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5화 너 뭐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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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흠, 내가 말이 길었군.”
1시간 남짓 이어진 자세하고 상세한 설명 끝에 제이스 교수는 분위기를 파악하곤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나 입학 첫날부터 간이 강의를 듣게 된 학생들은 벌써부터 피로에 전 표정이었다.
일찌감치 관심을 뗀 나만 승리자로 남았다.
저거 어차피 다음 강의 때 똑같이 설명할 거거든.
오늘은 떠들다 보니 말이 길어졌을 뿐이다.
그는 오늘 안 들은 사람을 배려해줄 줄 아는 친절한 교수였다.
“곧 점심시간인데 오늘은 그 이후 자유행동일세. 선배들의 수업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찬찬히 둘러들 보게나.”
학생들이 환호……하려다 힘 빠진 소리를 냈다.
더 민망해진 제이스 교수가 급히 말을 돌렸다.
“그 전에 입학 첫날이니 당연히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지.”
올 것이 왔구나.
자기소개.
빠지면 섭섭한 이벤트다.
관심이 어색한 사람들에겐 지옥 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와, 씨. 이걸 해야 해?”
“긴장된다.”
역시나 싫어하는 사람은 표정 변화가 극명했다.
대다수가 평민들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경험이 적은 데다 황태자와 공작 영애가 포함된 쟁쟁한 귀족 자제들 앞에서 주눅도 드는 것이다.
“앞자리 학생부터 시작하게.”
그러나 싫다고 뺄 수 있는 경우가 아니었다.
제이스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자리 학생에게 손짓했다.
“밀런 백작가의 토메르라고 합니다.”
평생 거친 일 한 번 안 해봤을 법한 백면서생 스타일의 남자였다.
학구적인 인상과 부드러운 말씨가 사교계에서 인기 깨나 누렸을 법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돌아보며 살포시 미소 지어주는데 영애들이 아닌 척 웃음기를 띠었다.
저 외모에 백작가 자제인데다가 성적까지 좋다?
사교계 일등 신랑감이었다.
“왜 그러나? 표정이 좋지 않군.”
“……아닙니다.”
……하아, 얜 또 왜 말을 걸어오고 그래.
황태자는 오만하고 과묵한 설정은 어디 갔는지 자꾸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짧게 부정한 나는 얼굴을 쓸었다.
얼굴에 그렇게 표가 났나.
미간에 닿은 손가락에서 찡그린 굴곡이 느껴졌다.
다만 다른 영식들도 벌레 씹은 표정이건만 황태자가 왜 나한테만 물은 건지 이유를 모르겠긴 했다.
“재수 없네.”
황태자의 영문 모를 의심을 지우려 말했다.
그러나 내가 얼굴을 찡그린 이유는 다른 영식들과 궤를 달리했다.
밀런 토메르.
그는 악역이다.
저 순하고 맑은 얼굴로 사람들을 속여 넘길 걸 생각하면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서 당장 내가 손 쓸 방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저거 위험한 놈이니까 사전에 수를 쓰자? 백작가 자제를?
명분도 없고 실력도 없었다.
경계하며 낌새를 보는 게 최선이었다.
“휘앙 자작가의 페르딕입니다.”
“레일리입니다.”
“체르노 백작가의 바이올렛이라고 해요.”
밀런으로부터 시작된 자기소개를 나는 한 명 한명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외모에서부터 대충 짐작은 마쳤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확인 작업이었다.
귀족과 평민의 비율은 원작의 묘사대로 7대 3.
두 배 이상의 차이이나 A반이 최상위 학급이란 걸 고려하면 평민 계급의 선방이었다.
“유리스 엘하임이다.”
아이린, 시에라를 넘어 유리스의 자기소개까지 끝나자 자기소개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자네가 마지막이군.”
어쩌다 보니 구석 자리에 앉은 내가 순서상 마지막이 되었다.
나는 평소보다 미세하게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일어났다.
“알베지아 남작가의 케일입니다.”
자기소개가 재치 넘치고 화려할 필요는 없었다.
남들도 간간이 한두 마디 더 추가했을 뿐 다 간단하게 끝냈다.
그러나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희한하게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이목을 느낄 수 있었다.
“천재 마법사…….”
“입학식 때나 지금도 황태자께서 옆에 앉은 걸 보면 사전에 친분이…….”
“그러고 보면 레오나드 공작 영애랑은 전 약혼자 사이인데…….”
아니 다들 왜 나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아.
황태자의 소개보다도 나한테 호기심 만만이란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갔다.
“자, 궁금한 점이 있다면 각자 개인적으로 이야기 나누도록 하고…….”
제이스 교수가 정각을 맞이한 시계 소리와 타이밍 맞춰 말했다.
“자유 시간일세. 내일 다시 볼 때를 기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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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자기소개가 끝나자 점심시간이 되었기에 나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1학년 신입생들이 이용하게 정해진 구내식당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적었다.
위치를 모르는 학생도 있을 거고, 일찍이 넣은 외출 신청서로 외부 식사를 만끽하는 학생도 많을 거다.
어느 부류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나는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뷔페식 식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작 급식의 퀄리티라고 하기엔 웬만한 고급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았다.
주방장을 비롯한 요리사들이 죄다 황실 출신 숙수와 제자들이라고 했던가.
맛이 없는 게 이상한, 미식이 보장된 인력들이었다.
