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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헌터는 돌아갈 수 없다-36화 (36/55)

〈 36화 〉 쓸모없는 휴일 ­ 3

* * *

어떤 편집증의 산물일까.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도 가면과 전투복을 입고 있는 것은.

김태균은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상대는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완전한 무장 상태에 있었고, 그에 비하면 자신은 완벽한 무방비 상태에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단순한 침묵조차 숨을 옥죄는 고문이 되기 마련이다.

가면을 쓴 남자는 아무런 전조 없이 말했다.

"이번 일에 자네를 기용한 것은."

김태균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입도, 눈도 보이지 않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도 없다. 완전한 기습이었다.

"자네가 이 도시 출신이기 때문이야. 충분히 그 생태를 이해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사령관이라고 불린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찌 자네를 탓하겠나. 다른 곳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것이 원인이거늘. 그쪽은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걸세."

김태균은 사령관의 말에 한시름 걱정을 덜었다. 그렇다. 자신이 문책당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네가 마냥 잘한 것도 아니야. 끝까지 파헤쳐서 약점을 찾아낸 것은 좋네. 하지만 내 충고 하나 하지."

이어지는 말에 찔끔한 김태균은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령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상대의 약점만 알아서 될 일이 아니야. 무슨 장점이, 무슨 무기가 있는지, 어떻게 반격할 것인지에 대해 알아야만 하지."

"새겨듣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멈췄다. 김태균은 가면 뒤의 표정을 상상할 수 없어 불안했다.

대화만 들으면 다정하고 아량이 넓은 것 같지만 그것으로 방심하는 것은 지나치게 멍청한 짓이었다.

사령관이 손을 움직이자 김태균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향한 곳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한 서류였다.

"그래도 보충 멤버를 빠르게 채워 넣는 것은 좋은 판단이었네. 더 이상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이지. 제법 과감한 면도 있군."

"감사합니다. 해당 멤버는 본래 윤현수에게 주어졌을 예정의 장비를 인계받은 후 테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종이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사령관의 손가락이 문득 멈추었다.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움직이지 않던 그의 손이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았다.

"테스트라.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나?"

"네. 최종 편제 전 마지막 테스트를 위해서, 보관 중 탈출한 괴물의 처리를 맡겼습니다. 잠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몇 가지 있었으나 그녀는 충분히 자질을 입증해낸 것으로 판단됩니다."

막힘없는 설명에 사령관은 무언가를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손짓으로 김태균을 가까이 불렀다.

"잠시 이 서류를 볼 수 있겠나."

김태균은 황송해하며 다가가 서류를 읽었다. 사령관은 이 읽는 서류는 헤비 박스의 최고 기밀에 속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기회는 그 값어치에 반비례한다.

그러니 김태균이 그 귀중한 서류를 읽을 시간이 단 3초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쩍, 하고 끈적한 아스팔트를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사령관의 손에서 나는 소리였다.

"한 대는, 감히 자네 실수를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수습하려고 한 알량한 태도 때문일세."

쩍, 하고 도로 통제용 칼라콘이 부숴지는 소리가 났다. 김태균의 턱뼈에서 나는 소리였다.

"두 대는, 보내준 자료도 제대로 읽지 않고 테스트니 뭐니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는 그 안일함 때문이고."

김태균은 충격으로 나뒹구른 직후 다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섰다. 뺨이 불타오르듯 쓰라렸지만 부여잡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사령관은 다시 친절한 목소리로 애를 달래듯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녀는 우리 최고 걸작일세… 테스트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말이네."

사령관의 말에는 어떤 황홀함과 같은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김태균은 뺨과 턱이 아파오건 말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바빴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사령관은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으니 됐네."

그것으로 김태균은 보기 드문 행운아가 되었다.

자기가 죽는 이유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으니까.

*

"야, 밥은 줘야지. 선량한 시민들이 기껏 협조하는데 고맙지도 않냐?"

"할 말은 많은데… 선량한 건 뺍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녀석은 저녁을 배달시켜 주었다. 나 포함해서 4명 몫 전부.

나와 예림, 혜은, 민하는 사건 수습을 마친 후 실버볼 지역 본부로 끌려와 취조를 받는 중이었다.

근무 중이 아닌 때에 움직인 것이라 취조의 형태가 되었지만, 사실상 보고와 다름이 없다. 뭘 봤고 뭘 했는지 상세한 질의응답이 이어졌고 한참 길어지는 와중에 아는 얼굴을 만나 밥을 한 끼 얻어먹게 되었다.

그렇게 겨우 모든 정황 확인이 끝난 후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민하는 어느새 뉘엿거리는 저녁놀을 보며 투덜거렸다.

"진짜, 쉬는 날인데 이게 뭐예요. 선배 탓이에요."

"누가 따라 오래? 지 마음대로 쫓아와 놓고 지랄이야."

