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내 댓글이 의견란에 올라가자, 쉼 없이 갱신되던 의견란이 약 3초간 정적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 소식지 위에 눈물을 흩뿌리던 사람도, 이를 악물고 대공과 나를 공격하던 사람도, 우리를 옹호하던 사람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뚝 멈췄다.
‘이 정도였냐고.’
이안의 황위 계승권은 확실히 예민한 소재였다.
모두가 인지하고는 있지만 쉬쉬하며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금칙어 같은 거랄까.
그러니 나는 소식지 한가운데 폭탄을 냅다 투척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턱을 괴고 흥미롭게 기다린 지 수십 초, 다시금 슬금슬금 의견란이 갱신되기 시작했다.
-아니 뭐, 클라우드 대공이 황위 계승에 관심 없는 건 다들 아는 사실 아닌가요?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성을 받아 나온 게 왜겠어요.
-원래 불온 세력도 거사 전까지는 충성하는 척하는 법이죠.
-지금 대공을 불온 세력에 빗대신 건가요? 제국법이 무섭지도 않으신가 봐요.
-누가 대공이 그렇대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비유도 몰라요?
-방금 그거 따지자면 황족 능멸죄예요.
-정말 황위 계승에 관심이 없으면 진작에 계승 포기 선언을 했겠죠. 만일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여태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계승권 포기만 하면 될 일을 참 복잡하게 끌고 가네요.
-그러게요.
-폐하도 참, 언제까지 싸고도실 건지….
-계승권 포기가 어디 쉽나요? 황족의 권리예요! 그걸 남이 왜 포기하라 마라인가요?
-어차피 황제 폐하도 루이사 황녀가 황위를 계승할 걸 알고 계실 텐데요?
-그래서 대공이 위협이 안 된다고요? 막말로 루이사 황녀를 제외하면 클라우드 대공뿐인데,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언제 싸늘하게 정적이 흘렀냐는 듯 1초에 서너 개씩 의견이 다닥다닥 올라오기 시작했다.
활자로도 아수라장이 될 수 있다는 게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근데 이번 일은 꼭 황위 계승권 문제는 아니지 않나? 갑자기 왜 물 흐려서 감상 방해하는지….
-제 말이요.
-그쪽이나 물 흐리지 마세요.
몇몇 선을 넘는 의견들을 보며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아리아 소식지가 IP 추적이 안 되어서 망정이지, 너희는 21세기 SNS에서 이랬으면 집에 경찰들 들이닥쳤다.’
아리아 소식지의 또 다른 셀링 포인트는, 모든 것이 익명으로 돌아간다는 데 있었다.
의견란에 글을 쓴다고 해도 그게 누구인지 결코 추적할 수 없었다.
그야, 종이에 글을 써서 올리는 순간 흔적조차 남지 않고 증거가 사라지니까.
그러니 여기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없고, 그렇다고 황제가 아리아 소식지를 구독하는 모든 이를 잡아들이기엔 제국 귀족의 구 할이 이 소식지를 구독하고 있었다.
아리아 소식지의 편집장은 나한테나 2.5초의 비둘기지, 남들에겐 정체불명의 신출귀몰한 존재였으니까.
다시 말해 아리아 소식지는 절대 추적할 수 없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에, 귀족들도 앞뒤 가리지 않고 막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일이 머리를 잘 썼단 말이지.’
아주 잔머리가 팽팽 돌아가.
“흐으음….”
턱을 괸 채 올라오는 글을 훑던 내가 다시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래, 이 의견란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나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 역시 내 신분을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공 하는 걸 보면 황위 계승권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는 안 보이던데요. 제가 알기로는 이전에 폐하께 몇 번 청도 올렸다던데….
-어머, 이건 비밀인가? 아무튼 계승권 포기를 못 한 게 정말 대공의 의지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은근슬쩍 툭, 던진 정보에 의견란에 다시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번엔 얼마 가지 못했다.
다시금 내가 던진 정보의 진위 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가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냐는 둥, 그럼 황제가 대공의 계승권 포기를 막고 있는 거냐는 둥, 대공 쪽 사람이 일부러 물을 흐리는 게 아니냐는 둥, 이래서 익명 정보는 걸러야 한다는 둥 온갖 이야기가 오갔다.
갈수록 엉망진창이 되는 의견란을 감상하다가 소식지를 탁 덮고 일어섰다.
