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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73)화 (73/91)

73화.

“짐은 빠진 것 없이 챙겼니?”

“그럼요, 마님!”

내 옆에서 짐가방을 점검하던 비비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어제 열 번이나 점검했는걸요! 혹시 몰라서 또 확인하고 있구요!”

…열 번이나 확인했으면 그만 확인해도 될 것 같은데….

내 착잡함을 알 리 없는 비비는 꾸역꾸역 짐을 점검하고 나서야 탁, 소리 나게 가방을 닫았다.

“남부 휴가라니, 제가 그런 곳에 따라가도 되는 걸까요? 너무 설레요!”

번화가 사건으로부터 2주 뒤, 황녀의 생일을 기념해 남부로 떠나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던 비비는 당일이 되자 새벽같이 일어나 재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하녀들을 대동해 아직 비몽사몽인 나를 깨워 씻기고 옷까지 갈아입히는 데는 채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신나니?”

“네! 전 남부는 처음 가 보는걸요.”

네가 행복하다면 됐다.

반면 나는 긴장과 체념이 반쯤 섞인 기분으로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가 사람들과 여행을 가는 것도 죽을 맛인데, 거기서 저번처럼 이안이 황제와 부딪히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머무는 일주일 내내 나는 그들의 완충제 역할을 하게 될 게 분명했다.

“마님! 준비가 다 됐어요. 이제 내려가시면 돼요!”

“그래, 가자.”

그러나 내가 이 상황에 회의감을 느끼든 말든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비비와 함께 일 층으로 내려갔을 땐 로비까지 어수선함이 전해졌다.

“어라, 대공비 전하. 오셨습니까?”

“카일,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아무렴요. 대공비 전하께선 알아주셔서 다행입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알아주셨으면 좋으련만.”

쯧쯔, 혀를 찬 카일이 탐탁잖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의 심복이자 저택의 마법사인 카일은 오늘 남부까지 한 번에 이동할 마법진을 만드는 역할이었다.

일반 마차를 타고 남부까지 가려면 꼬박 보름이 걸렸기 때문에 이안이 지시한 일이었다.

“마법진은 어디까지 되었는가?”

“거의 다 됐습니다. 덕분에 어깨가 쑤셔 죽을 맛이지만요. 대공비 전하의 짐은 저게 전부이십니까?”

카일이 내 어깨 너머, 비비가 들고 있는 짐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비비가 어쩐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내 전담 하녀가 챙겼으니 그럴 걸세.”

“생각보다 짐이 적으시네요. 주시면 제가 짐마차 쪽에 올려 두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하녀님.”

“네, 네!”

카일이 비비를 향해 손을 내밀자, 고개를 푹 숙인 비비가 그에게로 다가가 가방을 냅다 넘겨주고 도망치듯이 내 뒤로 돌아왔다.

‘호오?’

뭔가….

그러나 내가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전에 또 다른 인영이 다가왔다.

“오셨군요.”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에 흠칫 떤 내가 뒤를 돌았다.

더운 남부 지역 날씨를 의식한 건지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의 이안이 서 있었다.

나는 이안의 얇은 셔츠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간신히 눈을 끌어올렸다.

어쩐지 저번 일이 있고 나서 자꾸 시선이 내려가서 죽을 맛이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남부 날씨는 이것보다 좋다고 합니다. 휴가 내내 맑을 거라고 하더군요.”

곁눈질로 로비 바깥 하늘을 쳐다보고선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그를 의식하는 것과 별개로 요즈음 안부 인사 패턴이 부쩍 눈에 띄게 다양해졌다.

예전엔 자동 녹음 기능이 탑재된 AI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면, 요즘은 그나마 사람이랑 대화하는 기분이 든달까.

티 안 나게 그를 훑어본 내가 가볍게 물었다.

“출발까지 얼마나 남았죠?”

“십 분쯤 걸릴 것 같습니다. 먼저 마차로 가 계실 거라면 데려다 드리죠.”

그가 내게 잡으라는 듯 팔을 내밀었다.

불쑥 가까워진 거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 뒷걸음질 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대체 왜 이렇게 의식하는 건데!’

역시 그놈의 상체 탈의가 문제였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신경 쓰일 사람이 따로 있지, 이안을 이토록 신경 쓰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정신 차려!’

