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3년 후 5
* * *
"…무슨 일인데요?"
유민하는 눈시울의 붓기가 채 빠지지 않은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딘가 공격적이었다. 항상 밝고 명랑하고 장난스러운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볼 수 없다. 그 대신 그녀 주위를 떠도는 것은 공격성, 예민함, 울분 같이 날카로운 단어들이었다. 그렇게 날카로운 단어들로 치장했지만 도리어 약해 보였다. 유민하는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예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탁 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유민하는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입을 다물고 김예림을 노려보았다.
평소 거의 대화도 하지 않던 둘이었다. 김예림이 일방적으로 유민하를 피해 다녔다.
그리고 당연히 유민하는 알고 있었다. 왜 김예림이 자신을 피하는 것인지. 그래서 더더욱 의외였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와 부탁을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서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다. 유민하는 먼저 용건에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말해요."
김예림은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겨우 입을 열었을 때는 그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선배가 이번 토벌을 포기할 수 있게, 같이 설득해주세요."
김예림은 결국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괴물의 진실. 그 위험을.
그 대신 다른 방법으로 공략을 막으려 했다.
"그걸 지금 저한테 말하는 거예요?"
동료를 잃은 헌터에게 복수를 포기하라고, 위험하니 포기하자고.
싸늘하던 분위기가 더 차갑고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뻔뻔스러운 부탁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김예림은 그 앞에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하지만 억지로 입을 열어 설득을 이어갔다.
"민하 씨가 많이 힘들 거라는 건 알아요. 직접 복수하고 싶다는 것도. 하지만 이번 토벌은 너무 위험하고 불확실해요. 너무 무모한 일이에요."
굳이 진실을 밝힐 것도 없다. 8명으로 S급을 공략한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민하 씨가 납득하지 않으면 선배도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유민하가 흘린 눈물. 그로 인해 도저히 물러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눈물을 도로 삼키지 않는 이상 그 분위기를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윤현수가 김예림이 숨기고 있는 위화감에 대해 눈치 챌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김예림은 반쯤 자포자기 하는 심경으로 유민하를 찾아왔다. 그녀가 해결의 중심에 있다. 유민하만 설득할 수 있다면…
유민하는 김예림을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예림 씨. 예림 씨는 약한 척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그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에요?"
"네?"
당황하는 김예림에게 유민하는 딱딱하게 말을 이어갔다.
"정말 말리고 싶다면, 그냥 가서 억지라도 부리세요. 떼를 쓰던지. 막무가내로 화를 내던가 소리라도 지르세요. 그러면 선배는 결국 받아들였을 거예요.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은 아니니까. 그렇지 않아요?"
김예림은 멍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떼를 쓰라고?
"선배는 그런 사람이에요. 몰라요? 정말 예림 씨가 진심으로 반대하는 거면 일단 믿어줬을 거에요."
"하지만 이유가…"
"이유를 말하건, 말하지 못하건. 정말 절박하게 안된다고 말했으면 진지하게 들었겠죠. 그리고 다른 방법을 찾거나 포기했을 거고요.
김예림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면, 아니면 다시 돌아가서 진심으로 호소했다면 통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예림 씨는 그러지 않았죠?"
"……"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으니까, 그냥 단념하고 저한테 온 거잖아요. 다른 사람을 핑계로 삼아 내세우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김예림은 고개를 가로 젓고 있었다.
"계속 선배 옆에 붙어있으면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진짜 한심한 거 알아요?"
그녀를 비웃는 말에도 김예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유민하는 갑작스럽게 화가 난 듯 얼굴을 일그려뜨렸다.
"재미있는 거 하나 가르쳐줄까요?"
하나도 재미 없다는 듯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유민하는 그런 말을 했다.
"아까 제가 울었던 거. 사실 연기에요."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유민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배는 좋은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 돌보는 걸 좋아하고, 책임지고 싶어하고. 쉽게 친해지고, 친해진 사람을 항상 소중하게 여겨요. 동료가 위험하면 같이 짊어지고, 포기하고 싶다고 하면 달래줘요. 항상 지켜보고, 힘들어하면 제일 먼저 알아차리면서 걱정해주고, 그러면서 알아차리지 못한 척 해주고. 그러면서 내버려두지 못해요."
