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혼돈과 파괴의 조찬 시간이 지나고, 나는 서둘러 도망치듯 다이닝 홀에서 빠져나왔다.
‘어제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데?’
이안을 깡깡 쳐서 사람을 만들면 마냥 뿌듯할 줄 알았는데, 정작 갑작스럽게 태도가 바뀌어 버리니 뿌듯함보다 당황스러움이 먼저 찾아왔다.
이안 클라우드와 소식지라니,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가늠도 안 됐다.
‘아니지, 오히려 잘된 건가?’
사교계의 노골적인 반응을 보면 뭔가 좀 더 확실히 느끼는 게 있을지도….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침실이 아닌 집무실로 향했다.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는 데는 일만 한 게 없었다.
“좋아, 쓸데없는 고민 말고 오늘치 일부터 해 보자고.”
대공인 이안만큼은 아니지만, 대공비 역시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할 일이 꽤 많았다.
대공저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 처리에 대한 예산이나, 1년 동안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행사 관련 업무는 엘로이즈가 전부 도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라고 누가 놀고먹기만 한다고 했냐고.’
처음에 대공비의 집무실을 찾은 나는 조용히 기함했다.
이 어마무시한 규모의 대공저를 오로지 엘로이즈 혼자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공비가 된 지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인데, 엘로이즈의 집무실에는 내부 재정과 관련된 모든 자료와 일 처리 과정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가 아닐 수 없어.’
이쯤 되니 왜 이안 클라우드가 티끌만큼의 감정조차 없으면서 엘로이즈와 결혼하고, 부부 생활을 이어 왔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자, 일하자 일.”
양손으로 가볍게 뺨을 톡톡 두드리고선 자리에 앉았다.
집무실 책상 위에는 이번 달 예산안을 비롯한 각종 서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사실, 처음 이 어마무시한 업무와 눈을 마주쳤을 땐 잠깐 도망가고 싶었는데….’
나는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이아나의 미래가 이 대공가에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 내가 도망치면 그 피해는 모두 다이아나가 받을 테니까.
최애 가는 길에 꽃을 잔뜩 깔아 놓아도 모자랄 판에 똥을 뿌리면 되겠는가?
내 목표는 다이아나가 올 때까지 이 대공저의 재정을 아주 빈틈없이 관리하는 것이었다.
기지개를 쭉 펴고 서류를 가볍게 훑었다.
“이건 정원 쪽 예산안… 여긴 주방 쪽 예산인가? 쓰읍, 헷갈리네.”
복잡한 서류를 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두 번째 서랍을 열어 두꺼운 책 하나를 꺼냈다.
“뭐, 이 내용도 여기 적혀 있겠지.”
내가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
바로 집무실에 처음 온 날 발견한 엘로이즈의 노트였다.
추측하건대 엘로이즈는 자신이 처리해야 할 업무를 모두 매뉴얼로 만들어 관리했던 것 같았다.
그를 증명하듯 그녀의 노트 안에는 대공저의 예산 운영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찌나 상세한지, 대공저가 돌아가는 방식을 전혀 모르는 내가 보아도 얼추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이 정도면 거의 인수인계 자료 수준인데….’
그래서 처음에 보았을 땐 누구에게 일을 넘겨주려고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엘로이즈는 나처럼 미래를 아는 것도 아니니 인수인계 자료 같은 걸 만들어 놓았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야 고맙지.”
허공에 감사를 보내며 책을 펼쳤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마님, 비비예요.”
“들어오렴.”
내 허락이 떨어지자 비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침실 청소를 하다가 이게 떨어져 있어서. 그냥 선반에 올려 둘까 했는데, 지금 가져다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 가져왔어요.”
비비가 손에 든 건 소식지와 함께 오는 종이와 깃펜이었다.
“아, 그게 거기 있었구나.”
아까 별다른 의견을 쓰지 않고 두었던 게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리 주렴.”
“네, 마님.”
비비가 종이와 깃펜을 건네고선 마저 청소를 하겠다며 집무실을 떠났다.
나는 돌돌 말린 종이와 깃펜을 손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이번 소식지는 굳이 말을 얹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안 쓰기도 아깝고.’
흐음, 입술을 쭉 내밀고 고민하던 내가 눈썹을 들썩였다.
