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연습을 실전처럼 하시는 모양입니다, 부인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고저 없는 음성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이거 작정하고 나 까는 거다.
그 증거로 이안 클라우드는 무심한 말투와 달리 은근히 심기가 뒤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너랑 진짜 데이트를 해야겠니, 내가 다이아나도 아닌데?’
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공교롭게도 오랜만의 나들이에 나도 모르게 신나 버린 건 사실인지라, 반박하는 대신 멋쩍은 헛기침을 했다.
“큼,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어쩐지 지쳐 보이는 사용인들을 힐끗 돌아보고선 이안에게 물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러자고 대답할 것 같던 이안은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깐 내 발치로 향한 것 같기도 했다.
“한 군데 더 들르죠.”
이어서 사용인들에게 들고 있던 짐을 넘기고 마차에 실으라 지시한 그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딜요?”
지금? 우리 둘이?
그러나 내 의아한 반응에도 이안은 달리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꿋꿋하게 손만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키링처럼 내내 뒤만 따라다니다가 갑자기 왜 이래?
얼떨떨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이안이 날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중앙 광장을 조금 벗어나 도착한 가게 앞에서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여긴 왜요?”
대형 구둣가게 앞이었다.
무려 3층짜리 건물 앞에 걸린 휘황찬란한 구두 모양 간판을 본 나는 곧장 알아차렸다.
이곳은 다이아나가 수도의 기강을 잡기 전까지 레반트 제국의 유행을 책임지던 바로 그 구둣가게다.
3대에 걸쳐 장인 정신으로 가게를 이어 왔다나.
그래서인지 작품 후반부에 다이아나와 선의의 경쟁 구도를 펼치는 에피소드도 등장했었다.
‘그런데 여길 갑자기 왜 오냐고.’
설마 내 구두 장식 떨어진 걸 보고 이러는 거야?
의문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구둣가게와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안은 내 눈초리를 고스란히 받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아는 걸 물으시는 건 버릇입니까?”
…응?
얼빠진 내가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가 나를 가게 안으로 이끌었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어서 오… 헉.”
기계적으로 방긋 웃으며 손님을 응대하려던 점원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건 구두를 신고 있던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면 마물이라도 등장한 줄 알겠네.’
숨을 헙, 들이마시는 점원이 있는가 하면, 시선을 교환하더니 누군가를 부르러 재빨리 뛰어 들어가는 점원도 있었다.
남은 점원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긴장한 기색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여기까진 무슨 일로….”
“구둣가게에 방문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무뚝뚝하게 되받아치는 이안의 음성에 점원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내가 보기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이안의 말투인데, 점원이 보기엔 그게 꽤나 살벌하게 느껴진 듯했다.
점원이 우리 앞에서 진땀을 빼고 있을 무렵 가게 저 구석에서부터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갈색 수염이 빽빽하게 턱을 덮은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한 손엔 구두망치를, 한 손엔 제골기를 든 걸 보니 그가 이 구둣가게의 주인이자 제화공인 듯했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그가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반겨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사실 오늘 내내 지나온 상점들도 우릴 보고 비슷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이곳은 규모가 커서인지 유달리 요란한 환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이안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
“대, 대공 전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사람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대개는 쫀다고.
결국 그들 사이의 진땀 빠지는 공기를 견디다 못한 내가 나서서 웃었다.
“조용히 보고 갈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네.”
옆구리를 쿡, 찌르는 내 행동에 그제야 이안이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에게 팔짱을 끼었다.
“오붓하게 둘러보자고 하셨잖아요. 그렇지요, 대공?”
내 간드러지는 물음에 이안이 잠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여긴 왜 왔느냐고 묻더니 금세 태도를 전환하는 게 기가 찬다는 눈치였다.
‘내가 원래 좀 처세술이 좋아.’
그런 표정으로 뻔뻔하게 웃어 주고선 그의 팔에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대공, 제 말이 맞죠?”
“…예.”
마지못해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이안을 가리키며 내가 방긋방긋 웃었다.
“들었겠지? 그러니까 볼일들 보러 가게.”
그제야 깨달음의 탄성을 뱉은 제화공이 꾸벅 인사했다.
“그럼 편하게 보고 가십시오…!”
제화공이 그대로 몸을 돌려 점원들에게 눈짓하자, 단번에 알아들은 점원들이 샤샤샥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그 일사불란한 현장이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 같아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사람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자 이안이 나를 푹신한 소파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앉아 계십시오, 골라 올 테니.”
내가 소파에 앉은 채 멀뚱멀뚱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공께서 골라… 오신다고요?”
“아까 부인께서 받는 사람을 고려해서 물건을 골라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안은 도리어 네가 말하지 않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비스듬히 응시했다.
‘가르친 걸 이렇게 써먹는다고?’
오늘 번화가를 돌아다니는 내내 시큰둥했던 주제에 곧바로 가르친 걸 응용하는 모습을 칭찬해야 할지, 황당해해야 할지 감이 안 섰다.
훌륭한 학생인 것 같긴 한데…. 이렇게 갑자기?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
이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가 버리고, 졸지에 소파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멋쩍음을 느끼며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설에서 스쳐 지나가듯 묘사될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정말 규모가 상당했다.
그만큼 손님들도 많았다.
문제는 그 손님들의 눈길이 모두 나에게 쏠려 있다는 점이겠지.
‘차라리 대놓고 봐라….’
적당히 이목을 끌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혼자 남아 모두의 관심을 받는 건 내 계획에 없었다고.
주변을 둘러싼 뜨거운 시선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쯤 이안이 양손에 구두를 한 켤레씩 들고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입은 샛노란 드레스와 어울리는 개나리색 슬링백 슈즈, 다른 하나는 그보다 조금 어두운 갈색을 띠는 부티 슈즈였다.
아무거나 집어 올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괜찮은 결과물이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안목이 좋으시네요.”
“알고 있습니다.”
“아, 네.”
하여간, 칭찬 좀 해 주려고 하면 꼭 재수 없게 굴어요.
내 표정이 떨떠름해지든 말든, 이안은 내 앞에 구두를 툭 내려놓고 말했다.
“차례대로 신어 보시죠.”
그러나 나는 구두를 신는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공께서 신겨 주세요.”
‘내가 왜.’ 같은 시선이 돌아왔다.
이 인간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끝까지 잘해 보란 말이야.
“이런 건 원래 남자가 신겨 주는 거랍니다. 한쪽 무릎 꿇고요.”
‘넌 그것도 모르냐?’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
“어서요.”
재차 채근하자 나와 신발을 차례대로 보던 그가 옅은 한숨을 쉬며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고개를 숙인 탓에 내 시야에선 그의 정수리만 보였다.
“어떤 게 더 마음에 드십니까.”
그가 신발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전 이쪽, 개나리색 구두요.”
내 대답이 떨어지자 그가 구두를 들어 내 앞에 놓고 신발을 벗겼다.
동시에 간신히 앞코에 붙어 있던 장식이 툭,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