체계화되어있긴 했다.
선천적 천재만을 가려 입문시키는 마탑의 행보와는 정반대.
평민인 뭇 학생들이 교육의 기회가 적음에도 마법사의 기초를 닦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래도 이거 도움은 돼.”
아니면 마탑 소속 마법사나 미래의 대마법사가 구태여 할 리 없지.
나도 효과를 보긴 했다.
아주 미미하긴 하지만 말이다.
“어후, 됐어. 난 그거 하면 금방 졸더라.”
다히트는 아주 질색을 하며 거부했다.
“아무튼 열심히 해. 난 먼저 아침밥 먹고 교실로 간다. 따로 약속 없으면 점심에 식당에서 보자.”
다히트와는 길목에서 헤어졌다.
둘만 남게 되자 루나가 쪼르르 나서 앞장섰다.
“개인실까지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그래, 부탁해.”
나도 알고 있긴 하지만 본인이 하겠다는데 따뜻하게 봐줘야겠지.
아카데미 구조는 어제 교육을 받아 다 외웠다며 자기만 믿으라는 루나가 나는 흐뭇하기만 했다.
명상을 위한 개인실은 중앙 건물의 뒤편에 존재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절차탁마하는 학생들의 지각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아카데미의 배려였다.
“시간 되면 교실엔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안 기다려도 돼.”
나는 빈 개인실의 대여 절차를 마치고 루나에게 말했다.
“네?”
“끝날 때까지 여기 가만히 서 있을 건 아니잖아.”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죠.”
“불편하게 어떻게 그래.”
아무것도 안 하고 벽만 보면서 삼십 분 이상을 기다리라고?
나는 못 한다.
내 시종에게도 시킬 마음 없었다.
“괜찮으니까 먼저 가. 아직 방 청소 다 마친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요…….”
독채를 혼자 관리하는 것보단 낫겠지만, 이쪽은 나와 다히트 두 사람 분량이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교육을 받는 건 시종도 마찬가지다.
설렁설렁 수업이나 받으러 가면 되는 학생들보단 주인의 뒷바라지까지 포함된 시종이 더 바빴다.
“됐으니까 가봐.”
“……네에, 그럼 점심에 모시러 갈게요.”
“응.”
루나를 보내고 나는 개인실로 들어갔다.
텅 빈 방 안의 공기는 새벽녘의 그것처럼 청량하면서도 습기 찬 듯 피부에 달라붙었다.
자연적인 듯하면서도 인공적인, 내게는 익숙한 감각.
농후한 마나의 감촉이었다.
“……역시 저게 박혀있으니 차이가 나네.”
천장의 중앙엔 푸른 광석이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마나석.
농축된 마나가 집약되어 물질로 화한 희귀 광물이다.
내부에는 농축된 마나가 휘돌고, 특수한 처리를 가하면 이처럼 마나를 방출할 수 있었다.
체외의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에겐 일종의 보조 배터리다.
지팡이의 끄트머리에 자주 보이는 빛나는 물건이 보통 그 마나석을 가공한 보석이었다.
“저거 무지막지하게 비싼데.”
마나석에 특수한 가공 처리를 하면 천장의 저것처럼 일대에 마력을 발산하였다.
그를 통해 일대의 마나 농도를 높이고, 마나에 대한 감응력을 높이는 거다.
당연히 도움이 되긴 했다.
하나 본연의 가치에 비하면 낭비나 마찬가지인 활용 방법이다.
“진짜 돈이 썩어 넘치는구나.”
내가 저거 사려면 저택에서 기둥 뿌리 하나는 뽑아야 할 텐데.
황실의 천문학적인 자금에 전율했다.
“있는 동안 잘 써야지.”
부러워할 것 없었다.
학생인 이상 나는 그 천문학적 자금을 통해 구축한 최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후우.”
나는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마나 서클이 깨져 직접 마나를 움직이긴 고통스럽지만, 감응이야 가능했다.
……이 몸으로도 마법을 발휘할 수 있게 따로 연습하는 게 있기도 하고.
나는 충만한 마나를 느끼며 점차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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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좋았다.”
역시 돈이 최고다.
마나석을 이용해 명상하는 호사를 부리니 평소보다 더 잘 되는 기분이었다.
수업 시작 10분 전.
교실까진 5분이니 지각 걱정도 필요 없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등교하려는 그때.
벌컥!
옆 방의 문이 열렸다.
개인실에서 나온 여학생이 복도에 먼저 나온 나를 곁눈질하더니 이내 활짝 얼굴을 폈다.
“와, 케일 공자님!”
아, 그러고 보니.
얘도 아침 훈련을 하던가?
시에라가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내게 달라 붙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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