좋은 사람. 김예림은 잠시 윤현수에 대해 떠올렸다.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고, 지지대가 되어 주려 항상 애쓰는 사람.
"그러니까 선배는 더 힘들었을 거에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죽었으니까, 어쩌면 저보다 더 힘들었을 거고요. 그래도 울 수는 없었겠죠. 그 자리를 이끌어야 할 상황이니까."
그때 아무런 전조도 없이 유민하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만약 거기서 울면 선배는 동질감을 느끼겠죠. 제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록 돌봐주고 싶다고 생각하겠죠."
그런 생각을 했더니 알아서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유민하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치사하죠? 근데 전 치사하게라도 선배 곁에 남을 거에요. 선배가 위험에 몸을 던지면 같이 몸을 던질거고, 아파하면 같이 아파할 거에요. 거짓말을 해서라도 따라갈 거에요. 전 그럴 생각으로 팀에 들어왔어요."
김예림은 유민하의 눈물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이 눈물을 닦아낸 유민하는 김예림을 쏘아보았다.
"입장, 확실하게 정해요. 자꾸 어물거리지 말고, 그때 그때 상황만 모면하지 말고. 저도 짜증나니까."
그 말과 함께 유민하는 김예림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멈추지 않고 걷던 유민하는 충분히 멀어졌다고 느끼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스킬을 이용하여 모습을 숨겼다.
그렇게 숨어버린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 자리도 뺏어가고, 선배 관심도 뺏어가더니, 왜 저딴 모습만 보여주는 거야.
유민하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그래, 울면 선배가 날 봐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냥 울고 있는 모습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 얼른 밖으로 나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고서도 한참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도무지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주호, 양현오, 강예윤, 주민찬.
모두,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조금 까불어도 귀엽다고 웃어주던.
다시 솟아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킨다.
"진짜로 추한 모습 보여주기 싫은 건 누군데…"
*
김예림은 유민하가 떠난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렇게 서있는 채로 가만히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입장을 확실하게 정하라고.
김예림은, 자신은 윤현수에 대해서 어떤 입장에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처음에는 그냥, 항상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는 사람. 계획을 진행할 때 방해가 되고, 나중에는 적으로 돌아서는 사람, 그렇게 생각했다.
회귀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같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곁에 남았다.
그리고 어느새 김예림은 단순히 그에게 보호 받는 선을 넘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적수가 될 지 모르는 서혜은을 가르쳤다. 선배가 죽음의 위기 앞에 섰기 때문에.
언젠가 선배의 여자친구가 될 지 모르는 유민하가 괜히 미워서 점점 거리를 두었다.
알고 있는 회귀 지식들을 전부 망치는 한이 있어도 윤현수가 길드를 떠나지 않도록 잡아두었다.
김예림은 이유도 모른 채 그런 행동들을 반복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하지만 더 이상 그 핑계 뒤에 숨어있을 수 없다. 결국 그녀의 업보가 돌아왔기 때문에. 그 모든 업보가 돌아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했기 때문에.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다치지 않고 끝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 너머에 있다.
김예림은 숨겨두었던 통신기를 꺼냈다.
아주 특정한 상황에, 특정한 목적에만 사용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전원을 켜자 아주 짧은 딜레이 후 곧바로 상대와 연결이 되었다.
처음이군. 통 쓰지를 않길래 괜히 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테오. 부탁할 물건이 있어요."
통신기 너머의 정보상은 짧게 침묵하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말해. 목록에 있는 거면 바로 보내줄 수 있으니까.
김예림은 어떤 단어를 입에 올렸다. 정보상 테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 침묵은 아주 길었다.
직접 사용할 생각인가?
"맞아요. 구할 수 있나요?"
구하는건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뻐꾸기라면 구할 수 있겠죠. 부탁할게요."
김예림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고 좌표를 보냈다. 아마 30분 이내로 물건이 도착할 것이다. 그 유예 기간 동안 일이 터지지 않기를.
결국 김예림에게는 각오가 부족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과하고, 미움을 받을 각오가. 그녀는 그렇게 자조하면서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위험해도, 치사하더라도."
그를 위해서 속죄를 해야 했다.
그녀가 저지른 죄, 저지를 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죄까지도.
*
3시간 후, 괴물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시 개체명 거미 원숭이.
토벌 참여 인원은 8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