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예상은 했지만….’
단호한 것을 넘어 멋쩍을 정도로 칼같은 대답이었다.
이 시기의 이안이 다이아나에 대한 감정을 깨우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한 태도였다.
‘다이아나는 너 때문에 도망치듯 떠났는데, 인간아!’
머리를 꿍,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니라니…. 그분이랑 전에는 어떤 사이셨는데요?”
내 물음에 이안이 멈칫했다.
그가 잠시의 간극 후 대답했다.
“…소꿉친구입니다.”
“소꿉친구인데 안 보고 싶으세요?”
이안과 다이아나가 마주치면 안 되는 것과 별개로, 만날 생각조차 없다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이아나랑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보고 싶지 않을 수가 있어.
그러나 정작 이안은 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아니, 소꿉친구라면서….”
너는 정도 없냐.
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한편 그런 날 빤히 응시하던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신경 쓰십니까?”
“네? 뭐가요?”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인다는 듯이 골몰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잠깐 입을 달싹이다 대답했다.
“…그냥 물어본 건데요?”
“저번에도 말한 것 같은데 부인은 거짓말에 그리 소질이 없으십니다.”
아니 근데 이게 진짜.
단호하게 말하는 이안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훑어보았다.
한편,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나직이 내뱉었다.
“다이아나 로렌스와는 사적인 감정이 없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의 말에 내가 멈칫하며 그 자리에서 굳었다.
수 초가 지난 후에야 머뭇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다이아, 아니, 로렌스 영애 이야기인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전 바보가 아닌데요.”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답이 돌아왔다.
“아….”
그러고 보니 다이아나가 이안의 결혼 소식을 알고 도망치듯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 오래도록 이안의 주변을 맴돌았다는 건 알 사람은 전부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걸 잊고 있었네.’
내가 이안과 다이아나 사이에 관해 신경을 쓰는 건 맞지만, 따지자면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 의미였다.
내가 한 박자 느리게 말했다.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대공과 로렌스 영애가 워낙 친했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이 기회에 만나고 싶어 하시진 않을까 여쭌 것뿐이니까.”
나름대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안의 눈초리를 보니 씨알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짜라고, 이 인간아.’
물론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금은 내가 막을 거지만.
이안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새로운 화제를 꺼내려는 생각은 없었으므로 우리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철썩, 쏴아아.
다시금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이 입을 달싹인 건 수십 초, 어쩌면 몇 분이 지난 뒤였다.
“혹 걱정을 하시는 거라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걱정이 아니라….”
무어라 정정을 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지금 이 인간에게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아직 사람이 덜 돼서, 다이아나를 마주쳤다간 일이 어떻게 튈지 모르니 난 우리 아기 강아지 다이아나를 지켜 주려고 한단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편, 나를 진득하니 바라보던 그가 느리게 말을 끝마쳤다.
“네, 그래도 신경 쓰지 마시라고 말해 두는 겁니다. 다이아나 로렌스와는 어린 시절 친구로서 가까이 지냈던 사이일 뿐이고.”
“…….”
“지금 제가 결혼한 사람은 부인이니까요.”
평소와 다름없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툭 내뱉고선 그가 다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반쯤 벌어져 있던 입이 꾹 다물렸다.
‘…응?’
구태여 다이아나에게 사감이 없음을 꾸역꾸역 어필하는 모습이 단호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답 없는 인간을 보며 속으로 이를 박박 갈거나, 정신을 차리라고 등짝을 한 대 쳐 주거나,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겠다며 다짐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게 맞는 반응이었다.
‘왜….’
손을 들어 슬그머니 입을 틀어막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데…?’
***
별궁에서의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렀다.
명목상 황녀의 보호를 위해 동행했다고 하지만, 황녀는 나 없이도 홀로 기사를 동행한 채 이리저리 잘 쏘다니곤 했다.
황제 부부는 별궁에 오기 전에 언질한 대로 별궁에 머무는 일주일 내내 지방 영주들의 성을 방문하고, 남부 상단의 책임자들을 만나 대거리를 하느라 바빴다.
자연히 이안과 나는 첫날에 짐작한 대로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특히 나는 가끔 황녀가 부를 때 두어 시간쯤 그녀와 어울려 주거나, 매일 저녁 만찬 시간에 황제 내외를 마주하는 것 빼고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처음엔 가시방석이었고 이틀째에는 눈치가 보였으며 사흘쯤 되자 슬슬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황제도 이럴 줄 알고 부른 거겠지, 뭐.
아니라면 유감이고.
그렇게 이 환상적인 남부 휴양지에서 사흘 만에 적응을 완료하고 빈둥거리다 보니 어느덧 출발 전날이 되었다.
“마님! 오늘은 이 원피스를 입을까요?”
만찬을 먹고 돌아온 직후, 일주일 새 볼이 빵실해진 비비가 캐리어에서 연하늘색 시폰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이곳에서 끝내주는 휴가를 즐긴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저의 사용인들도 나 못지않은 휴가를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하던 청소나 빨래에서 자유로워진 데다가 나와 이안도 별다른 스케줄이 없어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비 손에 들린 시폰 원피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원피스가 예쁘긴 하다만. 방금 저녁을 먹고 와서 다시 나갈 일이 없을 텐데? 잠옷으로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니?”
내 말에 비비는 당치도 않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마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당연히 오늘은 나가셔야죠!”
내가 왜…?
“아이참, 여행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리고 이 근처에 있다던 야시장, 한 번도 안 가 보셨죠?”
“음? 아.”
뒤늦게 생각이 났다.
황제가 첫날에 그랬었지. 근처의 야시장에 볼거리가 많다고.
‘하지만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딱히 나갈 생각이 안 드는걸.’
내 시큰둥함을 알아차린 비비가 일부러 더 과장되게 말했다.
“제가 주워 들었는데, 오늘 거기서 불꽃놀이를 한대요! 돌아가기 전 일정으로는 제격 아니겠어요?”
“불꽃놀이…?”
내 귀가 쫑긋 솟았다.
야시장에는 딱히 흥미가 없지만 불꽃놀이는 제법 관심이 생겼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망이 좋으니 잘하면 여기서도 볼 수는 있겠지만….’
역시 불꽃놀이는 가까이서 보는 게 제맛인데.
비비는 내 동요를 놓치지 않고 술술 바람을 불어넣었다.
“야시장에서 하는 불꽃놀이가 이 지역 명물이래요. 그냥 불꽃이 아니라 하트 모양 불꽃도 터지고, 막!”
팔까지 벌려 가며 말하는 비비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그렇게 내 나들이에 진심인 거야?”
“그야… 이럴 때 아니면 마님이 언제 마음 놓고 휴가를 보내시겠어요. 집에서도 거의 외출할 때 아니면 일만 하시니까….”
비비가 우물쭈물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거였어?”
어쩐지 찡했다.
“그렇게까지 권하는데, 그럼 나가 볼까….”
내가 중얼거리자 비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앗! 그럼 주인어른께도 말씀 전할까요?”
내가 멈칫했다.
“대공한테…?”
‘지금 어색한데.’
그날 밤, 이안과 밤바다에 다녀온 뒤로는 나는 그가 묘하게 껄끄러워졌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거리두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함께 야시장이라니.
그러나 애석하게도 눈치 백단이면서 이럴 때만 눈치가 없어지기라도 하는지, 콧바람까지 불어 가며 비비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했으니 천천히 출발하면 딱이겠네요! 제가 말씀 전하고 올게요!”
“아니, 잠….”
콩.
말이 끝나기 전에 문이 닫혔다.
내 손이 허망하게 스르륵 흘러내렸다.
“…말은 다 듣고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