더 좋은 점은 양에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그만큼 폭식할 일도 없긴 하나어쨌든 된다는 것이 좋은 점이다.
급식 부족한 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데.
경험자로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어디 앉을 자리 없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 외의 일들로 하도 피곤했기에 기왕이면 적당히 조용한 곳에서 먹고 싶었다.
“야! 케일!”
별안간 눈이 마주친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룸메이트인 다히트였다.
애매한 감정을 숨기며 발걸음을 멈췄다.
눈까지 마주쳤는데 이걸 무시하려면…….
“……아니다.”
얘랑 떠든다고 뭐 얼마나 피곤하겠어.
룸메이트인데 친해질 필요도 있지.
나는 조용히 먹는 걸 포기하고 그의 반대편에 앉았다.
“의외네. 곧장 밥부터 먹으러 왔다?”
“뭐가?”
“귀족들은 시종 기다린다고 정원이나 둘러보러 간다고들 하더라고.”
“아, 난 뭐 그런 거 신경 안 써서.”
“하긴 넌 그런 식으로 체면 차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더라.”
진짜 극성인 귀족들 중엔 시종의 도움 없인 밥 한 술 못 뜨는 이들도 있었다.
다히트는 애새끼도 아니면서 왜 그러냐며 궁시렁댔지만 나는 딱히 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태어난걸 뭐.
하위 귀족에 속하는 남작가인 나마저 원하면 그리 살 수 있었다.
눈꼴 시려하지 않아도 시간 지나면 다들 알아서 잘 한다.
아카데미란 그런 귀족들의 권위주의를 탈피하게 만들기 위한 교육기관이기도 하니.
굴리면 안 되는 게 없다지 않나.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에서 구르다 보면 알아서 제 할 일은 다하는 인재로 거듭났다.
“……누구야?”
“아, 미안. 소개를 못 해줬네.”
다히트와 같이 밥 먹던 학생들이 눈치를 보다 물었다.
“내 룸메이트.”
“알베지아 남작가의 케일이야.”
“아하, 남작가…….”
“입학식 때 황태자랑 왔던…….”
평민 학생들이기에내 정체를 알게 되자 떨떠름한 기색이 묻어났다.
“에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정 변하지 마. 사람 무안하잖아.”
화기애애하다 갑자기 어색해지려는 공기를 다히트가 바꾸려 노력했다.
“귀족이어도 얘는 좀 달라. 나 지금 반말하는 거 보면 몰라? 신경 안 쓴다더라.”
“아카데미 학생은 신분에 관계 없이 모두 평등하다더라. 난 평민이라고 차별할 생각 없어.”
“그, 그래?”
다히트와 같은 식으로 설득하니 그들도 하나둘 내게 말을 놓아왔다.
어색함은 어쩔 수 없었지만 떠들다 보니 불편함은 가셨다.
다히트가 중간에서 교두보 역할을 잘 해주기도 했다.
얘도 다른 학생들이랑 초면인 건 마찬가지면서 뭔 십년지기 친구처럼 이렇게 친숙하게 굴 수가 있는 건지 신기했다.
첫 만남에 느낀 대로 과연 탁월한 친화력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얘는 나중에 학생회 같은 데에 들어가지 않을까.
내가 기억 못 할 뿐이지 원작에서 언급됐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A반 분위기는 어땠어? 우리 C반은 그냥저냥 다들 눈치 보는 편이었는데.”
“그냥저냥 눈치를 보기는. 눈치 본 건 우리 평민들밖에 없었지.”
“귀족들은 죄다 말 한마디 안 나누고 나갔잖아.”
그들의 성토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뭔 첫날부터 터진다냐.
비단 C반만의 문제는 아닐 터였다.
저렇지 않았던 반을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이러니 귀족과 평민의 화합의 장인 아카데미에서 사건이 터지지.
그렇다고 하여 귀족만 탓하고 싶진 않았다.
아까 내가 소개하니 귀족은 별로라며 보란 듯이 티를 낸 게 이들이다.
최종적으론 두 계급 다 문제였다.
“어허, 그러지들 마. 케일 얘는 뭐 귀족 아니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으흠.”
“그으, 그렇긴 한가.”
다히트가 말 잘했다.
귀족 앞에서 귀족을 깐 게 찔렸는지 다들 내게 미안한 티를 냈다.
더 깊이 얘기해도 서로 상처만 될 화제였던 탓에 다히트가 말을 돌렸다.
“다들 밥 먹고 뭐 할 예정이야?”
“아카데미 돌아봐야지. 할 것도 없고, 여기 구조에 익숙해져야 하잖아.”
“나도.”
“그럼 잘됐네.우리 같이 다니자고. 케일 넌 어때? A반 애들이랑 약속 잡힌 거라도 있어?”
“그렇진 않긴 한데…….”
나는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답을 주저했다.
나도 아카데미 지리를 잘 아는 게 아니니 같이 다닐까.
원작의 서술을 떠올리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달랐다.
구석구석까지는 원작에 안 나와 있기도 했고.
곧 루나의 교육이 끝날 테니 픽업만 마치고 같이 가면…….
“그건 안 될 것 같군.”
“켈록!”
달그락.
옆자리에 놓인 식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사례에 걸렸다.
“케일은 나와 선약이 있다.”
아니, 씨.
뭐냐고 이거.
“안 그런가?”
황태자가 제 호위를 우르르 매단 채 강림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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