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화 너 뭐냐(5)
* * *
“크흠…….”
조용한 가운데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범인인 기사는 동료들이 도끼눈을 뜨자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으흠.”
“어험.”
그러나 이내 기사들 사이에선 헛기침이 유행인 것처럼 번졌다.
……내가 생각해도 황태자가 많이 무안할 대응이긴 했다.
서로 안면 안 붉힐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느냐.
나중엔 거절하더라도 조금만 장단을 맞춰주지 그랬냐.
기사들의 눈빛에서 그런 뜻이 전해져왔다.
“충복을 찾으신다면 다른 뛰어난 인재가 기라성처럼 존재합니다. 아카데미는 제국 제일의 교육기관이니 전하께서 뜻하는 바를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어림도 없지.
추가타를 날려 확인 사살까지 했다.
나라고 황태자의 장밋빛 상상을 짓밟고 싶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황태자가 꼭 겪어야만 할 일이었다.
세상에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남의 위에 설 지도자는 가슴에 새겨야 할 진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황태자의 왕자병이란 속히 지워야 할 나쁜 습관이었다.
그러다 측근이라 생각하던 첩자한테 뒤통수 맞는 거다.
고로 나는 냉혈한이 아닌, 연민을 참고 악역을 맡은 충신이었다.
떳떳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 배우러 왔다…….”
황태자는 마침내 찰싹 달라붙어 있던 입술을 뗐다.
일동이 숨죽여 그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이 자네의 의사인가?”
“그렇습니다.”
“흠.”
대답하며 나는 의아함을 삼켰다.
뭔가, 생각보다 담담하다.
창피함에 대화를 피한다거나 화를 내는 것까지도 예상했다.
한데 황태자의 거동은 태연하기만 했다.
반대로 내가 당혹스러우리만큼.
“알겠다.”
내가 놀라자 황태자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강제로 내 사람이 되라 협박이라도 할 줄 알았나?”
“제가 어찌 그런 무도한 상상을 하겠습니까.”
“참이든 거짓이든 괘념치 않는다.신하에게 제 억지를 강요하는 암군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나는 네 신하가 아니긴 한데.
어쨌든 간에 생각보다 황태자가 성숙했다.
자기 잘못과 착각을 인정한다.
이 쉬운 일을 못 하는 사람이 세상엔 태반이었다.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인간이라면 확률은 100%에 육박할 정도.
왕자병인 황태자가 그렇지 않음이 신기한 일이었다.
“말에 무게를 담아야 하는 이라면 자고로 언제 어디서든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이지.”
근데 이건 뭔 뜬금없는 말이냐.
나는 맥락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황제의 명언인가 싶어 공감해주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조언에 감사한다.”
“……?”
조언? 내가?
진심으로 어리둥절했다.
“제가 언제 그런 조언을……?”
“과연, 자네는 이런 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을 즐기나. 소통하기 꽤 어려운 방식이군.”
황태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혼자 떠들 거면 나랑 왜 대화를 하고 있냐.
방에 식물 하나 사서 놓고 떠들지.
가슴을 채운 황당함 위로 답답함이 추가되었다.
“전하의 심모원려를 제가 어찌 헤아리겠냐마는, 주장하고 싶은 바는 아까 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알고 있다. 지금 싫다는 사람 붙잡고 설득하려 드는 거 아니니 심려 말아라.”
“그러하시다니 안심하겠는데…….”
돌아가는 꼴이 왜 아닌 것 같지.
어째 황태자는 내가 단호히 거절하기 전보다 더욱 날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자네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황태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음엔 자네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자격을 갖추고 적합한 장소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다가올 때 그러했듯 황태자는 떠날 때도 폭풍과 같았다.
어질어질하네.
담배는 입학 전에 시원하게 빨고 왔는데 벌써부터 금단증상이 찾아온 기분이었다.
“……뭐였던 거야, 대체.”
황태자가 내게 관심을 가진 것부터 순순히 꼬리를 말고 떠난 것까지.
죄다 내 머리로는 예측조차 하기 힘든 전개였다.
“자기소개 끝나고 몰래 약이라도 빨았나.”
저 조언이란 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말이야.
마지막 말도 의미심장했다.
“자격을 갖추고 적합한 장소에서 이야기하자고?”
이번에만 넘어가 준다는 뉘앙스가 물씬 풍겼다.
그래놓고 제 사람이 안 되겠다는 내 말은 알겠다니.
나든 황태자든 누군가 하나는 착각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둘 다던가.
“그냥 앞으론 나한테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주 후보답게 시에라한테 네 소임이나 다해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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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케일에게서 떠난 황태자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긴 했지만 아무래도 아까 전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인지 신경이 쓰였다.
무거운 침묵 속 총대를 맨 이는 호위대장인 호만 경이었다.
