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훈련 안내
* * *
단련장과 기숙자를 떠나 걸은지 얼마가 지났을까.
개미 한 마리 없던 길가에 점차 생도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곧이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길목마다 북적이는 인파를 맞닥뜨렸다.
“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푸른색의 머릿결을 지닌 여자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에리카?”
“흐익!”
난 뒤돌아있는 그녀의 두 어깨를 잡으며 귓가에서 속삭였다.
“아, 예, 예나구나. 좋은 저녁이야!”
예상대로 에리카였던 그녀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몸을 돌리곤, 이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해맑게 대답했다.
“그런데 예나, 머리는 어때?”
“전보다 편해. 선물해줘서 고마워.”
“그러면 볼 한 번만 만져보…….”
“그건 아니야.”
“우, 우으으…….”
난 자연스럽게 그녀와 나란히 서고, 수다를 떨며 함께 광장으로 이동했다.
“훈련하다가 온 거야?”
“응! 어떻게 알았어?”
문득 목덜미 부분이 눈에 띄어 질문을 던졌을 땐,
“평소보다 땀을 많이 흘린 거 같아서.”
“예나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뭐라도 해야 될 거 같았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기숙사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내 행동에 의욕을 받고 단련하고 있었다니.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입가에 웃음기가 맺혔다.
빠르게 성장을 마치고, 에리카를 도와줘야겠네.
“잘했어, 에리카.”
“헤헤.”
난 싱글벙글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한편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대략 십 분 정도를 걷자, 마침내 널찍한 광장이 눈에 보였다.
“사람 엄청 많다.”
“그러게.”
에리카의 말대로, 공터가 생도들로 빼곡했다.
대략 오 백 명 정도인가.
후덕한 공기에 뺨을 가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머릿수를 확인했다.
보통 한 학년마다 천 명이니, 적어도 수 백은 거뜬히 넘을 인원이 모여있었다. 이건 통계 상이었고, 대부분이 중앙 게시판에 모여있었기에 체감은 더 컸다.
「우, 우와 이걸 진짜 한다고?」
「이럴 거면 열심히 훈련할 걸.」
난 에리카의 손을 잡고, 시끌벅적한 학생들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툭, 투욱─
둘 다 키가 작기 때문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생도들의 어깨를 밀쳐내며 움직여야 했지만, 어떻게든 게시판 앞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사, 사람 엄청 많네. 예나는 괜찮아?”
그녀는 이곳저곳에 부딪치며 머리가 엉켰는지, 손으로 앞머리를 빗으며 거칠게 숨을 쉬었다.
“응.”
난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편으로는 목 주변을 주물렀다.
말이야 괜찮다고 했다만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머리를 계속 들어야 해서 목이 약간 아팠다.
키가 작은 게 한이군.
“쯧.”
정수리 끝이 남자 생도의 어깨에 다다르는 높이인데 오죽할까.
힘겹게 까치발을 들어 억세게 묶은 포니테일의 머리를 찰랑거리며, 벽면에 붙어있는 종이로 눈을 모았다.
“이, 이거 진짜야?”
이내 당황으로 점칠된 에리카의 외침에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공지문을 가리켰다. 얼마나 충격을 받은 건지, 눈동자가 좌우로 요동쳤다.
“아마도.”
그러나 난,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아니, 살짝이지만 볼살을 씰룩이며 흰색의 종이 위에 떡하니 써져있는 제국어를 읽어내렸다.
【 대규모 훈련 안내 】
마음에 쏙 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 * *
전교에 방송이 울리고 학생들이 광장이 들어찰 무렵, 일찍이 도착하여 확인을 끝낸 한 사내는 시원한 저녁 바람을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
「나 정도면 순위권에 들 수 있지 않을까?」
「애들 수준을 보면 가능할 거 같은데.」
그리고 옆에서 쑥덕이는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월프, 넌 어떻게 생각해?”
월프라 불린 그는 주위의 질문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생도 종합 훈련이라…….”
귓볼을 스치는 차다 찬 공기, 드문드문 들리는 생도들의 군홧발 소리 등. 그는 이 모든 걸 배경음악 삼으며 명상을 하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흐, 흐흐.”
그리고 열린 입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자아냈다.
「워, 월프?」
「무슨 일 있어?」
양옆의 사내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월프는 그저 실없이 비소를 내뱉었다.
‘드디어 복수를 할 수 있어.’
빠드득, 우직─!
그는 우연히 잡힌 돌멩이를 힘주어 으스러뜨렸다. 각성자이며 4등급의 마나를 지닌 자신으로선 이 정도는 껌이었다. 그래서 죽어도 인정하지 못했다.
저번 대련의 결과를. 아직도 격투 중에 한심하단 어투로 건넸던 예나의 도발이 잊히지 않았다.
"개 같은 년."