"후배는 선배 뒤만 보고 따라가는 거라면서요."

"이럴 때 쓰라고 한 말 아니다."

그래도 내가 양심이 있지. 솔직히 좀 미안하긴 하다.

쉬는 중이건 뭐건 일 터지면 나가는 게 헌터의 본분이기는 한데, 내가 직접 하는 거랑 다른 놈들 끌고 가는 거랑은 또 다른 거라서.

저녁을 안 먹었으면 밥이라도 사줄 텐데, 하고 고민하는 와중 민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선배, 산책이나 한 바퀴 돌래요? 너무 앉아만 있었잖아요."

"아, 그럼 그럴래?"

이 정도로 퉁치면 나야 고맙지.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려는 찰나에 대답이 앞섰다.

"저도 갈게요."

"…저도 갑니다."

결국, 4명 다 움직이게 되었다. 아침에는 생각도 못 했던 대인원이다.

민하는 태평한 표정으로, 예림이는 평소같이 냉랭한 얼굴로, 혜은이는 뭔가 불편한 듯 굳은 표정으로 함께 거리를 걸었다.

그냥 걷기만 하면 심심하니까 애들한테 지도랑 좌표는 외웠는지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이럴 때도 그런 이야기를 할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다.

대신 여기저기서 얻어듣거나 겪어본 일들에 대해 들려주기로 했다.

"충귀종 중에 바퀴벌레랑 똑같이 생긴 거 있거든? 예전에 저기 건물 3층이 뷔페였는데, 그 괴물 하나 들어가서 깽판 치고 나니까 손님 뚝 떨어져서 망했다."

"야, 저거 흔들 다리 보이냐? 저거 한번 끊어졌었거든. 헌터 한 명이 흔들리는 거 신기하다고 마구 흔들다가 그만 멀미가 나서 토하는데, 그게 또 하필 능력이…"

"좀 오래된 도로 보면 삽이랑 포대 담긴 상자 있지? 그게 요즘엔 거의 없는데, 예전에 야수종 중에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면서 똥을 푸지게 싸놓는 놈이 있어서 그거 치우느라…"

가만히 듣고 있던 민하가 입을 열었다.

"선배. 제발 닥쳐요…"

그래서 그냥 걷기로 했다.

어느덧 역이 코앞이었다. 마지막 건널목을 앞두고 육교를 건너는데 어느 곳인지 빛 기둥이 솟아올랐다. 게이트가 완전히 확보되어 도어스토퍼로 고정되었을 때 나오는 빛이었다.

어느새 도시의 정경과 하나가 되어버린,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모습에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너희는 헌터 왜 시작했냐?"

나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 뜬금없는 질문에 다들 당황하길래 그냥 피식 웃고 화제를 넘겼다.

"아니, 대답은 안 해도 되고… 너희랑 나는 세대가 다르잖아."

"저랑 선배 4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나는 10년 했고 너는 2년 했는데, 헌터로서는 다른 세대지."

어리둥절해 하던 민하도 그 말에 겨우 수긍하는 듯했다.

"헤임달이 도입되기 이전이랑 이후랑, 하는 일이 많이 바뀌었잖아. 그래서 사실 지금 헌터랑 예전 헌터는 완전히 다르지."

그 말에 일행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었다.

나는 그제야 문제를 깨닫고 고민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꼰대 같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각오를 다졌다.

"지금 헌터는 전세대 헌터의 계보를 이었다기보다는, 그냥 그동안 쌓인 이미지를 덮어쓴 거야."

그냥 꼰대 소리 좀 듣고 말지.

"강한 각성자들이 무기를 양보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괴물들을 사냥했다. 그것이 헌터의 유래이다. 대충 이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서부터 줄곧 들어왔던 이야기일 것이다. 오직 예림이 혼자만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묘한 눈빛을 했다.

다들 그 시기에는 어린 나이였고 쉘터나 벙커 안에서 숨어 지냈을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망가진 도시 위에서 뒹굴고 있던 나는 그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직접 겪어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이야. 사실은 그냥 그때 헌터들이 죄다 눈깔이 돌아가서 무기도 없이 쫓겨났던 거지."

여태껏 많이 미화된 끝에, 나이 든 사람들도 때로는 잊어버리는 진실.

헌터는 추방자이며 방랑자였다. 괴물을 죽이는데 눈이 멀어 쫓겨난 등신들이었다.

총기는 한정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살아남기도 급급한데 괴물을 죽여 복수하자고 날뛰는 놈들은 그냥 정신이 나간 놈들뿐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소수였고 동시에 문제아였다.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서는 괜히 괴물을 사냥하려다 위기를 몰고 오던 사람,

괴물을 다 찢어 죽이고 말겠다며 뛰쳐나가 구역의 지배자에게 시비를 걸던 사람.

"뒤질거면 제발 좀 혼자 뒤지라고 맨몸으로 쫓겨났지."