황태자가 마치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다는 듯 발을 멈추었다.
“무슨 의미인가?”
“전하의 의중을 알게 된 인물입니다. 허튼수작 부리지 않도록 인력을 차출하여 감시하겠습니다.”
아카데미 입학을 결정한 황태자의 의중은 이미 정계에서 구설수에 오른 지 오랜 화제였다.
오래 묵은 능구렁이 귀족들은 일찍이 짐작하여 결론을 내렸으리라.
그러나 본인의 입으로 내뱉은 말과 추측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전자는 유사시 아니라며 강짜를 부리는 등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무방했지만, 후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제게 충성하는 인재를 찾겠다.
제국의 차기 태양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황제와 귀족이 같은 파벌은 아니었다.
귀족 입장에서 황제에게 아무런 힘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과도한 힘이 실리는 것 또한 지양할 일이었다.
이야기가 퍼진다면 정치적인 공세가 들어올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케일이 황태자의 사람이 됐다면 감시할 필요까진 없었으리라.
아니기 때문에 그는 잠재적 주의 대상이었다.
“뭘 모르는군.”
호만 경으로서는 충심의 발로였다.
다만 황태자는 이를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뭐라 말하였는지 기억하나?”
“예, 아카데미에는 배우러 왔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자네 같은 반응이 나오는 거야.”
호위들이 몰래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머리로는 황태자의 깊은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몽매한 제게 깨달음을 주십시오.”
“자네들은 그곳이 정녕 안전하게 이야기를 나눌 장소였다고 생각하나?”
호만 경이 얼굴을 굳혔다.
말의 의미를 짐작한 것이었다.
“호위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한 바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암시다.
황태자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죽음을 청해야 할 중죄였다.
“아니, 자네들은 제 몫을 다했다. 방심한 건 나야.”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책을 하게 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처음엔 다 아는 사실을 모르는 척 시치미 떼려 드는 모습이 참으로 괘씸했다. 천재라 떠받들어지며 방만함이 몸에 배어 제 주제도 모르고 나를 우롱하려 드나 싶었지.”
첫 거절을 당했을 때.
안 그래 보였어도 황태자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상태였다.
황태자가 바라던 인재상은 능력과 성품이 모두 뛰어난 이였다.
한데 제 몸값을 올리려 뻔한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격한 충동을 참아내고 주절주절 떠든 건 그만큼 케일이라는 인재를 높이 평가했었기 때문이었다.
들려온 이야기가 없었다면 어림 반푼 어치도 없었다.
“그런 내 분노를 눈치챘음에도 두 번이나 거절한 데서 위화감을 느꼈다.”
정말 만에 하나 케일이 제 사람이 될 생각이 없었어도 명백히 이상한 대응이었다.
나름 예법에 밝았던 그가 황태자에게 대놓고 무안을 준다?
이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니 보이더군. 자네들이 내게 보냈던 신호와 계속해서 넌지시 일러준 케일의 경고가.”
본인의 능력이 뛰어남은 알아도 황실에서 온갖 풍파를 겪으며 자만하진 않았다 여겼거늘.
제게 관대한 평가였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카데미에는 배우러 오지 않았느냐. 이는 이 말에 맞추어 핑계를 대라는 소리다.”
남들에게 대화의 내용을 감추고 속일 수 있도록 가짜 화두를 제시했다.
“더불어 결정이 섣부르다는 주의까지 주었지.”
아카데미의 교육 기간은 3년.
시간은 많으니 그동안 저를 품을 군주로서의 자격을 갖추라는 뜻이었다.
“오만한 놈이다.”
하지만 제 미숙한 부분을 꿰뚫은 그 수완을 보아 용서해줄 수 있었다.
“자네들은 주위에 사람이 있었음을 언제부터 알았나?”
“……저희가 보낸 신호를 모르고 계셨습니까?”
“대화 중엔 자네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어. 흥분해서 시야가 좁아진 탓이지.”
호위 기사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저희는 지시가 없으니 묵인하신 줄 알고…….”
“자네들은 내가 세운 호위의 원칙을 따랐을 뿐이니 이번 실책은 온전히 내 책임이다.”
황태자가 세운 호위 원칙은 무조건적인 위험 요소의 배제가 아니라 사후 그가 내린 명령에 따른 조치였다.
제 능력을 과신한 미숙함이란 이런 곳에서부터 폐단을 보이고 있었다.
“손님이 오래 기다리신 듯하군. 어서 모셔와.”
황태자의 명령에 호위 둘이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둘이 아닌 넷이 되어 돌아왔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푸른 머리카락의 여성이 인사했다.
갑옷을 찬 여성은 무릎을 꿇으면서도 형형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황태자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곳에 숨어 있던 이유가 뭐지, 레오나드 공작 영애?”
아이린은 올곧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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