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 아카데미 소녀 마도장교-3화 (3/40)

〈 3화 〉 때아닌 싸움이 발생했다

* * *

“명연설이었습니다.”

연설이 끝난 직후 강당 뒤편, 서기관으로 보이는 남성은 웃으며 루스테트에게 맡아두고 있던 겉옷을 건넸다.

“허허, 고맙군.”

루스테트는 화답하며 외투를 챙겼다. 옷의 색이 무척이나 어두운 것이 그의 제복과 안성맞춤이었다.

“그럼 가도록 하지.”

“예.”

또각─! 또각─!

군홧발로 인한 걸음 소리가 복도에 매섭게 울려 퍼졌다.

“이번 기수는 어떠셨습니까.”

“나쁘지 않았네.”

“호오, 그거참 좋은 소식이군요.”

루스테트는 서기관의 말에 달갑게 미소지었다.

충분히 눈여겨봐도 좋은 생도가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드높은 단상 위에 올라섰던 만큼 모든 생도의 면면을 살폈다. 덕분에 자신의 파격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느 아이가 평정심을 유지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일종의 루스테트 자신만의 정신력 검증 시험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몇 아이를 확인할 수 있었지.’

푸르스름한 안광을 내비쳤던 그 소녀처럼 말이야.

아직 가공하지 않은 원석을 발견한 게 이런 기분일까, 루스테트는 자신의 콧수염을 쓸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군.

여린 얼굴에 자그마한 체구를 지녔음에도 지니고 있던 서늘한 분위기와 차분한 눈빛은 도저히 신입생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소녀의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보석이 평범한 돌덩이 속에 섞여 있으면 무릇 더 밝은 법, 루스테트는 눈매로 호선을 그리며 여생도에 연이어 장래가 기대됐던 학생들의 인상을 곱씹었다.

“이번 신입 생도가 몇 명이지?”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서기관에게 질문했다.

“천 명 정도 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많군.”

“본격적으로 운영되는 첫 연도이니깐요.”

생도들은 많았다.

그 수가 네 자릿수에 달했다.

그렇다는 건, 직전에 점 찍은 후보생을 제외하고도 아직 많은 아이가 본인들의 재능에 꽃을 피우기 전이라는 것.

‘장교 교육을 전부 끝마친다면.’

생도 모두가 초짜 티를 벗게 되겠지.

결국 그들 전부가 자신만의 꽃을 피울 테고.

과연 어떤 모습들을 보여줄까

“흐흐흐…….”

상상만 해도 즐거운 미래,

“불 있나.”

“아, 여기 있습니다.”

루스테트는 이 기쁨을 연유하기 위해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냈다. 뒤이어 속에 담뱃재를 털어놓고는, 서기관이 건넨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후우…….”

밋밋하긴 하나 부드러운 향이 밀려온다, 씁쓸한 연기가 전신을 휘젓자 전보다 머릿속이 상쾌해진다.

루스테트는 정신이 쇄연해지는 연기를 풍미하며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최대한 생도들이 정도를 걸을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 그들의 자신의 재능을 성장시킬 때까지 지원해준다, 이게 바로 교장으로서 행해야 할 마땅한 책무이리라.

그러면 먼저 생도들이 각각 누군지부터 파악해놔야겠지,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서기관?”

“예.”

“오늘 중으로 생도후보생 인적사항을 정리해주게, 부탁하지.”

마침내 생각을 끝마친 루스테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천 명의 명단을요.”

“그게 서기관의 할 일 아닌가, 허허.”

“끄, 끄으으. 알겠습니다.”

서기관의 앓는 소리와 함께.

* * *

총책임장이 강당을 떠나고, 내부는 소란으로 가득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아니 미리 이야기 좀 해주던가!」

머리를 감싸 쥐며 윽박지르는 생도가 있는가 하면, 실없는 웃음만을 내뱉으며 주저앉은 이도 보였다.

갑작스러운 교장의 공표에 얼빠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난 그들을 피해 밖으로 나섰다.

끼익!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거세게 휘날리는 흑색의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주변 벤치를 찾아 다리를 붙였다.

“이제 좀 살겠군.”

조용함을 즐기는 나로서는 조금 전의 소란이 너무나 불편했다. 그나마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리지 않는 야외로 나와서야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역시 멋지네.’

난 때마침 눈앞에 펼쳐져 있던 건축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꼭대기엔 반짝이는 독수리의 동상, 제국의 깃발 등, 입학식 전에 봤던 장식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보다 진정된 채 풍경을 감상하니 기분이 색달랐다.

이젠 매일 이런 광경을 보게 되겠지.

“몸이 바뀌었다라.”

햇볕에 따스하게 달궈진 벤치에 누워 평화로움을 즐겨서일까, 직전까지 묻어두었던 갖은 상념이 머릿속을 장식했다.

근육이 사라지고 자리한 포동포동한 지방, 굴곡이 생긴 상체 등, 전과 다른 이물감이 만져졌다.

짝, 짜악─!

뺨을 두드려도 이젠 이게 니 몸이라는 걸 받아드리는 듯, 얼얼한 통증만이 느껴졌다.

