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3년 후 6
* * *
왕이 하품한다.
아무것도 없다. 이끌어야 할 백성도, 다스려야 할 영토도, 하다못해 무찔러야 할 적군조차도.
그런데도 그는 왕이었다. 저 위대한 존재에게 내려받은 신성한 지위는 상황을 가리는 것이 아니니.
왕은 궁금했다. 왜 자신은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는가. 이 지루함을 견뎌가면서.
'기다리라.'
문득 들려오는 명령에 왕은 수긍했다. 그래, 명령이 있었다. 그리고 합당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명예로운 것. 그 사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왕은 씻은 듯 사라진 의문에 흡족해 하다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괜한 생각이었다. 그 순간 생각하기만 해도 골치 아픈 일들이 머릿속에 한가득 떠오르기 시작했으니.
왕의 일이란 언제나 불만과의 싸움이었다. 누군가 만족하면 다른 누군가가 불만을 느끼는 것, 그 법칙과 평생을 겨루어 봤지만 언제나 패배자는 왕이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가 상대해야 할 가장 큰 불만은 그 자기 것이었다.
언제쯤 이 격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냐, 언제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냐.
'걸어라.'
다시금 찾아온 목소리에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걸으면서 왕은 생각했다. 이 명령이 나로 하여금 갈증을 채우도록 허락하기를. 오랜 목마름을 적셔주기를.
이 걸음의 끝에 메마른 심장을 단숨에 맥동 시킬 뜨거운 피가 있기를.
발바닥의 감촉이 흉흉한 시련을 암시하는 듯했다. 딱딱하고 건조하며 꺼슬거리는 불쾌한 땅이었다.
왕은 고향의 촉촉한 흙과 낙엽들이 그리웠다. 그가 수여 받은 영토의 흙조차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으니.
영토의 흙.
왕은 또다시 의문을 떠올린다. 내가 왜 이곳에 있지?
그는 영토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침공을 명하더라도 결코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존재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므로.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지금, 이곳에 있는가?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아쉽게도 왕은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벼락이 내리쳤기 때문에.
눈을 깜빡이니 허공에 푸른 구슬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그 씨앗에서 싹이 자라난다. 그리고 그 싹은 푸른 줄기로, 푸른 번개 줄기로, 굵고 울창하게 자라나 왕의 머리 위를 덮는다.
내리친다. 번개 줄기가 왕을 얽어 매고 온몸을 뒤튼다. 춤추는 번개 안에서 털은 불타고 혈관은 터져 나가며 신경은 익어 버린다. 그렇게 심장이 멈춘다.
누군가 폭소한다.
그 광경을 보며 터질듯한 만족감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번개에 죽어 가는 왕을 보며 웃음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찌푸리며, 오열한다.
거기에 더하여, 웬 인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4명의 얼굴,
알고 있다. 누군가는 그 4명의 인간을 알고 있다. 왕 또한 그 4명을 알고 있다.
다음 순간. 왕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한 올의 털조차 그슬리지 않은 채로. 천둥도, 번개도 없었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방금 본 것은 무엇인가?
혼란에 잠겨 있을 틈도 없이 왕은 번개의 전조를 느꼈다. 저도 모르게 뒤로 펄쩍 물러나자 빈자리를 번개가 후려쳤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방금의 그 환각이 현실이 되었으리라. 거기에 생각이 닿았을 때 몇 명의 인간들이 달려오며 각자 무기를 겨누는 모습이 왕의 눈에 들어 왔다.
옳아. 찾아왔구나.
자잘한 것들을 흘려 버리고 왕은 웃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왕은 도전자들의 힘과 지혜를 시험해 볼 것이다.
*
기습은 실패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우리가 미숙했는지, 놈이 만만치 않은 것인지.
하지만 솔직한 심경으로는 한 방에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직접 그 골통을 박살 내고 싶었으니까.
치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의수에 장착한 엔진이 날뛰기 시작한다.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넣자 검날을 타고 주황색 아지렁이가 피어오른다.
저 원숭이놈을 잡기 위해 다급하게 개조한 고화력 저중량 모델의 장비.
숨을 힘껏 들이쉬고, 단숨에 도약한다.
내리친다. 머리를 향해 곧장, 수직으로.
놈은 두 개의 곤봉을 교차하여 머리를 보호한다. 충돌한다. 불티가 튄다.
힘은 대등하다. 양손으로 내리친 일검에 곤봉이 밀려 나는 듯하다가 다시 중심을 되찾는다.
더러운 점은, 그러고도 놈의 팔이 여섯이나 남았다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는 머리가 셋이라는 점이고.
놈이 4개의 팔을 사용해 반격에 들어가려는 찰나, 휴식조에서 지원을 온 길태와 외날검과 얼음 망치를 나눠 들은 예림이 좌우를 막아선다.
쇠와 돌, 열기와 냉기, 호흡과 판단. 모든 전투의 구성 요소가 제각기 뒤섞여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간다.
3대 1의 상황. 그러나 놈의 팔이 여섯인 만큼 전투는 대등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한 가지 아니꼬운 것은, 놈의 팔 두 개가 아직도 합장을 하고 있다는 것. 괘씸하게도.
하지만 계속 그리 고상하게 굴지는 못할 것이다. 진형이 제대로 잡혔고, 이제 두들겨 팰 일만 남았으니.
