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정말 말하러 간 거야?
덩그러니 서 있던 내가 슬그머니 거실로 나갔을 땐, 이안 앞까지 쪼르르 달려간 비비가 이미 말을 전하고 있었다.
쟤는 평소에 이안이랑 마주칠 일도 없으면서 뭐 이런 일을 바로 미주알고주알 전하는 건데?
그사이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때 고개를 든 이안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왜, 뭐.’
지난 일주일 동안 필사적으로 이안을 피해 다녀서 그런지, 먼 거리에서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어쩐지 긴장됐다.
이안이 물었다.
“불꽃, 보고 싶으십니까?”
“네…?”
슬쩍 비비를 바라보자 이안의 옆에서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이고 있었다.
‘얼른 그렇다고 하세요!’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못 살아, 진짜.
“그게 이 지역 명물이라고 해서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나가 볼 생각은 있는데….”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벗어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가죠, 불꽃 보러.”
이렇게 바로?
“아니, 대공은 꼭 가지 않으셔도….”
“잘됐네요! 이리 오세요, 마님!”
이안의 선선한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색이 된 비비는 나를 다시 침실로 이끌었다.
아주 죽이 척척 맞았다.
덕분에 나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비비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되돌아왔다.
“금방 치장을 도와드릴게요!”
비비는 준비해 둔 시폰 드레스를 입혀 주고, 그 위에 진주 장식이 달린 연하늘색 파나마 모자까지 씌워 준 뒤에야 만족스럽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사실 이게 제 야심작이라 마지막 날까지 아껴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네요. 오늘 같은 데이트에 딱이에요!”
어쩐지 뿌듯함을 넘어 보람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안이랑 나갈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막막한데.
비비는 나와 이안이 정말 연애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적극적이다 못해 열정이 넘쳤다.
그녀를 착잡하게 보다가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뭐, 그래도… 마음에 드네.’
연하늘색의 시폰 원피스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닷물을 머금은 것처럼 색이 짙어졌다. 어깨는 오프숄더로 하늘하늘한 시스루 소매가 달려 있었고, 뒤에서 끈으로 묶어 허리를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눈에 띄게 화려하진 않아서 이걸 입고 나가면 얼핏 돈 많은 평민 정도로 보일 것 같았다.
‘비비, 처음부터 내 나들이를 계획하고 있었군.’
내가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사이, 마지막으로 굽이 낮은 오픈토 슈즈를 신겨 준 비비가 방싯 웃었다.
“오늘은 많이 걸으셔야 할 테니까, 편한 신발을 신고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렇게 좋아하는데 초를 치기도 민망했다.
결국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고마워, 비비.”
“그럼 멋진 데이트 보내고 오세요!”
***
야시장은 별궁에서 마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평민처럼 차려입었는데 마차를 타고 입장할 수는 없었으므로, 적당히 근처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야시장의 입구에 다다른 나는 탄성을 뱉었다.
“우와….”
거리가 온통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했다. 얇은 끈을 이용해 공중에 매단 유리 조명이 마치 낮게 깔린 별자리처럼 아롱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친구, 연인과 함께 와글거리며 지나다녔다.
‘사실 딱히 기대 안 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이래서 황제가 이곳에 도착한 첫날 내게 야시장 이야기를 꺼냈던 모양이다.
나는 출발 전 심드렁했던 태도도 잊고 눈이 잔뜩 커져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옆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이안이 말했다.
“턱 떨어지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런 지적은 안 해 줘도 괜찮아요.”
그를 흘겨보며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처음 보는 광경에 잔뜩 흥분한 나와 달리 이안은 여느 때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를 흘끗 곁눈질하고서 물었다.
“대…, 당신은 별로 신기하지 않나 봐요?”
“한 번 와 본 적 있습니다. 어릴 때요.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군요. 이 조명도 그대로입니다. 그때보다 낮아진 것 같지만.”
이안이 짧게 위쪽을 둘러보고선 말했다.
“어릴 때 와 본 거라면 조명이 낮아진 게 아니라 당신이 키가 큰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거기까진 생각 못했다는 말투였다.
“그때도 황제… 아니, 그분이랑 오셨어요?”
“…네.”
찍었는데 맞았군.
“생각보다 두 분이 어릴 땐 자주 어울리셨나 봐요.”
모르는 척 은근히 떠본 질문에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라리 입을 닫을지언정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참 이안다웠다.
