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6화 너 뭐냐(3)
* * *
아까 교실에서도 그렇고.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전하…….”
황태자 유리스 엘하임.
얘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입학 첫날은 남주 후보답게 시에라와 둘이서 교정을 둘러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갑옷을 입고 칼 찬 호위들 뿐, 시에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는 동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 아이린과 함께하였는가?
그녀 또한 자리해 있지 않았다.
진짜로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아카데미 입학 첫날에 황태자라는 인간이 남자를 왜 쫓아다니는 거야.
“여기 있었나. 말없이 사라져서 찾아다녔다.”
내 착각인가 싶어지려니 명백히 내가 목적임을 일컬어주었다.
나는 당혹감에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허억!”
“화, 황태자……!”
“야, 미쳤냐?! 입 조심해!”
“헙!”
나도 황당한 건 마찬가지인데, 차라리 내가 반응이 빠른 편이었다.
남들은 이제야 제 앞에 앉은 것이 황태자임을 눈치챘다.
이내 장내에는 혼란이 닥쳐왔다.
황태자다, 황태자.
제국의 차기 태양이란 말이다.
손가락질 한번에 사람 목숨 수천수만이 날아가는 권력자.
아무리 귀족에 반감이 있는 평민들이라도 황태자는 구름 너머의 존재였다.
평민 친구들이 놀라움에 존칭 없는 호칭을 입에 담자 황태자의 호위들이 눈을 부리부리 떴다.
겁먹은 친구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용건이 있으셨다니 저희가 미처, 미처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편히 식사하십시오!”
그리곤 동시에 자리를 이탈했다.
“…….”
나는 그들을 말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엉덩이만 뗐다 다시 붙였다.
아니, 야.
왜 니들만 도망치는데.
나도 도망치고 싶은 건 마찬가지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 절박한 눈빛을 그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무시했다.
“급히 볼일이 있었나 보군. 같이 식사해도 괜찮았는데 아쉽게 됐어.”
황태자가 태연히 중얼거렸다.
전혀 아쉽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건 또 무슨 바보 코스프레야.
황태자 유리스는 유능한 인간이다.
제 존재가 어떤 파급력을 가졌는지, 일거수일투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건 일부러다.
나랑 둘이 있자고 내쫓은 것이었다.
그 증거로 손짓도 안 했는데 호위들이 식탁을 방진까지 펼치며 철저히 둘러쌌다.
“제,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그 와중에 다히트만이 나와의 우정을 지켰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압박에 굴하지 않고 인사를 올리는 걸 보면 얘는 진짜 난 놈이었다.
하지만 한 명으로는 내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황태자는 한 명 정도는 있어도 괜찮다는 듯 추가적인 압박에 들어가진 않았다.
“다히트라고 합니다. 케일과는 룸메이트입니다.”
“룸메이트라……. 케일 자네는 독채에서 생활하는 게 아닌 건가?”
“그렇습니다.”
“흐음.”
깊이 파고들 만큼의 관심은 없는, 지나가는 호기심이었던 모양이다.
황태자는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입으로 옮겼다.
“아까 말했듯 케일은 나와 선약이 있다. 자네가 양보해줬으면 하는군.”
“무, 물론입니다. 케일이 미리 얘기하였다면 제가 동행을 제안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래야지. 자네는 몰랐으니 케일의 잘못이군.”
뭔 개소리야.
황태자와의 선약?
아무리 뇌리를 뒤져봐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첫 만남이 시에라와 함께이고, 두 번째가 교실의 자기소개다.
황태자가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긴 했으나 약속을 잡자는 말은 언급조차 안 했다.
황태자는 대체 누구랑 약속을 잡은 걸까.
없는 말을 너무 당당하게 하니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싶어졌다.
“전하, 죄송한 말씀이옵니다만 저는 전하와 약속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도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읊조리자 다히트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발끝으로 내 무릎을 툭툭 차는 게 미쳤냐는 그의 심정이 절절히 전해졌다.
걱정은 고맙지만 나는 그의 발을 쳐내며 내 주장을 견지했다.
스릉!
황태자의 호위답게 칼은 잘 관리된 듯 발검 소리가 청명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다히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자기는 괜찮으니 어서 사과하라며 내게 눈짓했다.
“……그랬던가.”
“그렇습니다.”
“흠.”
황태자의 최후통첩을 거절했다.
내가 뭐 좋다고 너랑 같이 다녀야 하겠니.
유리스가 등장하고 여태 밥 한술 뜨지 못했다.
식사 시간도 이렇게 불편한데 남정네 둘이서 산책을 하자고?
미친 짓이었다.
“내가 착각했나 보군.”
황태자의 발언과 동시에 눈앞으로 백색 섬광이 쏟아졌다.
서걱!
호위의 검이 내 눈앞을 베고 지나갔다.
잘린 건 내 비루한 목덜미가 아니었다.
“봄날이라 벌레가 눈에 띄어. 식사에 방해가 된다.”
“……조치하겠습니다.”
손톱 크기도 안 되는 잡벌레 한 마리가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호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창문을 닫았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제 안방을 돌아다니듯 거침없었다.
