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19화 너 뭐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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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께서는 앞으로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낼 예정이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예약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아요.”
“제게 아카데미에 대해 영애께 소개해주는 시간을 갖게 해주십시오.”
“영애……!”
자기소개가 끝난 후의 자유시간.
아이린은 제 근처에 모여 떠들어대는 동급생들에게 짜증이 날 대로 나 있었다.
가면을 쓴 듯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채 꼬리를 치는 영애들.
제 미모에 얼이 빠져 흥분조차 숨기지 못하는 짐승 같은 영식들.
같은 반 사람만 추려도 적지 않은 수인데 다른 반 사람들까지 찾아와 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죄다 꼴 보기조차 싫었다.
정녕 저들은 자신과 급이 맞다 생각하는 걸까?
입학식에서도 그랬지만 제게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 자존심을 파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귀 아프게 떠들 줄만 알고 조용히 할 줄은 모르나요?”
아이린은 참을성이 깊은 편이다.
낮은 건 끓는점이었다.
옆에서 뭐라 떠들던 무시하고자 하면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다.
다만 화가 난 상태에서는 달랐다.
마음 같아서는 입 닥치고 다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귀에 담기도 충격적인 상스러운 비속어를 이리 순화했으니 이 얼마나 참을성 깊은가.
아이린의 배려에 감복한 귀족 자제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교계에 퍼진 그녀의 소문이 떠오르기라도 했는지 스리슬쩍 자리를 떠나는 학생들도 많았다.
“흥.”
이제 좀 기분이 풀리네.
아차 싶어진 건 직후였다.
“…….”
이렇게 화 내는 모습 보이면 안 좋은데.
아이린은 부채를 꺼내 제 얼굴의 반을 가렸다.
어릴 적부터 몇 번이고 지적받은 사안이었다.
케일과 약혼했던 시절엔 그런 일이 줄었지만 최근 폭증했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께서도 별말 안 하시겠지……?’
아버지 그레이슨 레오나드 공작과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맺은 밀약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선 영지에 있을 때처럼 가문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소문을 내지 않을 것.
쌍욕을 한 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에게 이야기가 들어갈까 두려운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뒤쪽에 시선이 갔다.
전 약혼자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기 싫어했으니까.
“앗.”
곧장 미간에 주름이 졌다.
저 애를 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누군가를 찾듯 눈을 돌리며 엉거주춤 일어난 시에라와 눈이 마주쳤다.
나름 안면이 있다는 건지 헤헤 웃으며 손을 흔드는 꼴에 속이 거북해졌다.
아무튼 저 여자를 보려던 게 아니다.
시선이 더 깊이 돌아갔으나 아이린이 발견할 수 있던 건 텅 빈 두 자리뿐이었다.
“……후우.”
안도하면서도 화가 나는 이중적인 감정이 들었다.
“전하께서는 바쁘신 일이 있으신지 일찍 떠나셨더라고요.”
그녀의 시선을 쫓은 한 영애가 떠벌였다.
“원래 저러신 분이신 건 알지만 좀 너무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 입학식부터 지금까지 영애와 대화 한 마디 나눌 수가 있나요.”
주위 학생들이 경탄했다.
수위가 높은 건 아니나 황태자를 비판하다니.
그러나 황태자가 제국의 작은 태양이라도 눈앞의 아이린은 그에 꿇리지 않는 공작가 금지옥엽이었다.
황태자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여 아이린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그만큼 아이린에게 진심이라는 속 보이는 아부였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아이린이 작게 긍정하자 말을 꺼낸 영애의 콧대가 높아졌다.
이러면 그녀가 레오나드 영애의 첫 파벌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애가 닳은 학생들이 방금 전 아이린의 경고를 잊어먹고 또다시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
다행히 아이린의 불호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추태를 윤허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리스 황태자…….’
아이린은 그에 대해 떠올렸다.
황실과 공작가 사이에 흐르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제외하고서도 둘은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황실의 가장 큰 아군은 공작가다.
제국의 설립 초기 주군과 공신 관계였다는 역사를 제외하고서라도 그들은 오랜 세월의 흐름 속 옅게나마 혈연으로까지 엮인 사이였다.
귀족 파벌의 수장으로서 공작가는 황실과 대립하다가도 협상을 주도하며 종국엔 황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 황태자와 아이린이 동기로서 입학하였음에도 여태 얘기 한 번 못 나눠봤다?
이건 당연히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모두에게 무관심했다면 모를까, 단 한 명에게는 예외적이었던지라 더더욱.
“전하께서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요. 아무리 케일 알베지아가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다지만 고작해야 남작위를 물려받을 하위 귀족인데.”
케일 알베지아.
마탑을 버리고 아카데미를 선택한 속내 모를 천재.
그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아이린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입학 전부터 황실 쪽이랑 뭔가 얘기가 있던 거 아닐까요?”
“하필이면 전하와 입학식에 동석하였고, 수업 시작 전에도 마찬가지였죠?”
“영애께서 옆에 앉으라 그리 눈치를 주셨건만 한사코 무시하셨잖아요.”
아이린이 눈치를 준 적은 없었다.
그래도 옆에 앉을 줄 알았다.
서로의 속내야 어찌 됐건 그게 서로에 대한 예의였다.
한데 드러난 결과는 어쨌는가.
황태자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지나쳐 케일의 옆에 앉았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부티크에서 시에라와 같이 있던 걸 발견했을 때보다 더 충격이었다.
