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반갑지 않은 얼굴 3
* * *
건너편에 앉아있는 아이가 빨대를 입에 물고 까딱거리다가 혼이 난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 옆에 있는 아저씨는 앞에 놓인 커피가 사약이라도 되는 것 마냥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째려본다.
조깅복을 입은 뚱뚱한 여자가 프라푸치노를 마시고 쿠키로 입가심한다. 이마에는 땀 한 방울 없다.
일상 속의 풍경들을 보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소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우습고도 친근하다.
멀리서 보아서 그렇다.
다시 가까이 있는 것에 눈을 돌린다면.
이리저리 방황하던 김예림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그 앞에는 서혜은이 말없이 블루베리 라떼를 홀짝이며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느냐, 하는 눈빛으로.
김예림은 무슨 말이라도 꺼내 보려고 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무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녀를 붙잡은 것은 서혜은이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 김예림을 카페로 끌고 간 서혜은은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찾아오고, 반쯤 비우는 동안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김예림은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한없이 길어졌다.
김예림은 서혜은에게 날 선 말을 던져 상처를 입혔다. 그래놓고는 도움을 구했다.
왜 그랬는지 전부 털어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다.
한동안은 말없이 피해 다녔지만 이제는 도망갈 수 없다는 뜻이리라. 마음을 담아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김예림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혜은 씨. 숙제는 요즘 어때요?"
…진심 어린 사과란 그토록 꺼내기 힘든 것이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하지…요. 아니, 알아서 할 거야."
이번에는 서혜은이 잠시 당황한 듯 시선이 흔들렸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부른 게 아니야."
결심이 단단히 선 듯, 서혜은의 목소리와 말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김예림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자신에게 쏟아질 질타를 기다렸다.
"난 다 알고 있어. 너랑 현수… 대장이 무슨 관계인지."
김예림은 당황했다.
뭘 알고 있다는 거지? 나랑 선배가 무슨 관계인데? 그냥 선후배 관계? 아니면?
당황 속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급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어지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다 뺏길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무언가를 설명하기는커녕 혼란을 더해주었다.
한 가지 와 닿는 것은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
생각할 게 많았다. 꼬여가는 변수들이 너무 많았다. 알 수 없게 된 변수들은 더더욱 많았다.
미래 정보를 사용하고 싶어도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도시에 활개 치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현수 옆에 있는 그녀. 그녀를 볼 때마다 생각의 타래가 헝클어지고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유민하.
"민하 씨는."
무의식중에 입술이 열렸다.
"선배의 전 여자친구예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서혜은과 김예림, 둘 다 당황했다.
한 가지 말실수가 있었다. 유민하가 윤현수의 연인이었던 것은 예전 회차였다.
그녀가 겪어온 대부분의 회차에서 그랬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리란 말은 없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수습할 수도 없고 정정할 수도 없다.
"내가 무슨… 멍청한… 빨리 일어나!"
서혜은은 초조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김예림을 잡아끌었다.
"빨리!"
*
정신을 차려보니 윤현수네 집 앞이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런 생각을 머리에 담는 시점에서 대체로 그 고민은 이미 쓸모가 없다. 그냥 계속하던 걸 이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때려치우고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김예림은 서혜은의 등쌀에 떠밀려 도망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차라리 주소를 모른다고 하면 됐을 것을, 예전에 윤현수의 신변 조사를 하며 알아낸 것이 떠올라 대답해 버리는 바람에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차고 말았다.
흐름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애초에 여기에 대체 왜 온 거지? 문을 열고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빨리!"
그 말에 김예림은 저도 모르게 도어벨을 누르고 말았다. 삑 울리는 도어벨 소리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뒤이어 문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생각해보면,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무슨 얼굴을 해야 하는 거지? 지금, 나 무슨 옷을 입고 있었지?
그런 생각이 김예림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와중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배달 왔어요~"
얼어붙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색채는 흐릿해지고 그 윤곽선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알아볼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는 풍경으로.
그런 무정한 풍경 속에서 문이 열린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유민하였다. 무척 편한 옷을 입고 있는.
자기 몸에 딱 맞는 것처럼 편해 보인다. 자기 옷처럼.
아니면 정말 자기 옷이거나.
자기가 입을 옷을 두고 가는 정도의 관계.
그 정도로 빈번하게 오고 가는 관계.
"배달 맞, 어?"
밝은 얼굴로 문을 열던 유민하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는다.
당황스러워?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아?
나만큼?
둘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상대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최악의 가능성과 믿고 싶은 대안을 저울질하면서.
김예림의 마음속에서 점점 그것은 저울질이라기보다 줄다리기에 가까운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생각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무르고, 무르고, 무른다.
그러고도 차마 삼켜내지 못한 질문이 툭 튀어나온다.
"…선배는?"
유민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샤워 중이요."
옆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서혜은은 김예림의 다리가 순간 후들거리는 것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다. 주저앉지도 않았고.
그냥 계속해서 변수, 변화, 알지 못한 것, 놓친 것, 다시 되돌린다면.
그런 생각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단 한 번만.
회귀를.
