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러나 내 간절한 마음속 외침을 들을 리 없는 그들은 나와 이안만을 남겨 두고 쌩하니 침실에서 나가 버렸다.
달칵.
가차없이 문이 닫혔다.
나는 어정쩡하게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채로 굳었고, 방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깐의 침묵 후 이안이 말했다.
“…계속 그러고 계실 겁니까?”
내가 뒤늦게 헛기침했다.
“크흠, 아.”
“불편하시면 약과 붕대만 두고 나가 보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제가 해 드릴… 흡.”
어쩔 수 없이 슬쩍 그가 있는 침대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나는 다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왜 옷을 벗고 있어!’
이안이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침대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손만 다친 게 아니라 팔까지 찻물에 푹 젖었으니 당연한 일이긴 한데, 그걸 예고 없이 목격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여기서 티 내면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야, 진정해.’
가까스로 평정을 찾고 머뭇거리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일보 직전인 나와 달리 이안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자각이 없는 거냐고.’
덕분에 나는 그의 벗은 상체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거, 팔 좀 내밀어 보세요.”
침대 옆에 준비된 의자에 어정쩡하게 앉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안이 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주치의가 잘 처치한 듯 아까보단 열상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울긋불긋했다.
“그래도 다행히 흉은 안 지겠네요.”
안도와 탄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직접적으로 물을 맞은 손이 조금 위험할 뻔했다는데 다행히 응급처치를 잘해서 별 이상은 없을 거라더군요.”
그 말을 왜 손이 아니라 나를 보면서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눈을 마주쳤다가 어색해질 그 공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충분히 어색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반나체인 이안과 단둘이 있는 상황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원래 그냥 슬쩍 보고만 나가려고 했는데, 이게 뭐냐고.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트레이를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약을 떠 그의 어깨 쪽부터 천천히 바르기 시작했다.
이안과 나,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 상상 이상으로 서먹한 분위기가 우리를 감쌌다.
‘빨리 붕대만 감고 나가 버려야지.’
제발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은 바로 다음 순간 처참하게 박살 나고 말았다.
“화가 난 겁니까?”
질끈.
이 자식은 평소엔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할까 말까 하면서, 이럴 땐 왜 꼭 말을 거는 걸까.
그러나 나는 이안 같은 싸가지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대놓고 씹지는 못했다.
“…제가 왜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으셔서요.”
그건 네가 웃통을 벗고 있어서 그런 거고.
“화 안 났어요. 제가 뭐라고 화를 내겠어요?”
정말 화는 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퉁명스러운 어조가 튀어나왔다.
이안도 그것을 느낀 건지 가만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부인께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상황입니까?”
“사과를 왜 해요?”
“부인 표정이 화가 난….”
“아, 진짜! 화 안 났다니까…!”
고개를 번쩍 쳐든 내가 멈칫했다.
예고 없이 마주친 이안의 눈이 내내 나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도록 피하고 싶었던 낯 간지러운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사이를 덮쳐 왔다.
“…….”
“…….”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나였다.
“아, 아무튼! 화는 안 났어요.”
어쩐지 귀가 홧홧했다.
하마터면 음 이탈이 날 뻔한 것을 겨우 가다듬었다.
“…화는 안 났는데! 다음부터 이러지는 마세요. 그냥 뒀어도 전 별로 다치지 않았을 거라고요. 어차피 치마 위에 쏟아졌을 텐데….”
구시렁거리는 나와 달리 이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에 내가 잔소리를 하면 건성일지언정 꼬박꼬박 대답하던 것과는 영 다른 태도였다.
딱히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그 꼴을 보고 있으니 한숨부터 나왔다.
‘왜 이러는 건지는 알지만….’
알아서 더 심란했다.
이안은 자신의 주변 사람이 다치는 것을 강박적으로 꺼려 했다.
정확히는,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다치는 것을 전부 본인 탓으로 돌렸다.
그가 사람을 곁에 두지 않고 밀어내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남자 주인공이라는 놈이 멘탈은 아주 유리 같아서….’
속으로 혀를 차다 그만두었다.
이안이 이렇게 된 게 본인 탓은 아니었으니까.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푹 쉬고 손등까지 꼼꼼히 약을 바른 뒤 붕대를 집어 들었다.
“제 말 들었어요? 다음부터 이러지 마시라고요.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챙기니까.”
“…….”
“대답이요.”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생각만 해 보겠다는 뜻이군.
그 와중에 거짓말은 안 하는 이 인간의 뻣뻣함에 경의를 표했다.
여기서 더 채근해 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붕대를 감는 일에 열중했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처음 해 보십니까?”
…티 났나?
붕대 감은 꼴을 보니 한없이 엉성하긴 했다.
당연했다.
살면서 붕대 감아 볼 일이 얼마나 있었겠냐고.
끽해야 고등학교 급식 시간 때 계단을 미친 듯이 내려가다가 다리를 접질려서 압박 붕대나 대충 감아 본 게 전부였다.
나는 대답 대신 꿋꿋하게 그의 팔꿈치 위쪽부터 손까지 붕대를 전부 둘렀다.
정 이상하면 나중에 주치의가 다시 감아 주겠지.
붕대 끝이 잘 고정된 것까지 확인한 뒤에 그에게서 잽싸게 떨어졌다.
“됐어요. 이 정도면 어디 쓸려서 아플 일은 없겠네요. 약은 넉넉하게 발라 뒀으니까 내일 주치의한테 다시 확인받아요. 그쪽이 전문의니까.”
어휴, 숨 막혀서 죽을 뻔했네.
서둘러 남은 붕대와 연고를 정리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이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침실에서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부인.”
아 또 왜.
왜 자꾸 불러.
“네, 말씀하세요.”
마지못해 뒤를 돈 내가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미묘하게 비껴 내리며 대답했다.
답지 않게 오래 침묵하던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
“데이트는, 다음에 다시 하죠.”
…응?
귀를 의심했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쓰던 것도 잊고 멀뚱히 응시했다.
이안의 자청색 눈동자가 잠시 방황하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인께서 싫지 않으시면요.”
어쩐지 본인이 말을 하면서도 익숙지 않은지, 상당히 어색한 얼굴이었다.
이어서 내 입에서 한 박자 느리게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뭐, 뭐야?’
그러나 내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잇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으므로, 나는 재빨리 도망치듯이 방에서 나와야 했다.
“…저, 전 진짜 가 볼게요!”
후다닥 방에서 벗어나 쾅, 문을 닫고 그 위에 기대어 섰다.
‘뭐야, 왜 저래?’
순순히 고맙다는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데이트라니.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트레이를 꽉 쥔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진정하자, 엘로이즈!’
사람이 너무 무섭거나 놀라면 심장이 뛴다고 하는데,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흔들다리 효과에 넘어가지 말자. 오늘 너무 놀랄 일이 많아서 그래.’
스스로를 진정시켰음에도 한동안 벌렁거리는 심장은 진정할 기미를 안 보였다.
그 탓에 나는 한참을, 트레이를 꽉 쥔 채 문에 기대어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