굳이 이런 형식으로 페널티를 줘야 했나?

성별이 그대로였으면 좋으련만.

「이 꽃 예쁘지 않냐?」

「네 얼굴 옆에 있으니까 더 예쁜 듯」

「야」

난 어느새 강당을 빠져나온 생도들을 둘러보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예전이라면 내려다봤을 아이들이 이젠 나보다 머리가 하나씩 컸다.

“쯧.”

아직도 날 이 세계로 보냈을 놈이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 설정을 뒤바꿔 난이도를 높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런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을 한 걸까.

하다못해 키라도 유지해주지, 괜한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물론 현실로 돌아가고 싶단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적어도 흥미와 즐거움 따위 없는 과거보단 훨씬 나았으니까.

“흐으우…….”

이렇게 하품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도 있지 않은가.

이참에 잠깐 눈 좀 붙일까, 어차피 더는 할 일이 없기도 하니…….

바람에 살랑이는 들판의 광경 때문일까, 아니면 간간히 들려오는 산새들의 지저귐에 의해서일까. 난 오랜만에 몰려오는 졸음에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툭, 투욱─

하지만 안타깝게도 잠을 청하진 못했다.

“안녕?”

코앞에서 이름 모를 남성이 손을 내민 채 인사하고 있었기에.

누구지?

난 대꾸하기 이전에 빠르게 외관을 돌아봤다.

귀족인가.

그리고 얼마 안 가 그가 꽤 높은 가문의 자식임을 짐작했다.

금발의 머리를 시작으로,

나긋한 음색에 찬연한 금발만큼이나 격식있는 태도, 한 눈으로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의 겉옷과 제복 아래로 나풀거리는 부드러운 실크가 설명해주고 있었으니까.

이 남성이 전형적인 귀족 자제라고.

“월프 폰, 슈트레만이야. 입학생 맞지?”

녀석은 새하얀 이가 드러나는 미소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특히나 악센트를 붙여 자신의 마지막 이름을 강조했다.

스윽─

그가 쭉 뻗은 손이 바로 앞에 위치했다.

난 말없이 두 눈을 치켜들어 월프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왠지 모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너는 이 악수를 거부하지 못하리란 확신이라도 있는건지, 위풍당당한 기세로 두 눈을 마주했다.

도대체 누구지?

그럴수록 난 혼란함에 휩싸였다.

그의 기세에 눌려서가 아니었다. 놈의 눈동자가 은근히 기다란 흑색 부츠 위에 드러난 내 허벅지를 흘겨보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인데?

월프 폰 슈트레만에 대한 기억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당황했다.

분명 전형적인 귀족의 외관이잖아, 그런데 일면식조차 없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 1945를 플레이한 횟수만 수 천 번이다, 클리어하기까지 이 사관학교 시설을 셀 수 없이 누볐다.

덕분에 웬만한 생도의 이름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월프라는 이름과 슈트레만이라는 가문은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눈앞에 서있는 남성의 존재가 기이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개정판이 되면서 추가된 인물 중 하나인가.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응, 반가워. 너도 1학생인가?”

“맞아. 베른 군사훈련소 출신이야. 여기 뒤에 있는 애들은 내 동기생들이고.”

그렇다면 이 아이에 대해서 자세히 파악해놓는 게 최우선, 난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일단은 월프가 쓸만한 인재상인지부터 확인할 심산이었다.

새롭게 탄생한 인물이든 아니든 좋은 능력과 정신을 지녔다면 훗날 대전쟁에서 활약하는 건 기정사실화였다. 그러니 미리 친밀감을 형성해놔야지.

지위도 높은 것이 쓸모 있어 보이고.

「오늘 입학식 사람 존나 많지 않았냐?」

「그니까, 쪄 죽는 줄 알았다.」

난 뒤에서 떠들고 있는 그의 친구들을 보고선 월프가, 아니 슈트레만 가문이 보통의 귀족 가문이 아님을 확신했다.

저 둘도 옷차림을 보아하니 필히 귀족인데 이들의 관계를 보면 누가 봐도 월프가 갑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아, 잠자는 데 방해했으면 미안. 사관학교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보니 친해지고 싶어서 인사했어.”

과연 그럴까, 난 가식적임 가득한 월프의 대답을 듣곤 속으로 실소했다.

저 자만감에 가득 찬 눈동자가 어딜 봐서 친구를 향한 눈이란 말인가?

내 외형을 보고 말을 걸었겠지. 그가 어떤 눈빛을 품었는지와 어디를 보고 있는지를 따라가보면 알고도 남았다.

“응, 앞으로 잘 지내보자.”

“하하, 그래!”

그러나 난 별다른 내색 없이 웃는 얼굴로 월프를 맞이했다. 앞으로 협력자로서 요긴하게 이용할지 모르는 이에게 속마음을 드러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다만,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수정했다.

언젠가 나에게 큰 도움을 주기라도 한다면 평가를 긍정적으로 뒤바꿀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월프는 그저 흔하디흔한 과시가 가득한 귀족군상이었다.