“이 정도면 충분해.”
미끼는 제대로 던졌다.
언제 미끼를 무나 보자고.
***
그리고 반응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황성으로부터 서신이 하나 도착했다.
당장 두 사람 다 황성으로 입궁하라는 황제의 으름장이 적힌 서신이었다.
얼핏 품위 넘치는 고상한 초대장이었지만,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볼 때 엘리시아는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게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다.’
아침 일찍 도착한 서신을 팔랑팔랑 흔들며 히죽 웃었다.
옆에서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침대를 정리하던 비비가 움찔거렸다.
“저어… 마님?”
“응? 무슨 일이니?”
“그, 혹시… 나쁜 생각 하시는 건 아니죠? 아니, 마님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구요.”
또 권모술수를 부리는 음침한 악당 같은 표정을 지었구나, 내가.
이놈의 표정 관리는 몇 달이 지나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서신을 덮고 뻔뻔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별거 아니란다. 황제 폐하께서 나랑 대공을 황성까지 부르셨지 뭐니. 오랜만에 폐하를 만나 뵐 생각을 하니까 조금 떨려서.”
“핫, 황성에서 온 서신이라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군요! 또 함께 초대를 받으신 거예요?”
응, 정확히는 초대가 아니라 호출이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로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바로 입궁하라고 하셨으니 서둘러 준비해야겠구나. 적당한 옷을 준비해 주렴. 아, 너무 화려한 옷은 말고.”
따지자면 혼나러 가는 건데 너무 옷이 화려하면 못 쓰지.
“네, 마님. 곧 준비할게요!”
후다닥 달려가는 비비를 지켜보다가 마저 쭉 기지개를 켰다.
아, 혼나러 가기 좋은 날씨다.
***
“…아주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이안과 함께 태양궁의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엘리시아는 이미 이마를 짚고 있었다.
평소의 호탕한 웃음은 어디로 가고 아주 골머리가 썩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내가 너무했나, 하는 생각이 살짝 고개를 들었지만 금방 털어냈다.
나와 이안이 맞은편에 앉아 황제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주 부부가 쌍으로 작당을 했군, 작당을. 언제부터 그렇게 손발이 잘 맞았나? 응?”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이며 이안을 곁눈질했다.
그는 황제의 서신을 받은 직후부터 응접실에 들어오기까지, 내게 관련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건대 이미 내가 벌인 일인 줄 알면서도 말을 아끼는 게 분명했다.
‘조찬 시간에 대놓고 얘기를 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사실 이안이라면 소식지가 발행된 아침부터 알았을 것이다.
우리 둘의 침묵을 용케 긍정으로 알아들은 황제가 가슴을 팡팡 쳤다.
“하이고.”
다시 두통이 밀려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른 그녀가 말했다.
“그래, 뭘 의도했는지는 알겠어. 머리를 잘 쓴 걸 보니 이 기발하고 발칙한 발상은 대공비로부터 나왔을 테고.”
예리하셔라.
나는 황제를 향해 뻔뻔하게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그녀의 표정이 아연해지는 것이 보였다.
“허어….”
내 작전은 간단했다.
황제가 허락을 해 주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선수를 쳐 버리면 그만이었다.
여론이라 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되는 법이니까.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는 일도, 공론화를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나면 반드시 반응이 오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괜히 트X터나 네이X판에 글을 올리는 게 아니란 말이야.
‘아리아 소식지가 저렇게 들썩이는데 황제라고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
사실 반쯤은 도박처럼 시도한 건데, 이렇게 반응이 온 걸 보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허락을 안 해 주기로서니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인단 말이지. 응?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녀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안.”
“예, 폐하.”
“네가 황위를 계승할 의지가 전혀 없다고 해도, 이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이 황위 계승권이 뭘 의미하는지 네가 정녕 모르고 있진 않을 것 아니냐.”
황위 계승권이란, 고귀한 황족의 혈통임을 의미하는 아주 직접적인 증거였다.
레반트 제국법상 방계는 결코 황위 계승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로열 블러드의 증명이 되며, 권력이 된다.
그리고 황제는 이안에게서 황위 계승권을 거둬 가지 않음으로써, 비록 그가 황비 태생이라 한들 다른 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직계 황족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로 인해 이안은 몇몇 황제파에게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는 위험 인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보다 복잡한 이해관계의 문제였다.
“…….”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굳게 다물렸던 이안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