강해서 양보하고, 약해서 협동하고. 과거는 그렇게 동화 속 미담처럼 아름답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괴물들에게 복수를 꿈꾸던 놈들은 바깥을 헤맸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협력하여 사람들을, 스스로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헌터와 가드.

지금의 구조는 이상적인 설계가 아닌 과거 사람들의 의지와 선택의 결과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까짓거 필요 없다! 하면서 다들 고집부리면서 결국 나왔는데. 그게 무슨 풍습처럼 내려와서 뭔."

그 당시의 총기는 지금의 무기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형편없었다. 조악한 무기가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된 물건보다 제대로 된 각성자가 더 높은 효율을 냈다.

"거기에 이상하게 심취해서 아예 맨주먹으로 싸운다는 꼰대들도 있었는데 솔직히 보면서 진짜 병신들인가 했지."

"선배…"

"민하야, 닥쳐라."

"선배가 할 말은 아닌데…"

"입 다물랬다."

아무튼 뭐, 그렇게 쫓겨난 놈들도 그냥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제각기 뭉쳐 지내기 시작했다. 죄다 괴팍한 놈들이다 보니 제대로 뭉치지는 못하고, 각기 성향에 맞는 놈들끼리 알게 모르게 같이 움직이고 그랬다.

"근데 그렇게 움직이니까, 진짜로 조금씩 괴물들 둥지도 털어내고, 무슨 터줏대감처럼 자리 차지하던 놈들도 쫓아내고. 되긴 되더라고."

그렇게 조금씩, 도시를 되찾았다.

쉘터에 박혀 있던 놈들도 그제서야 추방자들을 도와 탈환을 도왔다. 그것만으로, 우리 힘만으로, 도시를 되찾고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도시가 재건되었다.

"그렇게 된거니까, 어, 딱 정리하기가 힘든데."

옛날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기는 했는데 딱 잘라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말을 어떻게 맺어야 하냐 이거.

나는 고심 끝에 처음 떠올랐던 생각을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헌터가 많이 미화도 되고 영웅시되니까 착각할 수도 있는데, 헌터라는게 원래 근본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헌터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고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유래란 것은 별 영양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도 말고, 다치지 말고, 적당히 사리면서 하라고."

그건 선배인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렇게 말을 마치고 일행을 돌아보자 다들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말을 대장이 하니까 좀…"

"선배 뭐 잘못 먹었어요?"

이 새끼들이 걱정해줬더니.

그 와중 민하는 문득 눈을 빛내며 철없는 질문을 했다

"그러면 정기 훈련은 좀 줄이면 안 돼요? 그게 제일 힘들고 무리하는 거 같은데."

"그걸 왜 줄여? 지금도 부족한데."

"생각해보니까 물어본 제가 멍청했던 거 같아요."

바로 다시 눈빛이 죽었다.

그 모습에 혜은이가 피식 웃음을 흘리자 민하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괴롭히기 시작한다.

예림이와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건너 들은 것인지, 예림이는 내가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까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사실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던 가드와 헌터가 어떻게 지금처럼 가까운 처지가 되었는지.

해답은 간단했다. 외부 세력의 위협이 내부의 단합을 이끌어낸 것이다.

도시를 탈환하여 복수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던 와중, 헤비 박스가 도시에 접선을 시작했다.

이미 어느 정도 도시 기능을 복구하고 다른 도시와의 교류도 자체적으로 진행 중이었던 만큼 헤비 박스가 요구한 모든 지휘권, 통치권에 대해 강한 반발이 있었다.

그에 대한 헤비 박스의 반응은 간결했다. 저항 세력을 밀어버리는 것.

사고를 위장하여 대부분의 베테랑 헌터와 가드들이 목숨을 잃었다.

정황상 그 범인은 명확했지만 누구도 감히 고발할 수 없었다. 그 사고로 헤비 박스에 도시 방위를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특히 헤임달 시스템의 도입은 그 결정타가 되었다. 어찌보면 지금까지 어느정도 자치권을 지키고 있는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주도권은 헤비 박스 측에 넘어갔지만 헤비 박스는 던전 내 물자들에 대한 우선 매입권과 다른 몇 가지 권리들로 만족하는 듯 했다. 그 이상은 더 큰 반발로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하지만 어제 김태균의 제안은 이전에 헤비 박스가 보여준 행보와는 명백히 달랐다.

좀 더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넓히려는 모습. 나를 영입하려는 것은 그 계획의 일환으로 보였다.

앞으로 찾아올 혼란 속에서 이 어설픈 후배들이 다치지 않고, 상처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이미 한번 마음이 흔들렸다. 비슷한 일이 다시 있다면 이 놈들 옆에 있어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최소한, 같이 있는 동안에 최대한 많이 가르쳐주자.

강해지도록, 더욱 강해지도록.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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