저번 사냥 실패의 원인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당초 인원이 적었다는 점, 아무 정보 없이 전투에 들어 갔다는 점, 전위 중 하나가 경험이 적었다는 점 등등.
그 모든 이유 중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바로 놈에게 움직임을 유도 당했다는 것이다.
놈은 대열을 파악하고 움직임을 읽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행동을 유도했다. 그 결과 하나하나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었고, 대열의 붕괴로 이어졌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저 원숭이 대가리가 제아무리 똑똑하다고 한들 지금처럼 3명에게 완벽히 둘러싸인 상황에서 새로운 전략적 변수를 끼워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유효타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셋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전투에 집중하기 위해 떨쳐 낸다.
전투 구도가 안정되자 후열이 합류했다. 어디까지나 조역으로서, 섣불리 큰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염동력이놈의 중심을 뒤흔들고 바람 화살이 옆구리를 두드린다. 전열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빈틈을 노린다.
사각에서, 슬그머니 보라색 불꽃이 몸을 일으켜 춤을 춘다. 방심한 놈의 팔뚝을 슬쩍 훑는다. 혜은이의 솜씨였다.
혜은이의 실력은 노련한 헌터의 수준으로 성장했다. 빈틈을 만들어 주고 나서야 겨우 공격에 나서던 어설픈 솜씨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빈틈이 생길 타이밍을 스스로 가늠하고 능동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놈은 또다시 교묘하게 움직여 아무런 피해 없이 공격을 피해 낸다.
또다시 위화감이 엄습한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조심스럽게, 그 위화감의 정체에 파고 든다.
큰 한 방을 준비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또다시 번개였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성급하게 쏘아냈다가는 기껏 몰아붙이던 기세가 꺾여 버릴 수 있었다.
잘하면, 이대로 가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잘하면, 이대로만 간다면.
그럴 리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갑자기 몸을 반바퀴 돌렸다.
상대하던 무기가 바뀌었다. 곤봉 두 개에서 단검 하나, 차크람 하나로.
하지만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예측한 움직임 중 하나였으니까. 도리어 놈이 회전하며 생긴 빈틈으로 역공을 시도했다.
둘이 아니었다. 셋이다.
사각에 숨어 있던 세 번째 무기가 급소를 향해 휘둘러왔다.
순간,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방호 코트를 최대 활성화하고 의수의 보조 장치를 이용해 능력을 끌어올린다. 그렇게 방어 역장을 짜내어 펼친다. 무기를 흘려 보내기 위해 손목을 뒤틀어 방어 자세를 취한다.
거기까지가 함정이었다.
나와 예림은 무기 세 개의 공격을 받아 순간 움직임이 굳었다. 창을 들고 있던 길태는 순간적으로 바뀐 움직임에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긴 빈틈으로 놈이 뛰어올랐다. 높이 도약하여, 그대로 후열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때와 같다. 이쪽의 의도를 읽고, 망가뜨리고, 파고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렇다.
여덞 번째 멤버인 우희를 따로 빼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다.
우희가 휘두르는 채찍이놈의 발목을 휘감는다. 단단히 붙잡은 채찍을 수족처럼 휘둘러 땅바닥에 메다꽂는다.
그리고 마침내, 천둥이 어금니를 드러낸다.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을 것이라며.
으르릉, 소리와 함께 번개가 강타한다. 적당히 구워졌을, 마비되었을, 둘 다일 괴물을 향해 타이밍을 맞춰 달려들었다.
제때에 발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영상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짝짝,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꺼지던 모습이.
번개 소리에 먹통이 된 귀에 착각처럼 비명이 울렸다. 길태가 지르는 것이었다.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달려들어, 그대로 얻어맞아 날아가는 우리 창쟁이 길태.
순간적으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억지로 놈에게 고정한다. 괜찮을 것이다. 방호 코트를 특별히 단단한 것으로 준비했다. 길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 해.
저 가증스러운 짐승은 다시 히죽 웃더니 팔을 들어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우희가 휘두른 채찍이 그 팔목에 감겼다.
가볍게 손목을 튕기자 우희의 몸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튕겨 올랐다.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놈의 품으로 들어간다. 그 단검, 곤봉, 차크람의 사거리 안으로.
가까스로, 정말 아슬아슬한순간에 예림이가 던진 비수가 채찍을 잘라 내었다. 동시에 얼음 강판을 만들어 펼쳤다. 우희는 그것을 밟고 겨우 다시 거리를 벌렸다.
미친놈, 왜 또 이렇게 빡세?
위화감의 정체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아마, 저놈은 우리 생각을 읽는다. 가끔 생각이랑 몸이 따로 놀 때, 놈의 움직임이 흔들렸다.
놈의 눈을 살핀다. 짐승의 눈은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 있다. 그러나 살기는 없이, 도리어 어딘가 맹한 표정이 음흉한 것을 숨겨 놓고 있는 듯하다.
사냥조 녀석들도 저런 얼굴로 죽였을까. 잠깐 감정이 울컥 올라올 뻔해서 겨우 삼켰다. 대치 중이라 다행이었다.
복수가 아니라 사냥이다. 그렇게 되뇌는 내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 왔다.
그것은 어딘가 익숙한 색의 주사기를 목에 꽂아 넣는 예림이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