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리나의 뒷공작
* * *
최고의 기갑전 지휘관들.
갈리아 공화국을 항복시킨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데리안과, 그의 전술을 실질적으로 창안해낸 루츠, 이 두 사람이 있는 부서를 갈 수 있다니.
“연구부서라는 게 어떤 기능을 하냐면…….”
“가겠습니다.”
난 그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안을 승낙했다.
이미 부서에 대해 알고 있음을 넘어 세세한 특징을 꿰고 있을뿐더러, 각 부서가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지까지 파악하고 있어서 들을 필요가 없었다.
거절하면 멍청한 거야.
연구 부서란 교육과정의 일환으로서, 후보생 모두가 하나씩은 가입해야 하는 기관이었지만, 성적마다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천차만별이었다.
그만큼 각각 학문적 수준 및 지원 차이도 상당했다.
최상위권의 부서는 사관학교가 자체적으로 관리하노라면, 그 반대론 담당 장교도 없이, 생도 스스로가 알아서 가꿔야 하는 곳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점에서 가르텔의 추천서는 굉장한 이점을 지녔다.
성적이 낮든 말든, 교관의 이름값 하나만으로 가입이 가능했다. 대학교로 치자면 특별 전형이었다.
그것도 마도전술 계획부라면…….
아스트라한 사관학교, 아니 제국의 단연 최고 부서였다. 지휘관부터 생도까지, 온갖 엘리트의 집합소였기에 유능한 인물과 인맥을 틀 가능성이 커진다.
거기에다가 이 부서를 잘만 이용하면. 10년 뒤에나 등장할 작전 개념들을 제국에게 학습시킬 수 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한 미래,
씰룩─
볼에 힘을 주어 웃음을 애써 참아냈다. 그저 조용히 의무실 침대에 혼절해있을 월프를 향해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고맙다.
놈의 안면에 주먹 한 방을 날린 거로, 막막했던 문제가 해결된 거잖아? 기특하다 못해 사랑스러웠다. 이 시간부로, 그의 잘못들을 용서했다.
매우 유용한 친구였어.
친구라는 게 별거 있나, 내게 이득을 주면 그게 친구지.
“흠, 흠. 그래야지. 그럼 추천서를 마련하면 집무실로 부를 테니, 그때 보도록 하지. 오늘은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가르텔이 어깨를 두드리자,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흙바닥을 마주하는 얼굴로는 남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오늘 훈련을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분위기도 어수선한데 빨리 끝내도록 하지. 다들 수고했다.』
그는 월프가 실신하여 수업을 더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이르렀다고 생각했는지, 수업을 일찍 끝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생도들은 그 인사에 더듬거리는 어투로 대답했다. 아직도 산만함이 가시지 않은 모양새였다.
짝짝─!
『그럼 점심 맛있게 먹도록.』
교관이 떠나도, 그들은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워낙 직전의 광경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거겠지. 내가 저들의 입장이었다면 똑같했을 거다.
「끝난 거야?
「배, 배나 채우러 가자!」
「……그래.」
불현듯 한 생도가 움직여서야, 후보생들은 어물쩍거리며 발을 뗐다. 어쨌든 수업이 끝난 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야 하는 것이 교내 일정이었으니까.
“그런데…….”
의외군.
주변을 둘러봤다, 생도들은 주변으로 흩어진 채였다. 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이 끝나면 분명 그녀가 찾아오리라 예상했지만, 그림자조차 안보였다.
이미 떠난 거 같았다.
가장 격하게 반응할 사람일 텐데. 생각 외였다.
꼬르륵─
뭐, 내일 오겠지.
지금은 허기짐을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평소보다 몸을 격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몰라도, 배에서 알람이 크게 울렸다.
“예, 예나, 같이 밥 먹을래?”
“그래, 가자.”
“응!”
난 유일하게 곁에서 기다려준 에리카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근데 예나. 볼살 한 번만 만져봐도 돼?”
“아니.”
“우음, 알았어…….”
그녀와 실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 * *
“하아, 하아.”
콰앙─!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기숙사로 달려온 리나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점심조차 먹지 않았기 때문인지, 기운이 더욱 쳐졌다.
‘……월프가 졌어.’
마음의 준비를 했다만은, 직접 맞닥뜨리니 경악스러운 결과다.
적어도 호각을 다툴 줄 알았다. 아무리 월프가 싫다고 해도, 그의 실력까지 부정할 순 없는 법이니까. 그래도 명색의 대가문의 장남 아닌가.
하지만 예나는 월프를 가지고 놀았다.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아이를 평민이 압도했다.
“하, 하하…….”
리나는 침대에서 힘없이 일어나, 느릿느릿 탁자로 향했다.
달칵, 찌이익!
곧이어 그 위에 있던 크루아상과 생크림의 포장지를 뜯었다.
“아음. 냠.”
그리고 입에 넣기 시작했다.
단 게 들어가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소리가 있는 거처럼, 이 디저트들은 일종의 리나만의 정신 안정제였다.