황태자가 다히트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착각하여 자네 친구들만 쫓아낸 꼴이 됐군. 유감을 표하네.”
“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아니야,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지 않겠나. 내 개인적으로 사례하도록 하지.”
“흡! 화, 황송할 따름입니다.”
감사를 표하는 다히트의 표정은 환희보다는 울상에 가까웠다.
“그럼 선약은 내 착각이라 넘기고 다시 약속을 잡지.식사를 마치면 나와 함께 다니게.이러면 되겠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황태자는 나를 내치지 않았다.
괘씸함 정도는 느낄 줄 알았건만 부동심의 표상인 검은 눈동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물론입니다! 케일도 전하께서 제의하여주셨음을 영광으로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치? 응?”
나보다 다히트가 더 절박했다.
앞과 옆에서 쏟아지는 압력에 결국 나는 백기를 내걸었다.
“제 시종이 돌아오기까지 귀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리지.”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황태자는 느긋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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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시종인 루나라고 합니다. 황태자 전하시다. 인사 올려.”
“……!”
기초 교육을 마친 자신만만해진 시종의 태도는 단 일 분을 넘기지 못했다.
황태자를 소개하자 루나는 입을 떡 벌리더니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허둥지둥 허리를 숙였다.
“가지.”
황태자는 루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태도였다.
황태자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이리 못 붙어먹어 안달인지 미스테리할 따름이었다.
“아카데미의 구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나?”
“귀동냥으로 이야기나 들은 정도입니다.”
“딱히 아카데미에 대해 깊이 조사를 하고 입학한 건 아닌 모양이야.”
“지리 정도야 직접 가서 겪으면 외울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일리가 없진 않군.”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발걸음을 뗐다.
“아카데미의 구조는 자네에 비해 내가 더 잘 아는 것 같으니 소개해주도록 하지.”
저가 소개를 자청한 만큼 황태자는 아카데미의 구조를 숙지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구석구석 설명을 해주는데, 입학생이 아니라 3학년 재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내가 알고 있는 바는 이 정도다. 자네의 아카데미 생활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전하께서 내려주신 가르침을 머리에 새기고 감사하며 지내겠습니다.”
같이 돌아다녔으니 이제 됐지?
나 간다?
슬쩍 눈치를 보는데 황태자가 뜬금없이 말했다.
“……의외로 예법에 밝군.”
“예?”
“내 자네에 대해 좀 알아봤지. 선제께서 작위를 내린 신흥귀족이라 예법에 익숙지 않을 텐데 흠잡을 데가 크게 없다.”
“그리 느끼셨다니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레오나드 공작 영애가 전 약혼자였던가. 그때 교육을 받았나?”
“…….”
아이린이 언급되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불쾌해하지 말게. 순수한 궁금증으로 물은 것일 뿐이야.”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가 맞습니다.”
“역시.레오나드 영애와 꽤 오래 약혼 관계를 유지하였으니 그녀의 기준에 부합할 노력을 했겠지.”
황태자는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의 소개는 끝났으니 목적 없는 산책이었다.
“남작가와 공작가의 약혼치고는 사이가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파혼을 한 이유는 뭔가?”
“……전하.”
나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황태자가 나보다 두 걸음 앞서 걷다 마찬가지로 멈추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답했으면 좋겠군.”
“개인사를 파고드는 건 아무리 전하라 하신들 무례입니다.”
“그런가?”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어딜 밑장을 빼려고.
지적하자 황태자는 짝다리를 짚은 그림 같은 자세로 제 턱을 쓸었다.
“불쾌하였다면 사과하지.”
미안한 표정이나 지으면서 말하던가.
저 무표정으로는 비꼬는 모습으로밖에 안 보였다.
“더 용건이 없으시다면 오늘의 일은 좋은 추억으로 남긴 채 떠나보겠습니다.”
성질 같아서는 그냥 들이받고 싶은데.
차마 황태자한테까지 내 성질대로 굴긴 힘들었다.
나 혼자면 괜찮지만 가문이 걸려있었다.
이러니 권력이 깡패인 거다.
속으로 이를 갈았다.
“성질이 급해. 그런 점은 감점 요인이다.”
“예?”
“고맙게 알도록. 내 자네에게 크게 흥미를 갖고 있어 넘어가 주는 거야.”
아니, 흥미고 자시고.
“혹시 그게 어떤 저의로 말씀하신 건지…….”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떼는 건가?”
황태자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눈살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내 눈에 띄고 싶은 것이지 않나.”
스멀스멀 전모가 머리에 그려졌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식상하긴 했다만, 자격이 되는 인재라면 기꺼운 재롱이지.”
뭔 상황인지 이제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 내 사람이 필요한 참이었다. 자네도 그를 알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게 아닌가? 과연 천재의 심계는 얕볼 수가 없더군. 남부 시골에서 내 의중을 짐작하다니 말이야.”
황태자의 왕자병이 발동된 것이었다.
주인공인 시에라가 아니라.
바로 내게.
“……와, 돌겠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고 마사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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