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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89)화 (89/91)

89화.

잠깐 버퍼링이 걸렸다.

그의 발음이 나쁘거나 내 귀가 안 들린 것도 아닌데 말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스르르 흘러내리는 스푼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지금 저를 걱정하신… 건가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곧장 평이한 대답이 돌아왔다.

도리어 당황스러움에 말문이 막힌 건 나였다.

이안이 내가 다친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를 향한 경고 대신 걱정이 날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내 앞의 수프 접시로 황급히 시선을 고정했다.

천천히 식어가고 있는 수프에서는 이제 김이 올라오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웠다.

‘뭐야, 진짜?’

오랫동안 애꿎은 스푼만 꾸욱 쥐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조금 친절해졌다고 휘둘리면 안 된다고!

고개를 불쑥 들고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아무튼, 대공께서는 황위 계승권 포기를 생각하고 있으시다 이거죠?”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요. 구태여 제가 가지고 있을 필요 없으니까요.”

이안은 결코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비단 엘리시아와의 관계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안은 그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비인간적인 황비의 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황비가 자신의 업을 돌려받아 죽는 순간 그는 결심했다.

결코 황비가 바라던 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황위를 이을 리가 없지.’

게다가 이안에게 황의 계승권이 주는 권력은 그다지 매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생각에 잠긴 채 수프를 젓던 내가 확인차 물었다.

“그럼 대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이 일에 참견해도 되는 거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지긋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부인께서는 대공비이십니다.”

“…….”

“이 일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대공가의 일원이니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어째 허락도 참 이안 클라우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빙긋 웃었다.

“좋아요, 나만 믿어요.”

***

식사가 끝난 직후 방으로 올라와 보석함에 넣어 둔 붉은 루비 반지를 꺼냈다.

이건 내가 카일을 반 협박한 이후로 건네받은 반지였다.

그는 내게 이 반지를 끼고 부르면 총알처럼 달려오겠다며 온갖 아부에 아부를 곁들여 말했다.

그 성능을 시험해 볼 차례였다.

‘그러고 보니 카일은 오늘 이안 명령으로 북부에 간다고 했는데.’

얼마나 일찍 오려나.

반지를 검지에 끼우고 원을 그리듯 보석을 세 번 매만졌다.

“카일, 이리 좀 와 봐야겠네.”

그리고 1초, 2초, 3….

“부르셨습니까, 대공비 전하?”

눈앞이 번쩍하는 효과와 함께 카일이 로브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와우.”

정확히 2.5초 걸렸어.

감탄하던 내가 큼큼 헛기침했다.

“그래, 자네가 바쁜데 부른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

“당연히 정신 나가게 바빴… 아니, 그래도 대공비 전하의 부름인데 무조건 와야죠! 대륙 반대편에 있어도 왔을 겁니다! 암요~”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리려다가 손바닥을 삭삭 비벼 대는 꼴이 간드러졌다.

역시 오늘도 어김없이 저세상 아부 실력이구나.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조금 탄식이 섞인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다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일세. 다음 주 아리아 소식지 1면에 실을 글은 정했는가?”

“아니요, 어째 이번 주엔 이렇다 할 사건이 없지 뭡니까. 평소처럼 적당히 자극적인 소재나 써먹어 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신나서 주절거리던 카일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그으… 그건 왜 물으십니까?”

왜 묻겠냐.

씨익 미소 지었다.

“잘됐군. 그럼 1면에 후속 칼럼을 하나 싣지.”

“후속 칼럼이요?”

카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가끔 볼륨이 큰 사건은 후속 칼럼을 내긴 합니다만… 어떤 후속 칼럼을 원하시는데요?”

“내가 원하는 게 뭐겠나?”

“설마….”

“이리 와 보게.”

한쪽 입꼬리를 보란 듯이 비죽 올리며 그에게 손짓했다.

카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게 슬그머니 다가와 귀를 가져다 댔다.

나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굳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곤소곤.

이윽고 카일의 눈이 커졌다.

머뭇거리며 내게서 떨어진 그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물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대공비 전하, 그거 완전 소설….”

“로저 공작과 내 얘기는 잘도 소설처럼 쓰더만.”

“크흠흠! 그럼요~ 소설 좋죠~”

카일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그런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훑다가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아무튼, 내 말 잘 알았지? 잘 부탁하네.”

내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

돌아온 월요일.

새로 발행된 아리아 소식지 1면에는 요란한 제목의 글 하나가 실렸다.