‘…이참에 아까 못 본 다른 글이나 한번 살펴볼까?’
사실, 의견란은 둘째치고 이안이 소식지를 본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 옆으로 밀어 두었던 소식지를 슬그머니 가져와 서류 위에 올려놓았다.
“일은 뭐, 오늘 안에만 끝내면 되니까….”
이 소식지가 주간 발행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안에는 다양한 소식들이 적혀 있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백작가의 살롱에서 거하게 취한 누군가가 그림에 와인을 뿌렸다든지, 어느 집 영애와 어느 집 영식이 밤에 밀회를 가지다가 발각되었다든지, 사업만 했다 하면 말아먹는 백작이 또 사업에 손을 댔다든지….
사교계의 기상천외한 소식들을 한 차례 훑고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어김없이 의견란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탓인지 그곳은 아침보다 훨씬 빽빽하게 많은 이들의 코멘트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 가장 복작거리는 의견란은 역시나 1면을 장식한 광산 전쟁 쪽이었다.
‘광산을 가지고 싸우는 가문이 메리 후작가와 올슨 백작가라고 했었나.’
주제가 주제라서 그런지 의견란에는 본문에 나오지 않은 내용까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근데 광산이 메리 후작가와 올슨 백작가의 영지에 딱 걸쳐져 있다는데 정말인가요?
-우리 오라버니가 영지 관련 부서에서 일해서 들었음. 더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건 올슨 백작가인데, 유일한 출입구를 낼 수 있는 곳이 메리 후작가의 영지에 있다던데?
-엥. 그럼 메리 후작가가 소유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입구 내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잖아요?
-그걸 누가 모르나. 올슨 백작가가 절대 양보 못 한다고 버티고 있으니까 문제지.
새삼 수도 귀족 대부분이 이 소식지를 사서 보는 이유를 다시 실감했다.
‘역시 이런 건 본문보다 아래 댓글이 재미있는 법이거든.’
원래 남들의 수군거림을 훔쳐 듣는 것만큼 시간이 잘 가는 일도 없다.
그런데 아리아 소식지는 그걸 합법적으로 하게 해 주지 않는가.
‘술안주로 딱이겠네.’
흥미롭게 턱을 괴고 눈을 움직였다.
아침에 본 대로 대부분의 의견은 올슨 백작가와, 올슨 백작 부인을 힐난하는 어조였다.
-올슨 백작 부인은 왜 그런대요?
-재작년에 백작이 죽고 나서 좀 이상해졌잖아요. 신경질적이고….
-사정은 딱하지만, 그래도 상도덕이 있지.
-어휴, 난 그렇게 나이 먹지 말아야지.
-저기요, 나이가 여기서 왜 나와요?
-왜 찔리고 그러시나?
‘왜 싸워….’
익명 댓글로 치고받고 싸우는 건 21세기 한국이나 여기나 별다를 게 없구나.
흐린 눈으로 그 부분은 넘기고 다른 글을 훑어 내렸다.
-아무튼, 올슨 백작 부인은 사교 모임도 안 나오고, 음침한 저택에 틀어박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맞아요. 전 올슨 백작저 근처로는 마차도 대지 않는걸요.
수군거리는 의견란을 살피면서 나는 다시금 기시감에 잠겼다.
‘올슨 백작가, 아무리 들어도 뭔가 익숙하단 말이야….’
어쩐지 계속 신경을 갉작였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는 걸 보니 아주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렇다고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를 내가 이렇게 기억할 리가 없는데.
찝찝함에 머리를 굴리고 있을 무렵 다시 의견란이 갱신되었다.
-개발도 안 될 광산을 끌어안고 뭐에 쓰려는 걸까요?
-본인은 이제 백작도 없고, 후계도 없으니 그렇게라도 남에게 훼방을 놓고 싶은 거겠죠.
-죽을 때 싸 들고 갈 것도 아니면서 유난 떤다고 생각함.
-어쨌든 메리 후작만 골치 아프게 됐어요. 덕분에 광물을 캐기는커녕 1년 동안 주변 벌목도 못 하고 있잖아요!
-어우, 근데 이거 올슨 백작 부인도 보지 않나? 이런 말 해도 돼요?
-뭐 어떰, 없는 얘기 하는 것도 아닌데.
‘…어라?’
그 순간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에 나는 하마터면 소식지를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