언제까지 이 인간 외모에 시달릴 거야.

…몸도 외모인가? 아무튼.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헛기침을 하고 내민 팔을 들여다보았다.

2주 전 내가 붕대로 꽁꽁 감아 놓았던 상처는 어느새 멀끔해져 있었다.

“손은 이제 괜찮은가 보네요.”

“덕분에요.”

이안 클라우드한테 덕분이라는 소리도 듣고. 많이 발전했다, 엘로이즈 클라우드.

새삼스러운 회고를 마치고 그의 팔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본관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생각보다 거창한 행렬을 마주해야 했다.

우리 두 사람이 타고 갈 사두마차뿐 아니라 하인용 마차 두 대, 짐마차 한 대까지 총 네 대의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일주일 비우는데 이렇게까지…?’

그제야 아까부터 온몸이 쑤신다며 툴툴거리던 카일의 말을 이해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법진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놀란 나와 달리 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가장 앞에 있는 사두마차로 안내했다.

마차 탑승까지 도와준 그가 회중시계를 확인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남부까지는 마법진으로 이동할 테지만, 도착 장소부터 별궁까지는 마법진 작동이 불가능해 30분 정도는 마차를 타고 달려야 합니다. 길이 험할 테니 멀미를 하시거든 약을 가져오라 이르겠습니다.”

“멀미약은 괜찮아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부쩍 친절해진 것 같단 말이지.’

원래 같았으면 내가 마차 안에서 멀미를 하든 토악질을 하든 신경 안 썼을 놈이.

어쩐지 묘한 기분에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매를 끌어 올려 예의상 미소를 지어 주었다.

곧바로 멈칫하는 이안에 의해 그만두고 말았지만.

‘안 한다, 안 해.’

그렇게 대놓고 어색한 반응을 보일 필요까지 있냐고.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내 얼굴이 부담스러운 건지 뭔지 고개를 돌리는 이안을 훑어보다가 콧방귀를 뀌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즈음 마법진 설치를 마친 카일이 저 멀리에서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두 분 알콩달콩 연애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긴 합니다만. 곧 마법진 발동할 거니까 이만 마차에 오르시는 게 어떻습니까, 주군?”

“…또 헛소리를.”

이안의 표정이 왈칵 구겨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편 나는 어이가 없는 건 차치하고, 꾸준하게 내일이 없는 듯 구는 카일이 신기해졌다.

‘어떻게 저러고도 아직도 심복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지?’

이안의 성격을 보건대 직장이든 모가지든 둘 중 하나는 날아갔어야 할 깡인데.

내 앞에서 대놓고 땡땡이 드립을 칠 때부터 알아봤지만 보통 캐릭터는 아니었다.

표정이 썩어들어 간 이안이 마차에 오른 뒤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수 초 뒤에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몸이 떠오르고, 눈 부신 빛으로 시야가 물들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창문 밖은 낯선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우와.”

숲이잖아.

창밖이 온통 풀과 나무로 가득했다.

높은 솟은 나무의 빽빽한 이파리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연거푸 감탄을 흘리는 나와 달리 이안은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이 숲을 지나면 별궁입니다.”

“별궁은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있다고 했죠?”

“예. 실제로 바다까지 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만, 침실에서 바다를 볼 수는 있을 겁니다.”

콩가루 황족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을 생각을 하면 아찔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발코니에서 볼 환상적인 오션 뷰는 기대가 됐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는 게 아쉽군.’

나중에 카일에게 사진을 남길 수 있는 마법석도 있는지 물어봐야지.

내가 부푼 꿈을 끌어안고 창밖을 내다보는 동안 마차는 쉼 없이 달렸고, 이안의 말대로 30분쯤 지나자 숲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아, 바다다!”

숲이 사라지자 탁 트인 초원과 그 너머의 수평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차가 달리고 있는 길과 꽤 거리가 있었는데도 맑은 공기 탓인지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지점이 아주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대공, 저기 봐요. 바다예요!”

한껏 들뜬 내가 홱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이안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내내 나를 쳐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예고 없이 마주친 시선에 그가 멈칫했다.

“…예.”

그러고는 시선을 홱 돌려 버리는데,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너무 주접을 떨었나…?’

덩달아 민망해진 내가 큼, 목을 가다듬고 자리에 바로 앉았다.

반대편 창문으로 별궁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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