“혹시 이름이 뭐야?”

“예나 프로이드.”

월프는 언제나처럼 특유의 친절한 어조로 물어왔다.

“예나 프로이드? 예나 폰 프로이드를 잘못 말한 거지?”

“정확히 말한 게 맞는데.”

그리고 그것이 둘 사이의 평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 그럼 평민이라는 소리야?

“응.”

그는 가슴팍의 이름표를 흘겨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시종일관 웃음을 짓던 그의 입꼬리가 차게 식었다.

마치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그는 내밀었던 손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펴, 평민이라고?」

「더러운 계층의 자식이 왜 여기에 있어?」

그의 친구들까지 경악을 표현했다.

저런 반응이 이해는 됐다.

평민이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

본디 아스트라한 사관학교는 귀족이어야만 올 수 있는 게 통상적이었다. 각성 여부에 이어 출생 신분까지 보기에 평민이 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귀족 이외의 각성자 대부분은 적격 심사의 탈락자가 갈 부관학교로 입학하는 게 보통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랬다.

난 그 불가능의 늪을 뚫어낸 사례고.

대전쟁의 활약자.

제국을 위해 맞서 싸운 수많은 이들 중 크나큰 활약을 보인 군인의 자식에 대해선, 특별히 입학 자격을 부여한다, 그게 아스트라한 사관학교의 교칙이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즉 설정상 예나 프로이드의 아버지가 바로 [대전쟁의 활약자]이기에 그 범주에 해당했다.

그러니 평민임에도 임관할 수 있었다.

“하, 하하하! 지금까지 뭣도 없이 그딴 식으로 말했던 거구나. 귀족에 예를 갖추지도 않고?”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귀족이라고 속단했던 월프의 기분이 어떠할까, 그의 눈동자에선 일종의 살기마저 풍겨왔다.

타악─!

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턱을 빠드득 깨물며 내 멱살을 부여잡았다.

“얼굴이 반반해서 말을 걸어줬는데, 평민이었으면 허리부터 굽힐 것이지 뭔 자존심을 그렇게 부려?”

“…….”

“그러니 슈트레만 가문이 뭔지 몰랐지, 멍청한 평민 년이니. 지금까지 날 속이면서 즐거웠냐?”

확연한 키 차이.

그가 목깃을 잡고 허공으로 끌어당기니 머리가 젖혀졌다. 난 애써 까치발로 땅을 지탱하고서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딱히 속인 적은 없는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휘젓고, 미사여구 없이 짧게 답했는데 언제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그래도 난 이런 월프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오히려 마음 한편에서는 기쁨이 느껴졌다.

이제 가만히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 굳이 허례허식을 챙겨가며 친절해 대꾸해줄 이유가 없어졌다, 월프는 이제 날 원수 보듯이 째려봤다.

……이거야.

입학식 직전에 다졌던 각오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즐거울 만한 일이 일어난다면 굳이 피하지 않는다.’

지금 사태에 매우 적합한 명언이다.

굳이 피할 필요가 없지. 난 월프의 기운에도 굴하지 않고 꼿꼿이 목을 치켜세웠다. 오히려 앞발을 내디뎌 거리를 더욱 가까이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마음 한구석에서 바랬을지도 모른다.

즐기기 위해 살아간다.

따분한 전의 인생과 다르게 지낸다.

그게 내 가치관이며 목표였다. 아무리 냉철하게 판단하며 신중히 움직인다고 하여도 그것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토록 갈구하던 재미있는 일이 나에게 닥쳤다.

어찌 참을 수 있겠어?

과거 게임 속에서 적의 진지를 쳐부수고, 적군을 하나씩 쓰러뜨리며, 마침내 적국의 수도에 깃발을 박아넣을 때의 희열!

게임이었을 때임에도 몸이 달아오르는 즐거움을 감각했는데, 이젠 현실이 된 이 세상에서 이 월프라는 아이와 난투를 벌이면 어떤 기분일까.

“웃어? 왜 대답을 안 해?”

“…….”

가슴이 간질거렸다. 난 얕은 미소를 지으며 녀석에게 눈을 모았다.

귀족? 가문? 저 옆에 있는 친구? 안중에도 없었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보조개를 만들었다.

「저기 무슨 일 일어났나?」

「쟤 슈트레만 가문 장남 아니야?」

「헉, 지, 진짜네.」

생도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강당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인지라 이목을 끌 만했다.

하지만 난 주변을 에워싸는 인기척들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단지 월프를 향해 손 한 짝을 들어 보였다.

“뭐야?”

월프는 그 대꾸에 눈깔을 부라리며 멱살을 억세게 비틀었다.

즐거운 싸움을 끌어내기 위해선 놈을 자극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녀석은 언뜻 봐도 귀족 특유의 드센 자존심이 있어 보였으니 도발이 잘 먹혀들겠지.

덕분에 난 망설임 없이 내밀었다.

뾱.

주먹 안에서 꼬물거리는 자그마한 중지를.

“좆까.”

강렬한 대사와 함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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