자존감이 드글드글한 눈매에서 눈물을, 오만함이 가득한 몸짓에서 자비를 베풀어달란 처절함을 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규모 훈련은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였다.
“크흐흐, 아무것도 아냐.”
파스스─!
월프는 손에 쥔 돌가루를 잔디 아래로 흘려보내며, 요즘 따라 보기 어려웠던 미소로 대꾸했다.
이번 훈련은 대규모라는 이름처럼, 거대한 규모로 다양한 교육이 치뤄질 터. 이번 기회에 예나에게 본인의 위치를 뼈저리게 체감시킬 수 있는 기회다.
‘꼭, 대가를 돌려준다.’
지금 많이 웃고 있기를, 월프는 저 많고 많은 생도들 중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예나를 떠올리며 입술을 핥았다.
* * *
“으, 으음.”
“왜 그래, 예나?”
“……그냥. 왠지 소름 끼쳐서.”
난 괜히 코트의 단추를 끝까지 여매어 몸을 따스하게 뎁혔다.
【 대규모 훈련 안내 】
뒤이어 직전에 다 읽어내린 문서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내용은 꽤나 간단했다.
부서 신청이 끝나는 시일인 일주일 뒤, 합동 교육에서 괴수 대항 훈련을 시작으로, 조별 모의 전투를 비롯해 생도별 개인 대련을 진행한다는 게 끝이었다.
“아직 수련 많이 못했는데…….”
여기서 에리카가 걱정하는 건 벌써부터 훈련에 들어설 시, 좋은 결과를 못 낼까봐 하는 우려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일정이었다. 모든 교관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을 타이밍이었으니까.
심지어 여기,
《최우수 평가를 받은 생도에게는 1만 데나를 수여한다. 더불어 추후 적격 심사에서 본 합동 훈련에서 산출하였던 가산점을 부여하도록 한다.》
이 문구를 보라.
두둑한 보상도 있는 마당에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치열하고 피튀기는 전투를 치를 미래를 상상하니, 괜히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무튼 슬슬 이 공간에서 나가야겠군.
“에리카, 다 확인했지?”
“응!”
“그럼 가자.”
난 사람이 더 들어찰까, 한시라도 빨리 편하게 숨을 쉬기 위해 에리카를 데리고 게시판 인근을 빠져나왔다.
또각, 또각.
그리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잔디밭에 앞에서 멈춰섰다.
“여기에서 좀 쉬자.”
“응, 그러자. 엄청 힘들었어…….”
그녀는 걸음을 멈추자마자 그 즉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내 반짝이는 별빛으로 가득한 허공을 내다보며, 바닥에 누워 대 자로 뻗었다.
털썩─
나 또한 양반다리로 자리에 앉아 한가로히 휴식을 취했다.
“예나도 봐봐, 엄청 예쁜 하늘이야!”
어느 정도 숨을 돌린 후, 에리카는 한 손으로 내 허벅지를 건들이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드니, 수많은 별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아름다웠다.
과거 세상에선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응, 예쁘네.”
시원한 밤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골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습들을 원 없이 감상해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서인지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앞날을 내다봤다.
제국 화폐와 추가 점수라, 꼭 최우수 성적을 받아야 해. 단순히 즐거움을 떠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보상이었다.
전자는 가문의 지원이라곤 없는 현실 속에서 사관학교 생활을 보다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도움이 될 터다. 데나 하나당 거진 천 원치의 값어치를 했으니까.
후자는 당연하겠지만, 적격 심사에서 요긴하게 쓰일 테고.
어쨌거나 재밌는 하루하루를 보내겠지.
1학년 전체가 함께 훈련을 치른다는 건, 학급에 국한되었던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사관학교가 야심 차게 준비한 만큼, 기존에는 보지 못했던 여러 훈련 장비를 접하리라 예상했다. 덕분에 남은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리나 고민이었다.
끝나면 2월이겠네.
지금은 1월 막바지, 난 손가락을 들어 훈련을 떠나고, 다시금 사관학교에 돌아올 날을 짐작했다.
기억에 비추어보아, 이런 거대한 일정을 소화하려면 2주에서 3주 정도가 걸리니 대충 2월 하순 쯤에 끝나고, 복귀 절차까지 고려하면 그 달 막바지인데…….
“아?”
“까, 깜짝이야. 무슨 일 있어?”
순간적으로 에리카가 곁에 있는 거조차 까맣게 잊은 채, 허리를 벌떡 치켜세우며 꿀꺽 침을 삼켰다.
도대체 그걸 왜 잊고 있었지? 다른 국가도 아니고 제국이다. 2월, 그것도 하순이라면 거대한 정치적 바람을 일으킬 폭탄이 터지는 시기란 말이다.
젠장.
『제국 국가 의사당 화재 사건』
난 후대에 그리 불리웠던 사태를 기억하며 꼼지락거리던 손을 움켜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