<후속: 대공과 대공비, 검은 손아귀에도 고고히 빛나는 사랑!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위협하는 세력은 누구?>

소식지를 펼쳐 든 내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제목 좋고.

<…지난 휴양지에서의 사건으로 대공비는 큰 부상을 입었다. 무려 사흘이나 눈을 뜨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필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믿을 만한 정보원에 의하면, 클라우드 대공은 그날 이후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아, 안타까운 세기의 연인이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은 언제쯤 악의 세력에게서 자유로워져 사랑의 랑데부를 이룩하러 갈 것인가?

부디 그날까지 지치지 말고 서로 사랑하길! 아무도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기를!>

적당한 호들갑과 과장을 섞어 써 내려간 본문의 내용은 제목보다 더 만족스러웠다.

눈물로 지새운 밤이니 사랑의 랑데부니 하는 건 전부 다 거짓부렁이지만.

모르고 볼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이 아리아 소식지의 능청스러움과 과장법이 꼭 카일의 말투와 닮아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입을 비죽이며 글을 읽어 내렸다.

<또한 이 아리아 소식지의 필자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번 습격은 대공을 견제하기 위한 세력의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황가의 단란한 가족 여행을 방해하려 든 일부 세력의 어리석음에 필자는 아주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그 밑으로 이어진 내용은 사실상 주어만 없을 뿐, 노골적으로 몇몇 황제파 귀족을 저격하는 내용이나 다름없었다.

‘카일 말대로 배후가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괜히 황제파라고 명시했다가는 아리아 소식지는 물론이고 우리 쪽한테도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소식지를 보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대충 흘려만 줘도 허겁지겁 떡밥을 주워 먹기 바쁠 게 분명했다.

그런 내 예상이 틀리지 않듯이 이미 의견란은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글들로 가득했다.

-어머… 그 얼음 대공이 밤낮 간호를 했다니. 얼마나 심각했던 걸까요?

-야시장에서 데이트하다가 칼을 맞았다잖아요. 크게 다쳤겠죠. 어쩐지 대공비가 그 이후로 안 보인다 했는데….

-너무 불쌍해요.

응, 일부러 안 나갔어.

-솔직히 두 사람이 뭘 잘못했나요? 좀 좋다는데 놔두지!

-마음 아파요.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대공비가 무슨 죄임? 아니, 솔직히 이거 황제파 소행인 거 모르는 사람들도 있나?

-정작 황제 폐하께서는 대공을 눈에 띄게 귀애하시는데, 황제파는 누구에게 충성하는 걸까요?

-그들은 황권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거죠. 큰일 하는 사람들이 황제 폐하의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 되겠습니까?

-내 말이 그 말. 사이가 좋다고 대공이 황녀의 계승에 위협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분 모친께서 하신 일을 벌써 잊으셨나 보네.

-레반트 제국은 연좌제 폐지 국가인데요.

-이게 황제파 소행이라는 건 억측이죠. 본문에도 그런 얘기 없는데요?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보세요?

더 싸워라, 더 싸워.

팝콘 대신 깃펜 끝을 씹어가며 흥미진진하게 1초 간격으로 올라오는 글을 구경했다.

그 와중에는 다른 의미로 불만을 표하는 의견들도 있었다.

-근데 다 떠나서, 이게 뭐라고 후속 칼럼까지 나오는 거예요? 남의 사랑 얘기 안 궁금한데.

-아리아 소식지 매수했나….

-어머, 왜들 그러세요. 저는 재밌기만 한데. 솔직히 염정소설 같잖아요.

-요즘 제국에서 제일 재밌는 커플 아니에요?

-근데 그럼 로저 공작은 뭐예요?

-눈치 챙기세요.

중간에 로저 공작 너, 가만 안 둔다.

“…흐음.”

간간이 대공과 나를 공격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절절한 사랑 이야기에 감동한 듯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다.

다만 그 소수의 의견이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원래 까와 빠를 전부 미치게 해야 진정한 셀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부정적인 댓글은 가뿐히 무시하고 깃펜을 들어 올렸다.

사실, 후속 기사 내용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필요한 건 나와 이안을 향한 관심과 동정의 시선이었을 뿐.

‘충분해.’

무대는 준비됐고, 내겐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근데 사실, 이건 전부 대공이 아직 가지고 있는 황위 계승권 때문 아닌가요?

여론 조작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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