굳이 첫날부터 파란을 일으키려는 황태자의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만큼이나 기분파인 황태자가 어떤 속셈을 품고 케일에게 접근한 건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폐하께 간이고 쓸개고 내줘서 귀족이 된 근본 없는 귀족다운 수작이네요.”
“본인이 공을 세울 생각은 안 하고 전하께 빌붙으려는 셈인가?”
“영애와는 전 약혼자 사이잖아요. 가문의 뿌리가 저급해서 파혼을 당했다더니 제 버릇 남 못 주는군요.”
“저는 케일 공자가 영애께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 참…….”
쾅!!
돌연히 울린 굉음에 깜짝 놀란 귀족 자제들이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앞문을 통해 갑옷을 걸친 한 여인이 들어왔다.
경장 갑옷 위로 빛나는 매의 문양.
아이린의 호위기사인 세실리아였다.
“훈련을 갓 마치고 돌아온지라 흥분하여 힘 조절을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과 달리 그녀에게선 살기마저 느껴졌다.
흔들거리는 문짝을 억지로 끼워 맞춰 고친 그녀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약속하신 장소로 가실 시간입니다, 아가씨.”
“……그렇군요.”
아이린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모습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실례하죠.”
인파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얼음장보다 차가웠기에 이번엔 누구 하나 용기 내어 입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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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참견이었습니까?”
“아니요, 잘했어요.”
빠르게 중앙 건물을 벗어난 아이린과 세실리아는 아카데미 내부에 조성된 정원으로 향했다.
인적 드문 그늘 아래 멈춰선 아이린은 교복 치마를 꽉 쥐며 치를 떨었다.
“세실리아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따귀부터 올려붙였을 테니까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따귀가 뭔가.
자칫 마법을 사용해 유혈 사태를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
“제깟 것들이 뭔데……!”
제 주변에서 시시콜콜 떠드는 것까진 용서했다.
주제도 모르고 황태자를 언급한 것까지도 넘어갔다.
하지만 케일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과 험담에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떠들고……!”
사실 이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제이스 교수가 말했듯 점심시간이다.
베갯머리 송사만큼이나 쉬이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자리가 식사 자리였으니 그들 중 제 파벌이 될 이를 추려 친목을 다져야 할 때였다.
공작가 영애된 이로서 어울려야 할 부류는 케일이 아닌 그들이다.
어차피 이젠 남이 된 전 약혼자 사이 아닌가.
험담의 자제를 요청하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화를 내며 박차고 나온 건 미스였다.
하나 사람의 마음이란 게 원래 마음대로 조절되질 않았다.
세실리아의 도움을 받아들여 깽판 안 치고 나온 것이 아이린의 최선이었다.
“좀 진정되셨습니까?”
“……덕분에요.”
“아닙니다.”
여기가 가문의 정원이었다면 벌써 다 때려 부쉈으리라.
아이린은 울컥울컥 솟는 폭력성을 가라앉혔다.
“지금 쯤이면 교육이 끝났을 테니 시녀를 데려오겠습니다.”
“됐어요.”
“식사는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 없어요.”
괜히 먹었다간 얹히기만 할 기분이었다.
“어쨌든 데려오지 않으면 시녀는 저희를 찾아다녀야 할 텐데…….”
“생각이 있으면 알아서 방으로 돌아가겠죠. 신경 꺼요.”
이 와중에 아랫사람까지 신경을 써야겠는가.
공작가의 시녀가 무슨 돌봐야 할 애도 아니고.
지금은 알 바 아니었다.
“아직 화가 덜 풀린 것 같아요. 좀 걷죠.”
아이린은 군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앞장서 움직였다.
아가씨께서 고집을 부리는데 호위기사가 뭘 어쩌겠는가.
세실리아는 걱정을 뒤로하고 호위의 본분에 집중했다.
“내 눈에 띄고 싶은 것이지 않나.”
길어진 산책에 살살 다리가 아프기 시작할 무렵.
바람결을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격이 되는 인재라면 기꺼운 재롱이지.”
“마침 내 사람이 필요한 참이었다.”
“이건…….”
“전하십니다.”
아이린과 세실리아는 음성의 주인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떠났던 황태자가 대화?
“가보시겠습니까?”
“글쎄요.”
그리 내키는 건 아니었다.
하던 산책이나 계속할까 싶었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이린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가보죠.”
황태자의 대화 상대가 누굴까.
어렴풋이 상대방이 떠오르자 가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졌다.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은 전하의 눈에 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녀의 짐작은 들어맞았다.
케일 알베지아.
그가 황태자의 맞은편에 서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발각됐습니다.”
“알아요.”
황태자의 호위 부대가 외부인의 접근을 놓칠 리 없었다.
도착하기도 전부터 경계심 어린 눈빛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허락을 받은 것 같으니 이대로 있죠.”
호위들의 신호를 받았을 황태자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건 허락의 뜻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독대를 방해하는 것까진 허락하지 않으리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궁금했던 아이린은 얌전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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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황태자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곳에 숨어 있던 이유가 뭐지, 레오나드 공작 영애?”
“전하.”
아이린은 속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남은 것은 예의를 갖춰 정리된 대로 논리정연하게 제 생각을 내뱉으면 될 뿐.
아주 쉬운 일이었다.
“케일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그 쉬운 일을 아이린은 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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