다시 기회를.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침묵 속의 대치는 한 사람의 난입으로 겨우 끝을 보였다.
"어? 예림 씨랑 혜은이? 여기는 왜 왔대요?"
최지혜가 편한 옷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비닐봉투를 든 채 어리둥절한 눈으로 모두를 쳐다보고 있었다.
*
시가지 사냥팀 4명, 거기에 최지혜까지.
다섯 명이 치킨과 피자, 차가운 캔맥주가 놓인 식탁 하나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윤현수와 최지혜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한 불안감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유민하와 김예림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식은 식어가고 맥주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린다.
그리고 서혜은은 이 모든 상황에 매우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음… 셋이서 마실 거라고 들었는데, 들은 것보다 인원이 불어났네."
먼저 최지혜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민하가 오늘 한잔하자고 하길래 준비해왔는데, 둘도 올 줄 알았으면 더 시킬 걸 그랬네. 둘이 입을 옷도 준비하고. 지금 민하가 입고 있는 거, 내 꺼 빌려준 거거든."
어색한 어조로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하던 최지혜의 시선이 윤현수에게 닿았다.
인상을 팍 쓰며 화를 내는 듯하더니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말을 잇는다.
"나랑 현수는 대충 한 10년? 좀 넘었나? 아무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살았는데, 방도 각방이라 서로 볼 일도 거의 없고, 아무튼 요즘은 얼굴도 못 보다가 오랜만에 봤네. 민하랑 셋이서 다 같이 보자고 하길래 오늘 조금 일찍 퇴근했지. 원래 민하랑 나랑 좀 친했거든."
최지혜와 윤현수가 함께 산다는 대목에서 김예림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가 다시 돌아갔다. 그 작은 움직임에 최지혜가 화들짝 놀라며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서혜은은 괜히 올라오는 소름을 애써 억눌렀다.
"아, 아무튼. 기왕 모였으니까 같이 먹자. 양은 조금 부족할 텐데. 어."
"내가 뭐라도 좀 해올게."
기다렸다는 듯이 윤현수가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최지혜는 그런 모습을 보고 또다시 와락 얼굴을 구겼다가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 포장을 뜯었다.
"음, 먼저 좀 먹고 있자. 예림 씨도 좀 드세요. 혜은아, 넌 맥주 말고 여기 음료수 먹고…."
최지혜가 다그치자 다들 억지로라도 먹는 시늉을 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은 채로 답답한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
옆에서 본다면 종교적인 금언 기간으로 보였으리라.
"민하씨는."
침묵의 중심에서 김예림이 입을 열었다.
"자주 왔나 봐요? 선배네 집에."
조심스럽고 완곡한 질문이었다. 호기심과 망설임이 섞여 흐릿해진 질문.
유민하는 그 질문의 의도를 또렷하게 읽어냈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고요. 선배가 부를 때만 가끔. 제가 놀러 온다고 할 때도 있고."
그리고 의도적으로 흐릿한 대답을 내놓았다.
"단둘이 봤던 건, 글쎄요. 어땠더라?"
흐릿하고 음흉한 대답이었다.
"아니, 아니 없었을걸? 그렇지? 그리고 현수가 부르기는 무슨. 거의 내가 불렀잖아. 맞지?"
"…맞아요. 그래도 지혜 언니도 저한테는 선배뻘이잖아요? 그럼 선배가 부른 거 맞죠."
최지혜가 어떻게든 수습하려 애를 썼고 유민하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그 중재에 맞춰주었다.
하지만 공기는 이미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농도가 짙고 무겁다.
이내 윤현수가 안줏거리를 요리해왔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도록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뭐가 넘어가지도, 나오지도 않는 어색한 자리가 겨우 마무리된 것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서혜은은 내내 벌벌 떠느라 입으로 뭐가 들어가는지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의 안이함이 현세에 지옥을 불렀구나.
아니, 반쯤은 맞게 추측하기는 했다. 실제로 유민하는 윤현수네 집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머리에 스팀이 올라서, 대책도 없이 김예림을 끌고 윤현수네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것이 지금의 사태를 낳은 것이다.
죄책감에 질려 눈치를 살피던 서혜은의 옆을 김예림이 걸어 지나갔다.
그리고 스치듯이 말했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는 몰라도 현수 선배랑 저,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네? 네."
서혜은은 버벅이며 겨우 대답했지만 김예림은 들은 척도 없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서혜은은 그제서야 김예림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그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김예림의 말은 하나의 대답이었다. 서혜은이 '너와 윤현수가 무슨 관계인지 안다'라는 말에 뒤늦게 대답을 준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사귀는 중이 아니었다고? 아니면, '이제는'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뜻일까?
말의 의미는 이토록 불분명했지만, 말의 의도는 선명했다.
이제 더는 괜히 참견하지 마세요.
"네…"
저도 모르게 또다시 대답을 중얼거리는 서혜은의 머리에 퍼뜩 의문이 솟았다.
유민하와 김예림 중에 승리, 음, 우위에 선 것은 유민하였다.
그렇다면 김예림과 윤현수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기 위해 유민하가 음해 공작을 펼쳤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서혜은은 또다시 깊은 자기 혐오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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