포크로 약간의 크림을 퍼내어, 빵에 얹어 먹었다. 황궁 요리사만큼은 아니지만, 코끝을 자극하는 담백한 아몬드의 향과 달콤한 생크림의 맛이 조화를 이뤘다.
고상하게 음미하니 복잡하던 머리가 그나마 환기됐다.
“프으으.”
리나는 손가락으로 탁상 위를 두들기며 입술을 곱씹었다.
‘확실히 평민은 아니야.’
오히려 좋다. 이번 사건이 확신을 가지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의 가호라도 받지 않는 이상, 평범한 제국민이 저런 힘을 가질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예나 프로이드, 그 소녀에게 당최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냐는 건데.
“후릅,”
리나는 언제 끓여왔는지 모를 커피를 들이키며 눈꺼풀을 닫았다. 씁쓸한 원두의 향이 사고의 냉철함을 촉발했다.
그런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끝낸 리나는,
“헬레나.”
커피의 출렁이는 표면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타악─!
그러자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여인이 리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예, 황녀님.”
스무 살 중반이나 될까, 헬레나라고 불린 이는 앳돼 보였지만, 나이에 맞지 않은 차디찬 눈매를 지녔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이 어울렸다.
헬레나는 리나를 보필한다는 중대한 책무를 맡는 시녀장이었으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예나라는 생도에 대해 깊숙이 좀 알아봐 줄래요? 물론 가문에 전하는 부탁이 아닌, 개인적으로.”
와삭─!
리나는 크루아상을 거칠게 씹었다.
예나가 아버지 측에서든, 아니면 다른 쪽에서 든, 어찌 되었든 간에 범상치 않은 녀석이란 건 확실시되는 상태, 비밀을 파헤쳐볼 필요가 있었다.
내 안위를 위해서라도.
“가능한가요?”
그리고 이 일을 하기엔 헬레나가 적격이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유년 시절부터 함께 커온 만큼 신뢰와 유대감이 있었다. 그녀라면 비밀을 지켜줄 거라 굳게 믿었다.
가문에 연락하면 더 쉽게 풀어낼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어.
“명을 받들겠습니다.”
헬레나는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머리를 숙였다. 어려운 의뢰임에도, 언제나처럼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무척 좋았다. 나를 무시하고 핍박하여 정떨어지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존중을 해주는 거 같았으니까.
리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보조개와 함께 인사했다.
“고마워요, 헬레나.”
눈빛은 사납게 서려 있었지만.
* * *
다람쥐도 아니고…….
“맛있었구나.”
“우음.”
도토리를 머금은 양, 에리카의 볼이 빵빵했다. 난 헤실거리는 얼굴로 아랫배를 문지르는 그녀를 응시하면서, 속으로 대단한 먹성에 감탄했다.
진짜 배고팠나 보네.
제국 고유의 전통식이라 할 수 있는 바싹하게 구운 돼지 다리와 수프를 비롯한 각종 음식을, 에리카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들이켰다.
“맛 어땠어?”
“으브, 므스스으!”
“삼키고.”
“꿀꺽……, 아주 맛있었어!”
저 불룩한 입가가 그걸 증명했다.
“예나 입에 양념 묻었어.”
“아, 고마워.”
나라고 해서 음식을 즐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전엔 디지털 조각을 입에 욱여넣는 게임 속 상호작용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진짜 ‘음식’을 먹는 거잖아?
훨씬 풍부했지.
전엔 없던 감칠맛이 느껴졌고, 희미했던 단맛과 쓴맛은 명확해졌다.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즐거워졌다.
“이제 다 닦였지?”
“응!”
난 소매에 손수건을 넣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선선한 오후의 바람, 새파란 잔디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향기,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햇빛.
좋네.
식당 앞, 사관학교에 마련된 공원은 소화시킬 겸 걷는 거리로 제격이었다.
터벅, 터벅.
“우음, 예나는 기숙사 안 가는 거야?”
“응,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갈림길 속에서 기숙사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니, 에리카가 물음표를 띄우며 갸웃했다.
왠지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함께 갈 수 없었다.
하루라도 허투루 보낼 수 없지.
푹신한 매트릭스 위에 누워 선선한 공기를 맛보며 낮잠을 잔다면 몸은 편안하겠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수업이 끝났어도, 단련을 끝나지 않았다.
“방 구경 시켜 줄려고 했는데……, 알겠어.”
“내일 보자.”
“응!”
난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민 에리카에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돌렸다.
스윽─
앞으로 쭉 뻗은 흙길로 발을 내디뎠다.
이쪽으로 가면 있겠지.
단련장이.
당장 종합 능력치는 하위권인 7등급, 적격 심사 전까지 어떻게든 두 단계 정도는 올려야 해. 애초에 이런 썩어빠진 몸으로 계속 지내고 싶지 않고.
파슥, 파스슥─!
난 등허리까지 부드럽게 뻗은 머릿결을 휘날리며 단련장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