‘이안이 본격적으로 엘리시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건 열 살 생일 이후였으니까, 엘리시아와 함께 와 보았다면 그 전이겠지.’
이 무심한 인간이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은 걸 보면 제법 이곳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엘리시아 황제가 나더러 ‘이안은 성정이 무르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한 번 와 보셨다면 더 잘 알겠네요. 그럼 오늘은 안내 좀 해 주세요.”
나는 어색하던 것도 잊고 뻔뻔하게 그에게 요구했다.
이미 와 버린 걸 어쩌겠는가.
야시장도 한껏 둘러보고 불꽃놀이도 보고 가야지.
고개를 돌려 날 가만 쳐다보던 이안이 평이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잡으시죠. 사람이 많아 길을 잃으면 곤란하실 테니까.”
머뭇거리던 내가 슬그머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안은 해변에서처럼 내 손을 얽어 잡아 손깍지를 단단하게 끼었다.
내 몸이 움찔했다.
“안 잡아먹습니다.”
얽힌 손을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본 그가 인파 사이를 걸어갔다.
야시장답게 가게는 대부분 좌판이나 천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집에서 만든 잼을 팔러 나온 사람도 있었고, 공예품을 파는 사람과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도 있었다.
인파 사이에는 좌판 상인과 가격 흥정을 하는 손님들도 더러 보였다.
“거기 새댁! 이거 보고 가.”
이리저리 둘러보며 야시장을 걷고 있는데 한 상인이 손짓을 하며 우리를 불렀다.
“…혹시 저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럼 여기 새댁이랑 신랑 말고 또 있어?”
얼떨떨하게 나를 콕 집어 가리키자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유, 빨리 와 봐. 추천해 주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그래.”
호객을 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안을 슬쩍 쳐다보자 그는 원하면 가 보라는 듯이 눈썹을 들썩였다.
결국 그를 이끌고 천천히 좌판으로 다가갔다.
상인이 팔고 있는 건 형형색색의 실팔찌였다.
여러 색깔의 실을 엮어 만든 팔찌에 보석이나 비즈 대신 조개나 소라 껍데기를 장식으로 달아 놓은 것이었다.
‘대학 축제 때나 보던 실팔찌를 여기서도 파는구나.’
“신혼부부지? 그럼 이거 하나 사 가. 이게 인연이 끊어지지 않게 해 준다는 백조개로 만든 팔찌거든.”
“백조개요?”
“어머, 모르는 거 보니까 이쪽 사람이 아니구나? 이 지역 바닷가에는 그런 전설이 있거든~ 새하얀 백조개 껍데기를 나눠 가진 연인은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는!”
“아하.”
영혼 없는 탄성을 뱉었다.
여기도 신빙성 없는 미신으로 장사해 먹는 건 똑같군.
‘이런 이야기 하나쯤은 있어 줘야 휴양지지.’
못 이기는 척 푸른색 실과 보라색 실이 엮인 팔찌를 하나 들어 살펴보았다.
미신이나 전설 같은 건 차치하고 자세히 보니 아기자기한 게 귀엽긴 했다.
‘마음에 들긴 하는데….’
이안을 슬쩍 보고 내려놓았다.
이 인간이랑 나눠 낄 일도 없고. 쓸데없이 살 이유는 없지.
보나 마나 또 ‘부인께서는 이런 미신을 믿으십니까?’ 하면서 초나 칠 게 뻔했다.
“고맙지만 되었어요, 구경은 잘….”
“얼맙니까?”
가볍게 거절하고 좌판을 떠나려는데, 내 옆에서 팔찌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이안이 상인에게 물었다.
내 눈이 동그래졌다.
“…사게요?”
그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문제 있습니까?”
“이런 거 안 좋아하잖아요.”
이런 건 질색하는 인간이 갑자기 왜.
얼떨떨한 물음에 그는 도리어 무던한 낯으로 대답했다.
“부인께서 이런 곳에서는 적당히 협조하며 기분 내는 데 동참하는 게 좋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긴 했….”
“어차피 저번에 부인과 같이 맞춘 브로치도 있고요. 장신구가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그건, 네….”
단숨에 말을 마친 이안은 그렇지 않냐는 듯 도리어 눈썹까지 들썩여 보였다.
쓸데없이 반박할 수도 없게 이럴 때만 말을 잘했다.
내가 얼이 나가 있는 사이 값을 지불하고 상인에게서 한 쌍의 실팔찌를 건네받은 이안이 손을 까딱였다.
“손목,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